소설리스트

무련전봉-598화 (597/853)

제 598장. 너한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야

자맥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나쁜 자식, 대한국에서 호강하지 않고 천랑국에는 왜 왔어?”

“네가 그리워서 찾아왔지.”

양준이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자, 자맥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난 네 말에 홀딱 넘어갈 어린 소녀가 아니거든.”

그리고 다시 양준 옆에 있는 수령을 힐끔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또 미인을 데리고 왔어. 역시 호색한이야. 옆자리에 미인이 없을 때가 없다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 난 이 사람하고 아무 상관도 없어.”

그 말을 듣고 수령이 투덜거렸다.

“상관없어. 그 자식 곁에 오래 있다 보면 조만간 그의 사람이 될 테니까. 엮이고 싶지 않으면 저 자식과 될수록 거리를 두어야 해.”

자맥이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몇 년 만에 만났는데 이렇게까지 헐뜯을 필요는 없잖아. 너한테 아무 짓도 한 적 없는데.”

양준은 왠지 골치가 아팠다.

자맥은 빨간 입술을 실룩거리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자맥은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듯이,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수령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더니 이를 갈았다.

“이런 망나니였을 줄이야.”

“쟤가 그냥 날 헐뜯는 거야. 그걸 믿어?”

양준이 화내며 말했다.

“대사저, 대사저!”

바로 그때, 양준이 따돌렸던 소녀들이 드디어 뒤쫓아왔다. 그녀들은 모두 자맥의 곁에 날아오더니 경계 어린 얼굴로 양준을 가리켰다.

“대사저를 찾는다고 했어.”

“알았어. 적은 아니니 긴장할 것 없어. 비록 나쁜 놈이지만 내 목숨을 구해 줬었거든.”

자맥은 미소를 머금은 채 설명했다.

“그랬구나!”

소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시름을 놓았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인데 이렇게 접대할 거야? 역시 여인들은 매정하다니까.”

양준이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시답지 않은 소리 그만해. 아니면 들어가서 얘기하자.”

자맥은 콧방귀를 뀌더니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대사저……!”

소녀들은 깜짝 놀라 자맥을 불렀다.

“괜찮아. 나중에 사부님께 말씀드리면 돼.”

양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은 의문투성이였지만 차라리 묻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말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

*양준은 수령과 함께 산속의 통로로 들어갔다.

자맥은 들어가면서 동굴 입구에 있는 돌에 인결을 맺어 다시금 동굴 입구를 봉쇄했다. 동굴 벽에는 열몇 걸음을 사이에 두고 밝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그 덕분에 동굴 안은 꽤 밝은 편이었다.

자맥은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산속 넓은 석실에 다다르자, 자맥은 양준과 수령을 자리에 앉히고 소녀들에게 과일을 내오게 했다.

“별로 대접할 게 없으니까 아쉬운 대로 이거라도 먹을래?”

자맥이 웃으며 과일을 권했다.

양준은 사양하지 않고 빨간 과일 하나를 옷에 쓱쓱 문질러 수령에게 던져 주었다. 수령은 과일을 받아들고 내키지 않았지만 한 입 베어 물었다.

“잠깐 기다려 봐. 내가 사부님께 말씀드리고 올게. 원래 이곳에는 외부인을 들이지 않거든. 네 얼굴을 봐서 먼저 들인 거야.”

자맥이 웃으면서 말했다.

“체면 봐줘서 고마워.”

양준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맥이 자리를 뜨자 소녀들은 한쪽에 일렬로 앉았다. 그녀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살펴보았다.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양준은 그녀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괜스레 물어보지 않고 조용히 자맥을 기다렸다. 그 사이 그는 몰래 신식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그의 안색이 이상해졌다.

산속에는 약 백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 자맥의 사부로 보이는 이는 초범 경지였다. 그 외의 신유 경지 고수는 열댓 명으로 많지 않았고 대부분은 진원 경지나 이합 경지 정도의 무인이었다. 그리고 짐작하건대 그 가운데 8할은 모두 젊은이들인 듯했다.

‘자맥의 상황이 별로 안 좋군!’

30리 밖에는 천랑국의 유일한 대형 세력인 삼라전이 있었다. 자맥의 문파는 삼라전에서 뻗어 나간 것이므로 저쪽에 같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외진 산속에 살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전 양준이 도착했을 때, 자맥이 했던 말을 되새겨 보면 남다른 속사정이 있는 듯했다.

‘보아하니 또 문파의 내부 싸움인가 보네!’

양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반 시진이 지나 자맥이 돌아오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잠깐 머무르는 건 괜찮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고 하셨어. 우리 쪽이 지금 다사다난한 시기라 외부인을 접대하기 불편하거든.”

“나도 여기에 머무를 생각은 없었어.”

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 하러 온 거야?”

자맥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너한테 자유를 주려고.”

그 말에 자맥은 깜짝 놀랐다가 곧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난 신경 쓰지 않아.”

“내가 신경 쓰이거든.”

양준은 웃으며 곧바로 자맥에게 다가갔다.

“긴장 좀 풀어. 나 지금 시작할 거야.”

자맥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눈을 감고 긴장을 푸는 동시에 식해의 방어를 풀었다. 그러자 방대하고 강한 신식이 자신의 식해로 흘러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도 강한 신식에 그녀는 그만 간담이 서늘해져 사색이 되고 말았다. 흘러든 신식에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 같은 기운이 느껴져, 그 열기에 자신의 식해가 순식간에 증발해 버릴 것만 같았다. 가슴을 졸이는 순간, 신식은 다시 그녀의 식해에서 빠져나갔다.

“다 됐어.”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자맥은 두 눈을 떴다. 줄곧 자신을 속박하던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것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이유 없이 온몸이 가뿐해지면서 왠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양준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 경지가 어떻게 돼?”

“신유 경지 6단계!”

놀라움에 찬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삼라전의 소녀들은 모두 입을 막고서 경악에 찬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일찍이 자신들이 어찌해 보려던 사람이 이처럼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자맥은 문파에서 자질이 가장 뛰어났지만, 이제 신유 경지 2단계밖에 안 되었다. 지금 눈앞의 남자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 뒤로도 많은 기연을 만났나 보네.”

자맥은 부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운이 좋았어.”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번에 내가 찾아온 건 너한테 자유를 주고, 또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야.”

“무슨 도움?”

“너희 삼라전의 금지된 땅 폐토에 가보고 싶어.”

자맥의 얼굴빛이 살짝 바뀌었다.

폐토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동시에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있었다. 그 누구도 그곳에 도대체 어떤 변고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 중 살아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일찍이 초범 경지 고수가 폐토 가장 깊은 곳의 비밀을 탐지하려고 들어갔었지만, 그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천랑국에서 폐토의 명성은 대한국의 유명산과 맞먹었다. 두 곳 모두 금기시 하는 곳으로 일반인들은 가지 않는 곳이었다. 지난번 양준과 자맥이 유명산에 가서 수련할 때도 외곽까지만 들어갔을 뿐이라 유명산의 무서움을 제대로 경험해 본 것은 아니었다.

자맥은 폐토로 가겠다는 양준의 말에 저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무슨 일로 가려는 거야?”

“그냥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런데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네가 좀 안내해 줬으면 좋겠어. 걱정하지 마. 그냥 그곳까지 데려다 주면 돼. 너는 그 안에 들어갈 필요 없어. 그러면 너는 안전할 거야.”

“너 정말 죽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자맥은 미친 놈 보듯이 양준을 바라보았다.

수령은 한쪽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은연중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폐토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때문에 양준의 요구를 들은 수령은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자맥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네가 순수한 마음으로 나에게 자유를 주러 올 리가 없지. 역시 다른 목적이 있었구나.”

양준은 씨익 웃었다.

자맥은 그를 흘겨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폐토 그쪽도 요즘은 안전하지 못할 것 같아.”

“뭐? 왜?”

양준은 흥미가 생겼다.

“천랑국의 고수들은 폐토에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여기거든. 그래서 종종 사람들이 그쪽으로 알아보러 가고 그랬어. 얼마 전에 많은 세력들이 손잡고 폐토에 들어갔어. 네가 지금 들어간다면 그들에게 발견될 거고, 소란이 일어날 거야. 너의 지금 경지로는 위험할걸.”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내가 들어가겠다고 한 건 그 사람들이 무섭지 않다는 말이야.”

자맥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여전히 건방지구나.”

그녀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기다려 봐. 사부님께 보고하러 갈게. 사부님이 외출을 허락하신다면 너희들을 데리고 다녀올 수 있어. 하지만 사부님이 안 된다고 하시면… 가는 길을 가르쳐 줄 테니 너희가 찾아가. 어렵지 않을 거야.”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자맥은 깊은 산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소녀들은 여전히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양준과 수령을 훑어보았다. 수령은 과일을 먹고 있었고, 양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소녀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맥이 기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사부님께서 네가 내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으니 이번엔 나더러 널 도와주라고 하셨어. 따라와.”

양준은 미소를 짓더니 일어나서 수령과 함께 자맥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세 사람은 산속의 통로를 따라 밖으로 한참 걸어갔다. 또다시 커다란 바위 앞에 도착하자 자맥이 바위를 옮겼고, 그렇게 세 사람은 산에서 나왔다.

이때,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귀찮은 얼굴로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자맥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그쪽을 바라보았다.

한쪽에서 한 청년을 필두로 한 무리가 나타나더니 다들 비웃는 얼굴로 양준 일행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신유 경지 3단계로 자질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의 옆에 있는 사람들도 대부분 신유 경지였다. 무리는 약 열 명 정도로 많은 수는 아니었다.

그들은 건들거리며 걸어와 세 사람의 앞길을 막고 냉소하였다.

수령과 양준의 옷차림을 본 그들은 모두 미간을 찌푸렸다. 특히 수령의 담청색 머리에 짙은 흥미를 보이며 끊임없이 그녀를 훑어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은연중 음탕한 빛이 번뜩거렸다. 수령은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특별한 머리 색까지 더해져 주목을 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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