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9장. 저 사람은 머리가 나쁜 거야?
“형보(刑保), 너 왜 또 여기 있어?”
자맥은 앞으로 성큼 나서며 그들의 앞길을 막은 무리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예쁜 얼굴에는 혐오의 기색이 서렸다.
형보는 웃더니 느긋하게 말했다.
“사매, 말 참 재미있게 하네. 이곳은 삼라전의 지역인데 내가 왜 못 와? 아, 그러고 보니 사매는 이젠 삼라전의 제자가 아니지? 그럼 자 낭자라고 불러야겠네!”
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뒤에 있던 사람들도 고소하다는 표정이었다.
자맥은 몸을 바르르 떨며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어충(禦蟲) 계통은 그저 당분간 삼라전을 떠나 있을 뿐이지, 문파에서 이탈하는 건 아니야.”
“자 낭자가 모르는 모양이군. 전주(殿主)께서는 이미 너희 어충 계통을 삼라전에서 내쫓았어. 그게 아니면 네 사부가 왜 너희들을 이곳에 데려와 살겠어? 우리 삼라전의 제자가 아니면 삼라전의 지역에 있을 수 없어. 너희들 당장 꺼져. 계속 버티면 걸어서 못 나가게 해줄 테니까.”
자맥이 분노를 참으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굴어야겠어?”
“나한테 도움도 안 될 텐데 너희들이 남아 있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어?”
형보는 코웃음을 치더니 또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야. 네가 얘기를 잘 해서 네 사부가 우리 아버지를 따르게 한다면 다시 삼라전에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사부님에게 네 아버지를 따르게 하라고? 꿈 깨!”
형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고집을 부리다가 큰코다치게 될 거야.”
그는 말하면서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대한국의 무인들을 이쪽으로 잡아오너라. 우리에게 밉보이면 어떻게 되는지 자 낭자에게 보여 줘.”
그의 명령에 뒤에 있던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악하게 웃으며 양준과 수령에게 달려들었다.
양준은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삼라전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자맥에게 묻지 않았다. 괜한 일에 휘말려 시간을 낭비하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결국 귀찮은 일이 벌어졌다.
수령은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보았다. 명령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양준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령은 콧방귀를 뀌고는 하얀 손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물방울들이 쇄도해 오는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물방울은 손바닥만 했는데, 사람들의 몸에 닿자 순식간에 확장되면서 틈이 생기더니 사람들을 그 안에 가두었다.
기세등등하던 무인들은 순식간에 물에 빠진 생쥐처럼 발버둥 쳤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물방울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들은 두둥실 공중에 떠 있었다.
수령은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그러자 형보도 순식간에 물방울에 갇히게 되었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각 물방울에 갇힌 채, 공중에 떠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애를 쓰고 진원을 폭발시켜도 얇은 물방울을 터뜨릴 수 없었다. 그들은 당황하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자맥도 옆에서 입을 떡 벌린 채, 이 광경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특별한 소녀에게 이토록 강한 실력이 숨겨져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수단도 아주 괴이쩍었다.
“망할, 당장 날 풀어주지 못해?”
형보는 공중에서 허둥거렸다. 중심을 잃은 그는 거꾸로 선 채, 수령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날 다치게 하면 죽여버릴 거야.”
“뭐라는 거야!”
수령은 혐오하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곳은 결국 남의 지역인지라 그녀도 지나친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혼내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형보는 눈치없이 점점 더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수령이 자신들을 죽이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여유를 되찾은 그는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너 이 망할 계집, 너 기다려. 내가 나가면 아버지더러 널 잡아와 제대로 혼내 주게 할 거야. 우리 아버지는 삼라전의 전주이니 넌 짓밟힐 준비나 해. 하하하하!”
양준은 깜짝 놀랐다. 그는 마치 바보를 보는 듯한 얼굴로 형보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자맥에게 물었다.
“저 자는 어떻게 된 거야? 머리가 나쁜 거야?”
자맥은 아무 말도 없이 멍한 얼굴로 수령을 바라보았다.
결국 수령이 폭발했다. 그녀는 음산한 얼굴로 형보를 보더니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물방울들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안 돼!”
자맥이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퍽- 퍽- 퍽- 퍽-
물방울이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피가 사방에 튀었다. 그들은 모두 시신도 없이 피와 고깃덩이로 변해 버렸다.
자맥은 몸을 벌벌 떨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신을 차린 양준은 수령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는 수령이 갑자기 사람들을 죽일 줄 몰랐던 것이다.
수령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저들이 말을 심하게 해서 죽인 거잖아.”
양준은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문질렀다.
“왜 그래? 사람 좀 죽이는 게 뭐가 대단한 거라고? 너도 많이 죽였잖아. 사람 죽는 게 무서워?”
수령은 망연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죽는 건 괜찮은데 여긴 남의 지역이잖아. 귀찮게 되었어.”
양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귀찮게 되었어.”
자맥은 양준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역시 이 녀석과 엮이는 게 아니었어. 천랑국에 오자마자 우리에게 이렇게 큰 골칫거리를 안겨주다니.’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도 없는데 마음 풀어.”
이때, 한 사람이 갑자기 공중에 나타났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더니 시선을 양준에게 돌렸다.
“젊은이, 내가 그 말로 삼라전 전주의 화를 가시게 할 수 있을 것 같나?”
“안 될 것 같습니다.”
양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사부님! 죄송합니다. 제가 막지 못해서…….”
자맥이 외쳤다.
공중에 떠 있던 노인은 손을 들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사람을 죽인 건 저들이다.”
그러고는 거대한 위압감으로 내리눌렀다. 그 속에는 짙은 살의와 악의가 담겨 있었다. 양준은 앞으로 나서며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어르신께서는 어찌하려는 것입니까?”
“난 너희들을 사로잡아 삼라전에 보낼 생각이다. 그러면 전주께서 우리 어충 계통과 한데 엮지 않으시겠지.”
노인이 대답했다.
“사부님!”
자맥은 놀라서 소리쳤다. 그녀가 입을 열자마자 노인은 손을 휘저어 기운을 내보냈다. 그러자 자맥은 그 자리에 봉인된 채 꼼짝할 수 없었다.
자맥은 조급한 얼굴로 양준에게 눈짓을 했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라는 뜻이었다. 그녀의 사부는 초범 경지의 고수로, 양준 같은 신유 경지 6단계가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다.
노인의 말을 들은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럴 재주가 있으면 얼마든지요.”
그는 이 상황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말했다.
노인은 흠칫 놀라더니 양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양준이 왜 이토록 침착하고, 자신감이 넘치는지 알 수 없었다. 한참 뒤, 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구나. 대한국 무인들은 모두 이렇게 건방진 것이냐?”
“다는 아닙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노인이 갑자기 살의를 거둔 것에 의문이 든 것이다.
노인이 말했다.
“너희들이 저들을 죽였으니 내가 너희를 사로잡아야 마땅하나,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 젊은이가 이토록 건방질 수 있는 것은 믿을 만한 수단이 있다는 건데, 어디 한 번 네가 어떻게 삼라전 전주의 추격을 피하는지 보고 싶구나.”
그는 자맥의 봉인을 풀어준 뒤 단호하게 말했다.
“자맥, 저들을 데리고 폐토로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우리 삼라전에 발을 들이지 말라 이르거라.”
말을 마친 그는 신형이 번쩍이더니 종적을 감추었다. 다시 자유를 얻은 자맥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부님.”
자맥은 사부가 생각을 바꿀까 두려워 급하게 양준과 수령을 데리고 밀림을 빠져나와 폐토로 향했다.
*반나절 뒤, 그녀의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양준과 수령을 바라보았다.
“너희들도… 참…….”
“네 사부님은 재미있는 분이시더라.”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사부님께서는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분이 아니셔. 사부님도 너희들이 그 녀석들을 죽인 게 고마워서 이렇게 풀어주신 거야.”
“고마워한다고? 그건 모르겠고, 우리를 풀어준 건 그분만의 이유가 있으시겠지.”
양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이유?”
자맥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양준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등을 긋더니 상처 안에서 작은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멱종충(覓蹤蟲)?”
자맥은 안색이 변하면서 멍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사부님이 너한테 심은 거야?”
“네 생각엔?”
양준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되물었다.
자맥은 민망해졌다. 누구도 눈치 못 채게 멱종충을 심을 수 있는 사람은 사부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벌레는 등급도 낮지 않아 한눈에 사부가 키운 것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신경 쓰지 마. 네 사부님이 이렇게 하신 건 우리를 죽이고 싶은 게 아니야. 우리는 너희 어충 계통을 위해 화풀이를 해준 셈이기도 하고, 내가 네 목숨도 구해 주었으니 말이야. 또 단서를 남겨서 삼라전 전주의 화를 가라앉힐 생각이겠지.”
양준은 그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본 것처럼 차근차근 분석했다. 그리고 말하면서 멱종충을 다시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너…….”
자맥은 깜짝 놀랐다.
“왜 다시 넣는 거야?”
“내가 이걸 죽이면 네 사부님이 어떻게 삼라전 전주에게 설명하겠어?”
양준은 웃어 보였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벌레는 내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겠지?”
“응, 멱종충은 암수로 나뉘는데 네 몸에 있는 건 암컷이야. 수컷으로 네 위치를 찾을 수 있지.”
자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컷은 아마도 삼라전 전주의 손에 있겠지.”
양준은 말 두어 마디로 지금 상황을 분석했다. 이에 자맥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두렵지 않아?”
자맥이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감히 덤벼든다면 다시는 이 세상을 못 보게 만들어 줄 거야.”
“참 간도 크군.”
“너희 삼라전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양준은 의아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전까지 모르는 척 묻지 않았지만 결국 골치 아픈 상황에 엮이지 않았던가. 이미 엮였으니 알아야 할 건 알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