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0장. 폐토의 비밀
자맥은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삼라전은 천랑국의 하나밖에 없는 대형 세력이야. 삼라전에는 계통이 다섯 개로 나뉘는데 우리 어충 계통은 그 중의 하나지. 또 가장 약한 계통이기도 해. 십 년마다 다섯 계통에서 한 사람씩 나와 다음 차례 전주 자리를 쟁탈하는데 이번 전주는 바로 아까 그 형보의 아버지 형종(刑宗)이야. 그 사람도 꽤나 괜찮은 인물이지만 권리욕이 너무 강해. 그는 임기가 거의 끝나가자 수를 써 다른 네 계통의 지지를 받았어. 하지만 우리 사부님은원래대로 하자고 동의하지 않았지. 그랬더니 형종이 억압하는 거야. 일 년 전부터 우리 어충 계통은 삼라전에서 배척당해 산속에서 살고 있어.”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으니 삼라전의 현재 상황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어충 계통은 백여 명밖에 없었다. 초범 경지의 고수가 지키고 있으나 삼라전 전주가 일부러 억압하고 따돌린다면 자신의 문파를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삼라전을 떠나 시비를 잠시 멀리했다고 해도 여전히 잘 지내지는 못했어. 형보 그 녀석이 툭하면 사람을 데리고 찾아와 못살게 굴었거든.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면서 우리더러 그의 아버지를 따르라고 하는 거야. 하지만 사부님은 줄곧 그러지 않으셨지.”
“그래서 내가 왔을 때, 네가 그런 말을 한 거구나.”
자맥은 미소를 지었다.
“난 네가 온 줄 몰랐지. 널 하도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어디서 횡사한 줄 알았어.”
말을 마친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이렇게 된 거야.”
양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자맥이 대한국의 무인이었다면 그는 그녀에게 중도로 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랑국의 사람이었다. 설령 자맥이 중도로 가고 싶어 한다 해도 그녀의 사부는 가지 않을 터였다. 형종에게 굴복하지 않는 자세로 봤을 때, 그녀의 사부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을 버리고 타지로 가기 싫어할 게 분명했다.
다른 문파의 일이니 양준도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자신을 건드린다면 가만있지 않을 생각이었다.
*같은 시각, 삼라전 삼십 리 밖의 수풀.
위엄이 흐르는 중년의 사내가 갑자기 하늘에 나타났다.
그는 떨리는 시선으로 아래쪽의 널브러져 있는 고깃덩이와 핏물을 바라보았다. 이내 사내의 기운이 어지러워지더니 진원이 난폭하게 폭발했다.
“류운(流雲), 튀어나와!”
“전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맥의 사부 류운이 나타나며 덤덤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형보를 죽인 놈은 누구냐?”
형종은 화를 냈다. 그의 기운은 불안정한 것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그는 불만 어린 얼굴로 류운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그를 죽일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대한국의 무인 두 명입니다.”
“대한국의 무인?”
형종은 버럭 화를 냈다.
“대한국의 무인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것이냐? 네가 누군가와 결탁해 내 아들에게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
“전주,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제가 그러고 싶었다면 형보는 진작에 죽었을 겁니다. 전주의 체면을 봐서 전 항상 그가 무례하게 구는 걸 참았죠.”
류운은 코웃음을 치며 전혀 형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형종은 화가 조금 누그러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소리쳤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류운은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말했다.
“저도 두 사람이 이렇게 바로 죽일 줄 몰랐습니다. 막으려고 했을 때엔 이미 늦었지요.”
“그놈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형종이 캐물었다.
“네가 이미 잡고 내 명령을 기다리는 거겠지?”
류운은 고개를 저었다.
“도망쳤습니다.”
그 말에 형종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화가 다시 불끈 치솟았다.
“네가 있는데 그들이 어찌 도망칠 수 있다는 말이냐? 네가 풀어준 건 아니고?”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전 그들과 철천지원수를 진 적도 없으니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류운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종은 드디어 폭발했다. 그는 사람을 짓누를 기세로 음산하게 말했다.
“오늘 일은 적당한 해명을 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너희 어충 계통을 멸해 버릴 테니까.”
류운은 냉소하며 말했다.
“전 그냥 아들을 죽인 원수는 전주께서 직접 해결하셔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굳이 나서지 않은 겁니다.”
그러더니 벌레 한 마리를 꺼냈다.
“전주께서는 이게 무슨 벌레인지 아시지요?”
“멱종충?”
형종은 눈앞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맞습니다.”
류운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멱종충입니다. 제 손에 든 것은 수컷이고, 암컷은 이미 형보를 죽인 사람의 몸에 있습니다. 이 수컷을 이용하면 전주께서는 쉽게 그들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이리 내놓거라.”
형종은 다급히 손을 뻗었다.
류운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수컷을 원하신다면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감히 나와 조건을 논하는 것이냐?”
형종은 화가 나 소리쳤다.
“멱종충이 없다면 내가 그놈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으냐? 우습구나. 그놈이 천랑국에 있기만 하다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찾아낼 것이다.”
“전주께서 그들이 어디로 간 것인지 안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류운은 냉소하며 말했다.
그러자 형종이 미간을 찌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느냐?”
“폐토로 갔습니다.”
형종은 당황하더니 심호흡을 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말해 보아라!”
폐토는 아무리 형종이라 해도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의 기운은 너무 혼란스럽고 거셌다. 명확한 안내가 없이는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길을 잃으면 평생 빠져나올 수 없었다.
“어충 계통이 다시 삼라전으로 돌아가고, 예전처럼 십 년마다 전주가 바뀌는 거로 하십시오. 전주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전 이 수컷을 없애 버리겠습니다!”
“네가 감히!”
형종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류운은 냉소하며 전혀 다급해하지 않았다. 이내 그의 손에서 진원이 꿈틀거렸다. 어떻게든 형종을 굴복시키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한참 뒤에야 형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기로 약속하지. 내가 아들 죽인 원수를 갚게만 해 준다면 다 네 뜻대로 해 주겠어.”
“전주께서 약속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류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형종을 믿지 않았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없어 손에 든 수컷 멱종충을 던져 줄 수밖에 없었다.
그걸 받아 든 형종은 코웃음을 치더니 폐토의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틀 뒤, 폐토의 외곽에서 양준 일행은 멈춰 섰다.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아무것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광경을 보고 양준과 수령은 모두 신기하다는 듯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눈앞의 땅이 내뿜는 기운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래서 천랑국의 금지된 땅이라고 하는구나.’
“여기야.”
자맥은 겁먹은 얼굴로 더 이상 다가가기 싫어 했다.
“고마워.”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간 자맥은 양준에게 폐토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알려 주었다. 때문에, 그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 둔 상태였다.
“정말 들어가려고?”
자맥은 머뭇거리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양준이 왜 폐토로 들어가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연하지.”
“그럼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자맥은 한숨을 내쉬고 더는 말리지 않았다.
“괜찮아.”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 들어가면 다시 만날 수 없을 거야. 우리도 다시는 나오지 않을 거고. 너 그만 삼라전으로 돌아가.”
자맥은 깜짝 놀랐다.
“돌아가서 네 사부님께 알려. 다음에 또 날 두고 꿍꿍이를 꾸민다면 아무리 네 사부님이라도 죽여버릴 거라고.”
양준은 씨익 웃으며 사악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는 수령을 데리고 폐토로 들어갔다.
자맥은 멍하니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양준, 조심해. 절대 죽지 말고.”
양준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만 흔들어 보였다. 곧 그와 수령의 그림자가 자맥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왠지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녀와 양준의 교분은 깊은 편이 아니었다. 유명산에서 함께 지낸 시간 동안, 양준은 여러 가지 놀랄 만한 기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만나, 남겨 준 충격은 더더욱 컸다.
‘나쁜 놈, 언제 벌써 신유 경지 6단계나 되었대?’
이처럼 뛰어난 사내를 본 적이 없어서인지 양준이 떠나자 그녀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폐토는 풀 한 포기도 없고 생명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황량함과 바람에 흩날리는 모래만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주변 열 장 이내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속에 발을 들인 양준은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자맥은 폐토의 기운이 기괴하여 언제 재난이 닥칠지 모른다고 했다. 이곳에서는 조금만 방심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열악한 환경 탓에 방향 감각이 뛰어나지 못하면 길을 잃을 수 있었다. 해마다 이 속에서 기연을 찾으려고 들어왔던 무인들이 대거 실종되어 시체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자맥은 폐토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이백 년 전부터 갑자기 이렇게 변했다고 했다.
폐토가 위치한 자리는 원래 이처럼 황량하고 쓸쓸한 곳이 아니었다. 비옥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꽃과 풀이 있고, 새가 지저귀며 사람의 자취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백 년 전의 이변으로 천랑국에는 폐토라는 곳이 신비하게 생겨 났다.
자맥은 폐토의 내력을 모르고 있었지만 양준은 잘 알고 있었다.
천랑국의 금지된 땅인 폐토는 몽무애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몽무애는 허공 통로를 이용해 통현대륙으로 가기 전 마지막 순간에 양준에게 정보를 알려 주었다. 양준에게 통현대륙으로 가는 길과 방법을 알려 준 것이다. 몽무애의 가르침대로 양준은 이곳에 오게 되었다.
몽무애가 아니었다면 양준도 폐토에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허공 통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애당초 몽무애는 통현대륙에서 지금 폐토가 있는 곳에 떨어졌다. 그는 허공 통로를 보호하기 위해 수단을 사용해 이렇게 금지된 땅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곳은 점점 더 위험해졌다. 그렇게 폐토는 몽무애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지금의 규모로 발전되었다.
‘이백 년 전에 몽 주인이 허공 통로로 이 세계에 왔다고 했으니… 몽 주인은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는 거지?’
양준은 그가 남겨준 정보를 떠올리자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몽 주인은 참 신비로운 사람이야.’
양준은 자신이 몽무애에 대해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가 아는 것은 새 발의 피였다. 그는 몽무애의 진짜 경지가 초범 경지 3단계 정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늙은이가!’
양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