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602화 (601/853)

제 602장. 통현대륙에 도착하다

“사람을 죽였으니 목숨을 내놓거라. 너희들의 피와 영혼만이 하늘로 간 내 아들의 영혼을 달래줄 수 있을 것 같구나.”

“얘기를 좀 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전 당신의 아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 옆에 있는 이 친구는 성격이 난폭해서 당신 아들이 말로 희롱을 하자 화가 나서 죽였습니다. 그가 죽음을 자초한 셈이지요.”

“닥쳐라!”

형종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양준의 말을 잘랐다.

“내 아들이 희롱 좀 했다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게 해?”

“제가 죽이지 않았다면 말로 희롱을 당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겠죠. 당신 아들이 어떤 인간인지 당신도 알 거 아니에요?”

수령은 씩씩거리며 말했다.

형종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아래위로 수령을 훑어보았다. 먼지로 가득한 얼굴에서도 숨겨진 미모가 드러났다. 그는 형보가 괜히 이 여인을 희롱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내 아들이 먼저 잘못했다는 것이군.”

“맞아요.”

수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럼 너희들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지. 어떻게 죽고 싶으냐?”

형종의 뒤에 있는 고수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비웃는 얼굴로 양준과 수령을 바라보았다.

‘이 대한국의 무인들은 참 운도 나쁘지. 하필이면 형 전주의 아들을 죽이다니. 죽어도 싸.’

“그럼 더 얘기할 것이 없겠네요.”

양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전 천랑국을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지, 천랑국 사람들과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람도 죽이고 싶지 않았고요.”

“사람을 또 죽이려고?”

그 말을 들은 형종은 가소롭다는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넌 그럴 기회가 없어. 오늘 뒤로 넌 시체일 테니까. 사람을 죽일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양준은 씨익 웃었다. 순간, 거대한 뼈 방패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 크기는 족히 집 몇 채만 했다. 모양새가 기괴하고 변두리에 뾰족한 가시가 돋친 방패의 중앙에는 짐승 아가리가 쩍 벌린 채로 놀라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잘 가세요.”

뼈 방패를 사이에 두고 양준은 천랑국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형종과 스무 명이 넘는 신유 경지의 무인들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소름이 끼쳤다.

그때, 짐승의 아가리에서 파괴성이 짙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운에는 방대한 허공의 힘이 숨겨져 있었는데, 이 힘은 폐토에 무려 천 장 정도의 진공 지대를 만들어 놓았다.

천 장의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허공의 힘에 의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더니 가루가 되었다. 천랑국의 신유 경지 무인들은 반응할 새도 없이 가루가 되었다. 그중 가장 실력이 높은 형종만 겨우 잠깐 견디다가 결국 비명을 지르며 죽었다.

수령은 그만 멍해졌다. 그녀는 양준이 믿는 구석이 있기에 덤덤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믿는 구석이 이렇게 강할 줄 어찌 알았으랴.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적들이 모조리 죽었다. 그중에는 초범 경지의 고수도 있었다. 수령은 초범 경지의 고수가 이토록 나약해지는 순간을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천랑국 고수들의 신식은 양준 식해의 흡입력에 이끌려 그의 머릿속으로 흔적도 없이 흡수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뼈 방패는 방금 전의 폭발로 원래의 크기로 돌아온 상태였다.

찌지직-

뼈 방패에는 수많은 틈이 생겼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방패를 얼른 갈무리했다. 지난번 중도 지하에서 허공 통로의 기운을 흡수할 때, 뼈 방패는 이미 한차례 손상을 입었다. 그런 상태에서 기운을 폭발시켰으니 손상 정도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기사를 찾아 손보지 않으면 더 이상 못 쓰겠는데?’

이때, 주변의 혼란스러운 기운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방금 전의 공격으로 무슨 이변이 생겼는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린 양준과 수령은 안색이 크게 변했다. 깊은 어둠이 있는 곳에서 억눌린 기운이 폭발할 것 같은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서둘러!”

양준은 머뭇거리지 않고 다급히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수령도 바짝 뒤쫓았다.

깊은 어둠으로 날아가는 도중에 양준은 끊임없이 진원을 뿜었다. 그러고는 진원이 특별한 방식으로 주변에 충격을 가하게 했다. 이는 몽무애가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 알려 준 방법이었다. 오직 이 방법으로만 최후의 방어를 뚫고 허공 통로가 존재하는 위치에 이를 수 있었다. 방법을 모른 채 무모하게 들어가게 되면 숨겨진 오묘한 무공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몽무애가 가르쳐 준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혼란스러운 기운이 마구 날뛰었지만 양준이 정확한 수단을 사용한 덕에 그들이 지나는 곳은 고요하고 위험이 없었다. 불바다를 뛰어넘고 얼음층을 뚫으며 벼락을 통과하는 등 온갖 위험을 거친 뒤, 양준은 수령을 데리고 무사히 어둠의 너머에 도착했다.

그는 손을 내밀어 진원을 세차게 주입했다. 그러자 깊은 어둠이 갈라지며 소름 끼치는 허공의 기운이 느껴졌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수령은 눈을 반짝이며 흥분을 금치 못했다.

“들어가!”

양준은 그녀를 잡아끌고 허공 통로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자신도 바로 뛰어들었다.

주변은 컴컴한 어둠뿐이었다. 텅 빈 혼돈만이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또한 천지가 열리지 않아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무중력 상태에 들어서자 침착하던 양준도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곧이어 자그마한 손이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다가오더니 양준의 손을 꼭 잡았다. 수령이었다. 그녀는 겁이 나 어쩔 줄 몰라 하며 무의식중에 양준에게서 안정감을 찾으려고 했다.

양준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 주며 위안을 주었다.

이번에 허공 통로를 통과하는 느낌은 전과 달랐다. 예전에는 대한국 내에서 움직인 거라 거리가 멀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른 세계로 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양준은 갑자기 눈앞이 밝아지는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어둠은 물러가고 그 대신 파란 하늘이 그를 반겨 주었다. 싱그러운 흙 냄새도 전해졌다.

파팍-

두 사람은 차례로 바닥에 떨어졌다. 흙탕물에 떨어진 탓에 양준과 수령은 얼굴이 새카매졌다. 둘은 다급히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 밑은 진흙탕 같은 늪지였고, 주변에는 작은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괴상한 짐승들이 늪지대를 누비며 오가고 있었다.

이곳의 천지 영기는 매우 짙었다. 심지어 큰 변화를 겪은 중도보다도 더욱 짙었다. 곧이어 양준의 온몸의 모공이 활짝 열리고 진양결이 미친 듯이 운행되더니 주변의 영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하하! 돌아왔어. 돌아왔어. 나 드디어 돌아왔어!”

수령은 멍하니 있다가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여기가 통현대륙이야?”

양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수령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양준을 와락 끌어안으며 울먹거렸다.

“고마워. 날 데리고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양준도 기쁜 마음에 고개를 들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통현대륙에 왔구나! 소안과 하 사저도 이 하늘을 보고 있겠지. 그녀들도 이 땅을 밟았겠지. 그리고 몽 주인과 지마도. 같은 하늘 아래 있으면 언젠간 그들을 만나는 날이 오겠지!’

양준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수령은 자신이 지금 얼마나 지저분한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기뻐서 폴짝폴짝 뛰었다. 덩달아 양준의 기분도 좋아졌다. 기분이 풀리자 양준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몸이 전과 다르게 가벼웠다. 마치 줄곧 그를 짓누르고 있던 속박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곧이어 진양결의 운행 속도가 더 빨라졌고, 온몸의 기혈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경맥과 피와 살이 춤추기 시작했다.

“수령……!”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수령을 불렀다.

“왜 그래?”

수령은 움직임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 곧 경지를 돌파할 것 같아.”

수령은 입을 틀어막고 놀란 말투로 물었다.

“지금?”

“응.”

양준은 대답하고 나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수령은 잠깐 생각해 보다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그래, 너희들이 살던 그곳에는 무언가가 무인들이 발전하지 못하게 속박하고 있었어. 그런데 통현대륙에 오면서 그 속박이 사라진 거고, 바로 그 때문에 네가 돌파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거야. 하지만 여기서 돌파하기엔…….”

‘적합하지 않아.’

지금 두 사람은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주변에 위험한 사람이나 강한 요수가 있는지는 더욱 알 길이 없었다. 돌파하는 과정에 다른 사람에게 방해를 받거나 공격을 당하면 큰일이었다.

“참을 수는 없어?”

수령이 물었다.

양준은 힘겹게 눈을 떠 그녀를 흘겨보고 나서는 또다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못 들은 거로 해.”

수령은 쓴웃음을 지었다. 경지를 돌파하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인데 어찌 참는다고 참아지겠는가? 그녀는 하는 수 없이 신식을 펼쳐 주변에 잠재된 위험이 있나 둘러보았다. 사방 십 리 안에 이상한 점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한시름을 덜고 조용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녀도 양준이 경지를 돌파하는 동안 이곳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지금 있는 곳의 위치를 파악할 생각이었다.

*양준과 수령이 있는 곳에서 십여 리 떨어진 곳에 몇몇 사람들이 풀숲에 잠복해 있었다.

그들은 7~8명 정도로 인원이 많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신유 경지의 고수였다. 통솔자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숨소리가 너무 커. 좀 죽여. 안 그럼 그게 도망칠 거야.”

여인이 덤덤한 얼굴로 경고했다. 뒤에 있던 사람들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의 몸매를 훔쳐보지 않았다.

“우리의 이번 목표가 뭔지 알아?”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됐어.”

여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혈진란(赤血眞蘭)은 천지 영물이라 자신만의 의식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얕보지 마. 내가 아는 바로는 적혈진란 한 포기는 잎이 일곱 개야. 그건 천 년 묵은 천지 영물이라 가치가 어마어마해. 우리가 그것을 찾을 수만 있다면 큰 이득을 보게 될 거야.”

그러자 한 사내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일이 성사되면 우리는 무슨 상을 받게 됩니까?”

“인당 정석(晶石) 스무 개다.”

여인이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정석 스무 개는 그들에게 큰 재산이었다.

순간, 모든 이들의 투지가 불타올랐다. 그들은 더 이상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눈을 돌리지 않고 숨을 가다듬은 채, 적혈진란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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