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603화 (602/853)

제 603장. 적혈진란

“곧 나타날 거야.”

여인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달마다 그것은 햇빛을 흡수하기 위해 떠오르곤 해. 오늘이 바로 그놈이 나타나는 날이야. 너희들은 곧 소원을 이루게 될 거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설치한 금제(禁制)와 함정은 그놈을 잡기에 충분합니다. 나타나기만 한다면 도망칠 수 없을 겁니다.”

사내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좋고. 랑야복지(瑯琊福地)의 소주(少主)가 다치셔서 적혈진란이 필요해. 만약 우리 독오맹(獨傲盟)이 랑야복지와 사이가 좋아진다면 큰 이득을 가져오게 될 거야.”

여인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독오맹은 세력이 작지 않지만 고수가 적어 다른 세력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랑야복지는 유명한 큰 세력으로 만약 랑야복지와 친분을 맺게 된다면 독오맹의 발전에도 유리할 것이 분명했다.

“나왔다!”

바로 이때, 옆에서 누군가 나지막하게 외쳤다. 사람들은 정신이 번쩍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

곧이어 혼탁한 흙탕물에 옅은 붉은빛이 감돌더니 시간이 흐르면서 그 붉은빛은 점점 더 밝아지고 또렷해졌다. 그러다 잎이 일곱 개인 온통 새빨갛고 결이 분명한 난꽃이 늪지에 떠올랐다.

사람들의 호흡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천 년 묵은 적혈진란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한참 뒤에야 적혈진란은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 식물이긴 하나 그것은 천지 영물이라 자신만의 의식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위험을 감지하면 스스로 위험을 피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소저……!”

일행 중 한 명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기다려!”

여인은 나지막하게 분부했다.

“저 놈은 교활해. 이번에 나타난 것도 상황을 살펴보려는 걸 거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적혈진란은 다시 늪지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 후 시간이 흘렀는데도 적혈진란이 다시 나타나지 않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적이 발각된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오직 여인만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가 지나자 늪지에 또다시 붉은빛이 감돌았다. 잠시 뒤, 적혈진란이 두 번째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완전히 늪지를 벗어나 옆에 있는 풀숲으로 와서는 뿌리를 내렸다. 그러고는 일곱 개의 잎사귀를 활짝 펴고 마음껏 햇빛을 흡수했다.

“움직여!”

여인이 지시했다. 지금 움직이는 것이 가장 적절했다. 적혈진란이 가장 무방비한 상태로 있는 시기였다.

계속 조바심을 내며 안절부절못하던 사내는 명령을 듣자마자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는 양손으로 현묘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들이 사전에 설치한 금제와 함정을 작동했다. 그런데 금제와 함정이 제대로 작동을 하기도 전에 십몇 리 밖에서 강렬한 원기 파동이 전해졌다. 순간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여인은 머뭇거리지 않고 번개 같은 속도로 적혈진란을 덮쳤다. 하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원기 파동을 감지했을 때부터 적혈진란은 다시 늪지로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허탕을 친 여인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일행들의 얼굴에는 실망한 표정이 가득했다. 정석 스무 개가 이렇게 물거품이 되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다른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여인은 화가 나 고개를 돌리고 일행 중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방 오십 리 안의 모든 사람을 내쫓았다면서?”

이번에 적혈진란을 손에 넣기 위해 독오맹에서는 한 달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들은 주변 사방 오십 리 안에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했고,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도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방금 전에 느껴진 원기 파동은 누군가 경지를 돌파할 때 느껴지는 기척이었다.

사내는 입을 달싹이다가 시뻘개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십 리 안의 사람들을 전부 내쫓은 게 맞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난 거야?”

여인이 그를 질책했다.

“보름 뒤에 적혈진란을 가져다주겠다고 랑야복지에 이미 말했단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사내는 할 말이 없어서 어물거렸다.

“아니면 한 번 더 시도해 보는 게…….”

“시도해 봐?”

여인이 냉소했다.

“적혈진란은 이미 늪지의 아래쪽으로 내려갔어. 이번 충격으로 놈은 최소한 반년은 나타나지 않을 건데 어떻게 시도해 본다는 거야? 내려가서 찾아보기라도 할래?”

여인이 호되게 질책하자, 사람들은 반박도 하지 못하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여인은 거칠게 숨을 들이쉬었다. 성공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변고가 생겨 결과물을 눈앞에서 놓쳤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제자리에 선 채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여인은 원기 파동이 전해지는 방향으로 걸어가며 냉소했다.

“따라와. 누가 우리의 일을 망쳤는지 봐야겠어!”

“찾으면 바로 죽여버릴 거야!”

여인에게 가장 크게 질책을 당했던 사내가 분노에 차 소리치자, 여인이 그를 매섭게 흘겨보았다. 그러자 그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십몇 리 밖, 양준은 가볍게 주먹을 쥐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신유 경지 7단계가 되었다. 통현대륙으로 온 그는 천지의 억압에서 벗어나자 순식간에 한 단계를 돌파했고, 식해 안에 모아둔 신식의 힘도 전부 흡수하고 나니 많은 이득을 얻게 되었다.

“축하해.”

수령은 생글거리며 멀지 않은 곳에서 걸어오더니 축하의 말을 건넸다.

양준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신유 경지 7단계의 실력은 대한국에서는 꽤나 괜찮은 편이었지만, 초범 경지의 오묘함을 알고 통현대륙에 온 지금, 그는 감히 그리 생각하지 못했다. 이 정도 경지는 초범 경지 앞에서 약한 편이었다. 반드시 빠르게 실력을 끌어올려야 이 넓은 땅에서 뭔가를 이룰 수 있고, 또 소안과 하응상을 찾을 수 있었다. 실력이 없다면 어디를 가도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잘 살펴봤어?”

양준이 물었다.

그가 경지를 돌파할 때, 수령도 근처에서 지형을 살펴보며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수령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의 늪지가 특별하긴 해도 통현대륙에는 늪지대가 아주 많아서 구체적으로 어딘지 잘 모르겠어. 그런데 인류의 지역인 건 맞는 것 같아.”

“인류의 지역이라고?”

그녀의 말을 들은 양준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참, 통현대륙에는 인류뿐만 아니라 마족(魔族)과 요족(妖族)이 살고 있는데 모두 실력이 강한 종족이야. 마족, 요족, 인류는 균형을 이루면서 대립하고 있어. 인류가 활동하는 곳은 인령(人領), 마족이 사는 곳은 마강(魔疆), 요족이 사는 곳은 요역(妖域)이라고 해. 그리고 중립 지대라는 곳도 있는데 3대 종족 말고도 별의별 종족들이 다 있어. 나중에 차차 알게 될 거야.”

수령은 몇 마디 설명했지만 깊게 말해 주지 않았다. 이것은 모두 상식이라 양준이 이곳에서 살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양준은 깜짝 놀랐다. 수령은 웃으며 덧붙였다.

“너희 쪽에 7급 요수인 여왕 거미가 있지? 그 요수가 사람 모습으로 변한다면 요족 중의 하나야. 하지만 그러려면 화생지의 힘이 필요해. 화생지는 요족의 보물이거든. 호들갑 떨 거 없어. 이곳에서는 네가 생각도 하지 못한 것들을 많이 보게 될 거야.”

양준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견식이 좁았군.”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오른 듯,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장 몽과라고 들어본 적 있어?”

수령은 깜짝 놀라 안색이 변했다.

“넌 그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 있어?”

양준은 깜짝 놀랐다. 그저 물어보기만 했을 뿐인데 수령의 반응을 보니 대단한 인물인 것 같았다. 양준이 창운사지의 흉살사동에서 수련하고 있을 때, 흉살사동에서 변고가 일어나며 염명귀왕 휘하의 네 고수가 그곳으로 진실을 탐색하러 들어갔었다. 그러다가 사령 샘물에서 나온 강한 존재에 의해 순식간에 두 명이 죽고 두 명은 중상을 입었다.

나중에 양준이 쇄마련으로 강한 존재를 소멸시켰지만, 그 존재는 죽기 전에 자신이 마장 몽과의 분신이라고 말하면서 양준의 기운을 기억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하기까지 했다. 양준은 줄곧 마장이 도대체 무슨 신분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방금 전, 수령에게서 마족과 요족에 대해 듣다 보니 문득 생각난 것이었다.

“인류는 아니고 마족의 고수야!”

수령은 멍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넌 참 이상해. 줄곧 그쪽 세계에 있었으면서 마장 몽과는 또 어떻게 아는 거야?”

양준은 흉살사동에서 일어난 일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수령은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동정의 표정을 지었다.

“네가 몽과의 분신을 다치게 했다니……. 앞으로 그의 이름을 들으면 꼭 피해야 해. 마족의 고수는 네가 감당할 수 없어.”

“얼마나 대단한데?”

양준이 물었다.

“네 말을 들으니 그의 분신 하나가 초범 경지에 가까운 수준이라는 건데, 그렇다면 그의 진짜 육신은 입성 경지의 고수일 거야. 구체적으로 몇 단계인지는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인령의 고수들도 다 그를 두려워해.”

양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자신이 밉보인 상대가 이렇게 대단한 인물일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어.”

말이 끝나자마자 양준은 싸늘한 얼굴로 다급히 일어서더니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수령도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그쪽에서 신유 경지 무인들의 기운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최대한 기운을 숨기고 있었지만 양준을 속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판단했을 때, 그들의 목표는 양준과 수령이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될 기회가 생겼네.”

양준은 수령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수령은 여유롭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양준과 함께하는 동안, 자신 또한 많이 대담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전에 이런 상황에 부딪혔더라면 그녀는 시끄러운 일에 휘말릴까 두려워, 여기를 떠나기에 급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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