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604화 (603/853)

제 604장. 내가 언제 미움을 샀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7~8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우두머리는 여인이었는데 성숙한 몸매에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양준은 눈앞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며 표정도 의미심장해졌다. 통현대륙에 도착하자마자 아리따운 여인을 만나게 되니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매우 화가 난 듯, 푸르뎅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에 있는 예닐곱 명도 씩씩거리며 화난 표정이었다. 양준과 수령을 본 그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했다.

그들의 사나운 표정에 양준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언제 이들에게 미움을 산 적이 있나?’

하지만 간이 큰 그는 조용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여인은 사람들을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십몇 장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녀는 싸늘한 눈빛으로 양준과 수령을 훑어보더니 버럭 화를 냈다.

“웬 놈들이야?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지나가던 행인입니다. 길을 잘못 들어 이 늪지대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이곳은 어딥니까?”

양준이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지금 나한테 이곳이 어디냐고 물은 거야? 감히 나한테 이곳이 어디냐고 물은 거냐고?”

여인은 더더욱 화가 났다.

“네. 나갈 길을 도무지 찾지 못하겠습니다.”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와 수령은 천랑국에서 올 때부터 폐토에서 온갖 고생을 다 했고, 늪지에 도착하자마자 구르기까지 했으니 지금 모습은 지저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초라한 모습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괜찮다면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양준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이를 드러낸 채, 환히 웃는 모습은 아주 선한 인상을 풍겼다.

“그럼, 되지. 왜 안 되겠어?”

여인은 냉소하며 손을 내저었다.

“계홍(季弘), 당장 저 둘을 잡아라. 적혈진란을 놓쳤으니 저들을 끌고 가야겠다!”

“예, 소저!”

계홍이라 불린 사내가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움직이려 했다.

“잠깐!”

양준은 손을 들어 그 행동을 저지시켰다. 그들의 적의는 진작 눈치채고 있었지만, 통현대륙에 오자마자 시끄러운 일에 엮이고 싶지는 않았다. 신유 경지의 고수들이 함께 다니는 것을 보면 한 세력의 무인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을 죽이는 것은 쉬워도 그 때문에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면 큰일이었다. 또한 여인의 말에 양준은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다. 갑작스레 이렇게 강한 적대감과 마주하자 그 연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적혈진란이 뭡니까?”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천지 영물인가?”

수령은 견식이 있어 바로 알아맞혔다.

“그래, 천지 영물이야. 게다가 천 년 묵은, 잎이 일곱 개짜리인 적혈진란!”

여인은 차갑게 말하며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는 그런 영물을 본 적도 없습니다.”

양준이 변명했다.

‘설마 내가 그들의 보물을 빼앗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너희들이 봤다고 한 적 없다. 하하…….”

여인은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다짜고짜 사람을 잡아들이는 것은 적절한 처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녀는 차근차근 물었다.

“방금 전에 경지를 돌파하고 진급했지?”

“네, 맞아요. 그런데요?”

양준은 짜증이 났다. 눈앞의 여인은 아름답긴 하나 말에 두서가 없고 중점이 없어 들을수록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진급할 때 나는 소리가 하도 커서 양준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통쾌하게 인정했다.

“그럼 됐어. 너희들이 진급하면서 낸 소리에 적혈진란이 놀라서 도망쳤어. 우리가 한 달 넘게 노력한 것이 물거품이 되었지. 그게 너희들 잘못이 아니면 무엇이냐!”

“음…….”

양준은 깜짝 놀랐다. 수령과 시선을 교환한 그는 여인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무슨 상황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천지 영물은 그도 본 적이 있었다. 음양요삼과 구음응원로는 모두 천지 영물로서 자신만의 의식을 가지고 있어 위험을 피할 줄 알았다. 그가 아까 전에 진급할 때 낸 소리에 적혈진란이 놀라서 도망쳤다고 하는 것도 말이 되었다. 양준은 상황을 대충 파악한 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당신들이 천지 영물을 잡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흠흠…….”

양준도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알고 있었다고 해도 진급할 때 자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심결에 한 행동이라도 그에게 책임이 있었다.

‘이 사람들 참 운도 없네.’

“사과해도 소용없어. 적혈진란은 우리에게 아주 필요한 거야. 말 두어 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여인이 냉소하며 말했다.

“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양준은 미안한 표정을 거두고 냉소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좋게 말했다면 손해를 얼마간 배상할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여인의 사나운 태도에 반감을 느낀 그는 더 이상 자세를 낮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싸움이 붙는다면 양준은 잠깐 사이에 이들을 모두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들이 주제 파악을 하는지 봐야 했다.

양준의 태도가 달라지자 여인은 표정이 날카로워지며 호통쳤다.

“왜? 우리 독오맹을 공격이라도 하게?”

“독오맹? 당신들은 독오맹 사람이었군요. 그렇다면 이곳은 택서 늪지(澤西沼澤)죠?”

수령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한 눈빛으로 먼지투성이인 수령을 바라보았다.

“넌 그래도 아는 게 있네. 넌 뭐 하는 사람이야?”

수령은 웃으며 말했다.

“전 수신전 사람이에요.”

그 말을 들은 여인과 예닐곱 명의 사람들은 얼굴빛이 바뀌더니 멍한 얼굴로 수령을 바라보았다. 눈치를 보니 수신전의 세력은 양준이 생각했던 것처럼 약하지 않은 것 같았다.

수령은 전에 양준에게 이쪽에 관한 정보를 많이 말해 주었다. 그녀는 대한국의 세력 등급으로 나눈다면 수신전은 입성 경지의 고수가 있기에 이쪽 세계에서 일등 세력에 속한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그녀의 겸손함 때문에 양준은 줄곧 수신전이 그다지 대단한 문파가 아니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독오맹 사람들의 표정이 갑자기 달라진 것을 보니 수령의 문파가 꽤 괜찮은 듯했다. 적어도 여인의 무리는 수신전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표정이 무거워지면서 적의도 사그라졌고 눈동자에 두려움이 서렸다.

머뭇거리는 얼굴로 수령을 바라본 여인 무리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한참 수군거렸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 수도 없었고 남의 얘기를 엿듣고 싶지도 않아, 양준은 조용히 기다렸다.

수령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곳이 어딘지 몰라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독오맹의 사람이라는 것을 들은 뒤, 무서울 게 없었다.

수신전과 독오맹은 거리가 멀지 않아 한 번 다녀오려면 보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게다가 양측은 가끔씩 거래도 있어 꽤나 친분이 있는 셈이었다. 독오맹의 사람들은 소곤거리며 힐끔힐끔 양준과 수령을 훔쳐보았다. 아마도 수령이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뒤에야 여인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수령에게 물었다.

“낭자, 자신이 수신전 사람이라고 했는데 증거라도 있나요?”

“있어요.”

수령은 생긋 웃으며 짙은 남색 옥패를 꺼내 여인에게 던져주었다.

여인은 옥패를 받아 들고 세심하게 감지했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옥패에는 물의 기운이 담겨 있는 것이 물의 기운에 능한 고수가 만든 것 같군요. 하지만 미안하게도, 저희는 이런 옥패를 본 적이 없어 당신이 수신전의 제자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어요.”

그녀는 말하면서 옥패를 도로 건네주었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적의는 많이 누그러졌으나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두 분께서 저희 독오맹에 가서 며칠 머물지 않으실래요? 이 낭자가 수신전의 제자가 맞다면 오늘 일은 없었던 거로 하고 만약 아니라면… 무슨 말인지 아시죠?”

말 한마디에 여러 가지 뜻이 담겨 있었고 말투도 비굴하거나 거만하지 않았다. 그녀의 뛰어난 임기응변 능력과 섬세한 지혜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좋아요.”

수령은 생글거리며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의 신분이 거짓도 아니고 독오맹 사람들이 알아보기만 한다면 밝혀질 일이었다.

“네 생각은 어때?”

수령은 양준의 뜻을 물었다. 양준은 자신을 거칠게 다루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독오맹 사람들이 그들을 가두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으니 그가 화를 내며 싸우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난 괜찮아. 어차피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수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시지요.”

그녀는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양준과 수령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른 예닐곱 명의 신유 경지 무인들은 양준과 수령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앞뒤로 포위된 상황이었다. 일 처리 방식으로 보아 그들은 아주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들인 듯했다.

늪지대를 걸을 때, 여인은 무심결인 듯 수령에게서 정보를 알아보았다. 거리낄 게 없는 수령은 감추지 않고 통쾌하게 대답했다. 얘기를 나눌수록 여인은 수령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 참, 적혈진란은 어떻게 된 일이에요?”

수령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여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도 숨기지 않고 방금 전에 일어났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수령은 고개를 돌리고 양준에게 혀를 홀랑 내밀어 보였다.

양준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런 일이 있을 줄 몰랐던 것이다.

“적혈진란이 이렇게 도망치면 적어도 반년 안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예요. 어쩌면 아예 이 늪지를 떠날 수도 있고요. 그렇게 되면 다시 찾기는 어려워지죠.”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적혈진란이 아주 중요해요?”

“우리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데 랑야복지의 소주에게는 반드시 필요해요. 보름 뒤에 적혈진란을 랑야복지 사람에게 넘겨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놓쳐 버렸으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랑야복지의 소주라면 목휘(穆輝)? 그 사람이 다쳤어요?”

수령은 깜짝 놀랐다.

“낭자께서 목 소주를 아시나요?”

“네, 알고 있어요.”

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친절해졌다.

“낭자는 정말 수신전의 사람이 맞군요.”

“그럼요. 우리 수신전은 랑야복지와도 친분이 꽤 있어요. 목휘가 필요한 것이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

여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수령을 바라보았다.

“적혈진란이 늪지로 들어갔다고 하셨죠?”

“맞아요.”

“그것이 사라진 곳으로 안내해 주세요. 다시 찾아낼 수 있나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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