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6장. 정석의 용도
독오맹 사람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인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해졌다.
잠시 뒤, 수포에 감싸인 양준과 수령이 떠올랐다. 지면에 착지한 수령은 여인에게 말했다.
“천지 영물을 담을 용기를 가지고 있죠?”
“가지고 있어요.”
여인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백옥을 조각해 만든, 진법이 가득 새겨진 옥 대야를 꺼냈다. 양준이 자세히 살펴보니 여인이 사용하는 것은 건곤대였다.
수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 잘 하셨네요.”
그녀는 말하면서 적혈진란을 건네주었다. 여인은 이상한 표정을 하고서 잠깐 망설이다가 기쁜 얼굴로 받아 들고 대답했다.
“고마워요!”
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여인이 옥 대야에 적혈진란을 담고 수인을 맺자, 옥 대야의 새겨져 있던 진법이 발동하며 천지 영물을 그 속에 가두었다.
“빙염성사는요?”
계홍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계홍!”
여인은 싸늘한 얼굴로 호통쳤다.
“히히, 그저 물어보는 겁니다!”
계홍은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양준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제가 좀 호기심이 강해서…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아무튼 당신들이 손에 넣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양준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계홍을 바라봤다. 그는 생각 없이 물어본 거라고 했지만 사실 에둘러 빙염성사의 행방을 알아보려 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이미 손에 넣었습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네요. 부러워 죽겠습니다.”
계홍은 입을 뻐금거리며 자신의 마음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여인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나서 수령을 바라보았다.
“낭자가 큰 도움을 주셨어요. 독오맹 전체가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이번 일의 보수로 인당 정석 스무 개씩을 받기로 했고, 저는 대장이다 보니 쉰 개를 받습니다. 사례로 보수에서 8할을 나눠드리겠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덟 명이었다. 일곱 명이 스무 개씩 가지고 여인이 쉰 개를 가질 경우 합하면 백아흔 개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8할이면 백쉰두 개였다. 여인이 이렇게 대범하게 나오자 그녀의 부하들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수령과 양준이 없었다면 그들은 2할도 얻지 못하고 도리어 벌을 받았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다들 불만이 사라졌다.
수령은 웃으며 양준을 가리켰다.
“쟤한테 주세요. 전 정석을 쓰지 않아요.”
양준은 깜짝 놀랐지만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정석이 무엇인지,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알지 못했지만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 꽤나 괜찮은 물건인 것 같았다.
“그래도 되고요. 그리고 만약 두 분께서 빙염성사를 팔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희와 상의를 해도 돼요. 가격은 얼마든지 쳐 드릴 게요.”
수령은 웃음을 터뜨렸다.
“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영급 상품의 재료라 팔지 않고 사용할 생각이에요.”
“그렇군요…….”
여인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두 분께서 생각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독오맹의 본거지인 독오성(獨傲城)은 이곳과 사흘 정도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요. 저희와 함께 돌아가는 건 어떠신가요? 잘 접대해 드릴게요.”
적혈진란을 받고 난 뒤 여인은 더 이상 두 사람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관계를 맺어 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수령은 말없이 양준을 바라보았고, 양준은 그러자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령은 그제야 대답했다.
“좋아요, 마침 쉴 곳이 필요했는데.”
“가시지요!”
여인은 말하면서 무심코 양준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를 다시 한번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찰나였지만, 여인은 방금 전 수령이 양준과 눈빛을 주고받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수령은 수신전에서도 지위가 높아 보이는데 왜 저 소년의 눈치를 보는 거지? 저 소년의 정체가 뭐길래 수신전의 지위 높은 제자가 이렇게 신경 쓰는 걸까?’
그녀는 양준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문파로 돌아갔다. 여인은 양준의 신분이 궁금해서 말을 꺼내 보았지만 양준의 대답에는 빈틈이 없었다.
간단한 대화를 통해 양준과 수령은 여인의 이름이 운훤(雲萱)이고, 독오맹 휘하 소대 대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와 함께 다니는 예닐곱 명은 그녀의 소대 대원들이었다.
독오맹은 다른 세력과 달리 소대를 단위로 한 문파였고, 주로 각종 수련용 재료와 완성품을 거래하고 있었다. 소대는 줄곧 밖에서 돌아다니며 독오맹을 위해 각종 재료와 자원을 찾아오고 이윤을 가져왔다. 대신 독오맹은 이런 무인들에게 편하고 안전한 수련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독오맹은 문파가 없는 무인들에게 영향력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독오맹에 가입해 편리를 얻고자 했다. 바로 이런 연유로 독오맹에는 제자가 많았지만 진정한 고수는 많지 않았다. 다른 세력에 비하면 총체적으로 밀리는 편이었다.
수령이 수신전 제자라고 했을 때, 운훤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은 이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감히 수신전 사람에게 미움을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적혈진란을 손에 넣었고 무사히 임무를 완성한 지금, 수령이 수신전의 제자가 맞든, 아니든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틀 뒤, 그들은 늪지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자 황야에 자리잡은 커다란 성곽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독오맹의 본거지인 독오성이었다.
사흘 동안 걸으면서 양준은 통현대륙의 짙은 영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곳이 얼마나 부유한지도 알게 되었다. 이곳에는 원래의 세계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물건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름난 고수들도 많았다.
양준은 통현대륙에 대해 알아가면서 식견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독오성 성문 입구에 시위 차림을 한 사람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검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뿐, 들어가는 사람들을 막지는 않았다. 운훤이 길을 안내한 덕에 양준과 수령은 무사히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성안 분위기는 매우 떠들썩했고, 오가는 무인들의 수도 굉장히 많았다.
운훤은 웃으면서 해명했다.
“우리 독오맹은 수련용 재료 거래를 주로 하기 때문에 본거지는 항상 떠들썩해요.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연단과 연기 재료를 사가거든요. 대륙에서 상업 연맹 본거지인 상성(商城) 다음으로, 저희 독오성의 화물 유통 건수가 가장 많아요. 하지만 상업 연맹은 세 곳과의 거래를 다 하고 있어 우리는 아예 견줄 수가 없어요.”
“세 곳이요?”
양준이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
“맞아요. 상업 연맹의 상성은 중립 지대에 위치해 있잖아요. 그들은 마족과 요족, 인류와도 거래를 하고 있죠. 모르셨어요?”
운훤은 눈을 반짝이며 의아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잘 나다니지 않아서 바깥의 일에 대해 잘 모릅니다.”
양준은 여유로운 얼굴로 대답했다.
운훤은 대답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괜한 말로 양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흘간 길을 걸으면서 그녀도 양준이 과묵한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일상적인 것에 짙은 호기심과 흥미를 보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사회 초년생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속이 깊고 속셈도 많아서 모르는 것이 있어도 꼬치꼬치 묻지 않고 스스로 관찰했다. 그 바람에 운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양준이 세상 물정 모르는 하룻강아지인지 아니면 닳고 닳은 강호 인물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총체적으로 운훤은 양준을 마주할 때마다 이상하게 압박감이 느껴졌다.
“두 분께서 괜찮다면 저희 저택으로 가시지요. 성에 저택 한 채를 샀는데 환경이 꽤나 좋습니다.”
운훤이 그들을 초대했다.
“그러죠.”
수령은 흔쾌히 대답했다. 그녀는 어서 빨리 몸을 씻고 싶었다. 그동안 길을 걸으면서 그녀는 먼지를 가득 뒤집어써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계홍, 이 분들을 안내해.”
운훤이 지시하자, 계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모시지요.”
“가시지요, 두 분. 저희는 독오맹으로 돌아가 맡은 임무를 보고해야 해요. 마치고 돌아올게요.”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령과 함께 계홍의 뒤를 따라 성 안쪽으로 걸어갔다.
얼마 걷지 않아 저택 앞에 도착한 계홍은 열정적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하인을 불러 목욕물을 받으라고 지시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저택의 환경은 꽤나 괜찮은 편이었다. 시끄러운 중심가에 있었지만 결계가 쳐져 있어 소음이 잘 들리지 않았다.
양준도 불편함 없이 편히 지냈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하인이 와서 불렀다.
양준이 문을 나서니 지저분함을 털어내고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수령이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은 뒤, 함께 걸어갔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운훤 소대는 아주 열정적으로 대접하며 너도나도 술을 권했다. 수령은 거절하고, 양준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타향의 음식들을 음미하며 한껏 즐겼다. 운훤은 전의 약속대로 백쉰두 개의 정석을 양준에게 건네주며 미소 지었다.
“아껴 써요. 나가서 흥청망청 쓰지 말고요. 독오성에는 유혹이 많아서 당신 같은 젊은 사내들은 이겨내기 힘들 거예요. 호호…….”
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술을 마신 탓에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뜨거운 숨결을 몰아쉬는 그녀는 한없이 고혹적이었다.
그녀의 소대 대원 몇몇은 운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다들 양준을 뒤로 한 채 흑심을 품고 운훤을 취하게 하려고 했다. 운훤도 권하는 술을 거절하지 않았다. 양준은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한밤중까지 떠들썩하게 즐기다가 양준과 수령은 먼저 일어나서 자리를 떴다. 독오맹의 사람들은 여전히 술자리를 이어 갔다. 하지만 계홍 한 명만 겨우 버티고 있을 뿐, 다른 이들은 모두 운훤과 술을 마시다 취해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양준은 검은 책의 공간에서 정석을 꺼내 자세히 느껴 보았다. 그는 문득 눈앞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정석에는 순수하고 방대한 기운이 많이 들어 있었다. 그 기운은 무인들이 흡수하면 진원을 보충할 수 있었다.
‘이런 물건이 있다면 저쪽 세계의 무인들도 신속하게 경지를 돌파할 수 있겠는데. 아쉽게도 이렇게 편리한 것이 없다니…….’
정석은 통현대륙에서 흔하게 유통되고 있는 물건이었다. 정석으로 수련도 할 수 있고 연단이나 연기도 할 수 있으며 물건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양준은 못내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이런 물건도 있다니.’
통현대륙에 온 뒤로 그는 별천지에 발을 들인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고 또 모든 것이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