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5장. 정체를 알 수 없는 적
잠시 뒤, 아래쪽에서 반짝이는 전기가 보였다.
“운훤?!”
양준이 부르자, 아래쪽에서 기쁨에 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양준은 씩 웃었다. 그러고는 전기가 반짝이는 위치에 주먹을 내질러 통로를 뚫고 얼굴만 드러낸 운훤을 잡아당겨 올렸다. 곧이어 다른 대원들도 연달아 나타났다. 적지 않은 이들이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고, 대다수는 골절 상태였다. 그들 모두 신유 경지였지만 동굴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것은 그들도 견뎌내기 힘들었다. 다행히 운훤의 지휘 하에 겨우 위쪽으로 향하는 통로를 뚫어 땅속에 파묻히지 않을 수 있었다. 일단 부상을 입고 파묻힌다면, 신유 경지 고수라 해도 살 가망이 없었을 것이다.
밖으로 나온 뒤에도 그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곧이어 겨우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오자 다들 가쁘게 숨 쉬며 생명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만끽했다.
“방칠(龐七)은?”
운훤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얼굴이 해쓱해졌다. 대원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디 있어?”
운훤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계홍이 한참 우물쭈물하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그 모습에 운훤은 몸을 흠칫 떨었다. 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어서 떠나야 해요. 손 선배가 설치한 금제를 파훼할 줄 아나요?”
양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운훤은 살짝 정신을 놓고 있다고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요.”
양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초범 경지 고수가 설치한 금제를 강제로 해제하려면 적잖은 시간을 낭비할 수 있었다. 다행히 운훤이 파훼법을 알고 있다니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하지만…….”
운훤은 주저했다.
“손 선배는 이미 죽었습니다.”
양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 그는 손영의 미약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운훤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경악에 찬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사락사락-
아래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얼굴빛이 급변하여 아래쪽을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과 2, 3리쯤 떨어진 곳에서 몇 사람이 낭패스러운 몰골로 아래쪽에서 솟구쳐 나왔다. 주락과 완심어 일행이었다.
운훤이 기쁨에 겨워 소리쳐 불렀다.
주락과 완심어 일행도 그 소리를 듣고 급히 이쪽으로 날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야 그들은 주락, 완심어 일행의 당황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손 아저씨는?”
운훤이 물었다.
“돌아가셨어…….”
완심어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운훤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는 대원들을 거느리고 서금수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들이 많은 성과를 올려 기뻐하고 있을 때, 이런 뜻밖의 변고가 생겼다. 게다가 손영이 이렇게 짧은 시간에 죽었다니… 그녀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우리도 잘 몰라.”
완심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뛰쳐나오더니 손 아저씨와 맞붙었어. 그리고… 그리고 이렇게 되었어.”
그녀 역시 적잖게 놀란 듯했다. 손영이 그녀의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그녀와 주락의 소대 대원들도 두 초범 경지 고수의 초식에 휩쓸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몇 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알 수 없는 적이 그녀를 공포에 빠뜨렸다.
“우리 어서 자리를 뜹시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주락이 다급하게 말했다. 풍채가 늠름하고 소탈했던 그의 모습은 진작 사라진 상태였다. 초범 경지 고수도 한순간에 목숨을 잃는 곳에서 신유 경지 무인들이 머물러 있으면 위험뿐이었다. 그는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세 소대의 스무여 명 인원 중에서 지금 살아남은 이는 절반도 안 되었다. 이 순간 신유 경지 무인의 목숨은 파리 목숨처럼 보잘것없었다.
양준은 행렬의 맨 뒤에 서서 신식을 펼치며 주위를 경계했다. 손영을 죽인 적은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그의 직감으론 누군가 그들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사냥감들이 허둥지둥 도망치는 광경을 바라보며 즐기고 있는 듯했다.
양준은 얼굴빛이 흐려졌다. 이번에는 대단한 골칫거리를 만난 것 같았다. 적의 모습을 볼 수도 없고, 확실한 실력을 알 수 없으므로 미리 대처할 방도가 없었다.
살아남은 독오맹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슴을 졸였다.
슈욱-
문득 하늘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이들의 얼굴빛이 바뀌며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경계 어린 눈초리로 주위를 살폈다. 동시에 몰래 온몸의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계홍이 놀라서 소리쳤다.
“소저, 정오(鄭悟)가…….”
그 소리에 사람들은 정오라는 무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오는 멍한 표정으로 눈동자가 빛을 잃은 채 나무토막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온몸의 생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정오……!”
그와 가깝게 지내던 이가 그를 불렀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정오를 살짝 밀치자, 정오는 빳빳한 채로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아악!”
완심어는 비명을 지르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정오가 죽었습니다.”
계홍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운훤도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주위를 살폈으나 적의 종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주락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정오는 그의 소대 대원으로 신유 경지 6단계 실력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기척도 없이 죽임을 당했다. 게다가 온몸에 상처 하나 없었다. 뜻밖의 변고에 그는 마치 얼음 구멍에 빠진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보이지 않는 적이 이런 수단으로 정오를 죽일 수 있는 만큼, 그들 모두가 놈의 표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상황을 알아차린 사람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했다.
“계속 가죠.”
양준이 어두운 얼굴빛으로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방금 전, 그는 기괴하고 강한 신식이 번쩍하고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신식이 워낙 강해 그조차도 가슴이 떨리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림자도, 형체도 없는 신식을 이용했기에 보이지 않는 적은 신유 경지 무인을 흔적 없이 죽일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놈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의 목숨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양준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놈은 사람들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발버둥치는 모습을 즐기는 거야! 이런 놈은 대처하기가 힘든데!’
양준은 놈의 약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래야만 적을 죽이지 못하더라도 살길을 찾을 수 있었다.
양준의 외침에 운훤은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조금이나마 침착함을 되찾아 손을 흔들었다.
“가자!”
일행은 계속해 앞으로 걸어갔고, 곧 손영이 설치한 금제에 다다랐다. 동굴에 들어가기 전, 손영은 금제를 작동시켜 서금수가 도망치지 못하게 결계로 동굴 전체를 감쌌다. 하지만 지금 결계는 도리어 사람들의 살길을 막는 장벽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손영의 금제를 파훼해야만 했다. 독오맹 대원들은 서둘러 금제를 파훼하려 했다. 그런데 움직이자마자 또다시 가벼운 인기척이 들려왔다.
풀썩-
또 한 명의 신유 경지 무인이 쓰러졌다. 방금 전 정오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식해가 파괴되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대원들은 흠칫하고서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적이 자신을 표적으로 삼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참 기다려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대원들은 숨을 고르고서 서로 눈치를 보고는 다시 금제를 파훼하려 했다.
슈욱-
세 번째 무인이 쓰러졌다. 완심어는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녀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부짖었다.
“뭐 하는 거야? 도대체 누군데 이러는 거야?”
운훤은 심호흡을 했다. 겉모습은 공포에 빠진 듯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어떤 대협이신지 모습을 보여주면 고맙겠습니다. 저희는 독오맹의 제자들로 이곳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저희가 잘못한 점이 있다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깔깔깔……!”
은방울 굴리는 듯한 맑은 웃음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들려왔다. 웃음소리에는 사람을 유혹하는 힘이 담겨 있었다. 소리가 울리는 순간, 모두 마음이 일렁이며 온몸이 달아올랐다.
“감히 내 요수를 잡다니.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목소리는 아스라하게 들려 소리의 근원지를 확정지을 수가 없었다.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기도 했다.
운훤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억지웃음을 지었다.
“저희는 요수가 주인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알았다면…….”
“변명할 필요 없어. 난 그냥 너희들을 죽이면서 즐길 생각이야. 자, 마음껏 발버둥 쳐 봐. 깔깔……!”
목소리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했지만, 듣는 이는 피가 끓어오르고 이상한 느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목소리는 모든 남성의 마음속 원시적인 본능과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양준은 묵묵히 음양합환공을 돌려 마음속 욕망을 억누르는 동시에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숨은 적이 자신이 짐작한 것처럼 성격이 뒤틀리고 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아주 위험한 동시에 자부심이 넘쳐나, 기다리기만 하면 반드시 허점을 드러낼 것이다.
가장 걱정되는 건 적이 그에게 출수하는 것. 적이 그에게 출수하는 순간, 양준은 자신의 전투력을 숨길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는 반드시 적의 표적이 될 것이다.
그 말에 운훤도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서둘러 몇 번 더 불렀으나 더는 대답이 없었다. 오히려 독오맹의 네 번째 대원이 모든 이의 눈앞에서 죽임을 당했다. 거대한 공포감이 퍼져 나갔다. 운훤 일행은 허둥지둥 계속해 금제를 파훼하려 애썼다.
대원들이 한 명, 한 명씩 연이어 쓰러졌다. 숨은 적은 살심이 일었는지 더는 한 사람씩 죽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이따금 한 번에 두세 명씩 죽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오맹 제자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운훤 소대의 대원들도 연이어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