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8장.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운훤의 상처를 치료한 뒤 양준은 숨을 헐떡이며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수련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이처럼 심한 상처를 입은 적이 없었다. 중요한 순간에 급소를 피했으니 망정이지, 매요의 첫 공격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뻔했다.
이번 계략은 너무나 모험이었다. 당시 양준은 운훤의 설명을 듣자마자 매요가 자신에게 접근하게 유인한 다음, 기회를 찾아 반격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매요는 경계심이 높았고, 결국 어느 정도 타격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매요가 시전한 수단에 의해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다. 매요가 죽자 주위의 금제가 약해졌지만, 이상하게도 바깥쪽에 있는 완심어와 주락은 아무 기척도 없었다.
양준은 겨우 진원을 뿜어 주위를 감싼 금제를 뚫었다. 그는 완심어와 주락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조용한 연유를 알게 되었다. 매요는 자신이 정기와 피를 흡수할 때, 두 사람이 도망칠 것을 걱정해 미리 수단을 부려 둘 다 기절시켰던 것이다.
“우선 쉬고 있어요. 두 사람은 조금 뒤에 깨어날 거예요.”
양준이 당부했다.
운훤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 양준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양준도 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주위는 정적에 휩싸였다. 양준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진원을 돌려 만약영유의 약 기운을 흡수했다. 양준은 이번에 처음으로 만약영유를 복용한 것이었다. 만약영유가 상처를 치료하는 데 강한 약효가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아랫배의 통증은 금방 사라졌고, 이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드는 것이 피와 살이 새롭게 자라나는 듯했다.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양준은 신식을 식해에 담그고 매요가 죽고 남겨 둔 신식을 흡수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반나절이 지나, 완심어와 주락이 연이어 깨어났다.
두 사람은 깨어난 뒤 지금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곧바로 인지하지 못하고 망연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드디어 기절하기 전에 있었던 상황을 떠올렸다.
완심어는 곧 얼굴빛이 크게 바뀌더니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의 차림새를 점검했다. 차림새가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락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다가 하마터면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멀지 않은 곳에는 독오맹 제자 열댓 명과 초범 경지 고수 한 명을 손쉽게 죽인 매요가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모든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녀의 몸과 머리가 아주 묵사발이 되어 있었다. 운훤은 한쪽 구석에서 양팔로 무릎을 안고 앉아 있었다. 처량하고 외로운 모습이었다.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있었지만 두 눈은 새빨갰다.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서 좌선하고 있는 양준을 복잡한 눈빛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운훤, 괜찮은가요?”
주락은 그녀에게 서둘러 다가가서는 살갑게 물었다. 운훤은 넋이 반쯤 나가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찌 된 일입니까? 매요는 어떻게 죽은 거죠? 지나가던 고수가 우리를 구해 준 건가요?”
주락은 주절주절 이것저것 물었다. 이젠 죽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살아남게 되니, 흥분을 감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만 말해.”
완심어는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는 운훤의 상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서 서둘러 다가갔다. 그리고 운훤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가볍게 입술을 깨물고 한참 갈등하다가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운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말해 줄 수 있어?”
운훤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준만 지켜보았다. 주락은 그녀의 눈빛에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차갑게 양준 쪽을 바라보았다.
“어머나, 너 다쳤어?”
완심어는 드디어 운훤의 아랫배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만약영액을 바르고 싸매기까지 했으나 아랫배에서 배어 나온 붉은 피의 흔적은 쉽게 눈에 띄었다.
“다쳤다고?!”
주락이 깜짝 놀라며 다가와서 상처를 보려 했다. 완심어는 고개를 돌려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주락은 계면쩍게 웃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완심어는 운훤의 맥을 짚고 자세히 살펴 보고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큰 문제는 없어. 기운이 좀 약할 뿐이야. 며칠 요양하면 괜찮을 거 같아.”
운훤은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주락은 줄곧 분위기를 살피다 이내 안색이 확 바뀌었다. 그는 운훤의 상태를 다시 살펴보았다. 그리고 양준의 헐벗은 상체와 한쪽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매요의 시체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문득 자신이 기절해 있는 동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알 것 같았다.
완심어는 여전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채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었지만, 주락은 험상궂은 얼굴로 온몸의 진원이 저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왜 그래?”
완심어는 불쾌한 눈빛으로 주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락이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주락은 음산하게 웃더니 운훤을 지켜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운훤, 당신 저 자식에게…….”
그 말에 줄곧 넋을 놓고 있던 운훤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의 이상함을 눈치챈 완심어는 곧 입을 틀어막았다.
‘맞다. 내가 기절하기 전에 운훤과 양준은 이미 매요에게 제압당했었지. 매요의 성격과 수단을 봤을 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
그녀는 위험에서 벗어나 살아남았다는 기쁨 때문에 미처 그때 상황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운훤, 사실이야?”
완심어는 아연실색해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녀는 줄곧 운훤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사실 운훤을 존경하고 있었다.
운훤은 또다시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머리를 무릎 사이에 묻고 통곡했다.
“역시…….”
주락은 화가 나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운훤을 쫓아다닌 지 꽤 오래되었지만 줄곧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런 황량한 들판에서 어느 촌구석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얼간이한테 미인을 빼앗기다니. 가슴속에서 이유 모를 치욕감이 강하게 끓어올랐다. 주락의 기운이 점점 더 위험해졌다.
그는 한쪽에서 좌선하고 있는 양준을 차갑게 노려보더니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주락, 뭐 하려는 거야?”
완심어가 놀라서 소리쳤다. 주락이 연신 냉소했다.
“뭘 하려는 거냐고? 그냥 저 자식을 죽여 버릴 거야.”
그는 말하는 동시에 빠르게 양준에게 다가갔다. 험상궂은 표정이 너무나 무서웠다.
“멈춰! 그러면 안 돼.”
완심어는 운훤을 내버려 두고 달려오더니 주락을 붙잡았다.
“지금 저 자식을 두둔하는 거야? 저 자식이 너하고 무슨 사인데 네가 두둔하고 나서?”
주락은 조소 어린 눈빛으로 완심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죽이면 어떡해?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뭘 더 알아보려고? 운훤이 이미 인정했잖아.”
주락이 울부짖었다.
“너하고 무슨 상관인데? 네가 운훤과 무슨 사이라도 돼?”
완심어가 차갑게 되물으며 비웃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비켜!”
주락이 버럭 화를 냈다. 그는 온몸의 힘을 폭발시켜 완심어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그래. 나는 운훤과 아무 사이도 아니야. 하지만 나 이외의 다른 남자가 운훤을 건드리는 것은 절대 허락할 수 없어! 저 자식은 반드시 죽어야 해. 안 그러면 도저히 화를 삭일 수가 없어.”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주락은 살기등등해서 무방비 상태의 양준을 향해 힘차게 주먹을 내질렀다.
“안 돼!”
등 뒤에서 운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주락은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는 양준을 죽이려는 마음을 더욱 굳혔다. 그는 손속에 전혀 자비를 두지 않았다. 한쪽에 쓰러진 완심어는 차마 그 광경을 지켜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주락은 신유 경지 9단계였다. 무방비 상태의 신유 경지 7단계를 이처럼 기습하면 어떤 결과일지 뻔했다. 더욱이 양준은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주먹이 얼굴에 닿으려는 순간, 양준이 눈을 번쩍 떴다. 그는 한 손으로 주락의 주먹을 잡았다. 주락의 폭발할 것 같이 날뛰던 기세는 마치 큰 산에 막힌 바람처럼 순식간에 확 꺾였다.
양준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차가운 눈빛으로 주락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주락은 순간 당황했다. 마음먹고 내지른 주먹이 경지가 자신보다 2단계나 낮은 이에게 손쉽게 막히다니. 그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의 낯빛이 점점 바뀌었다. 그때, 주락은 자신이 눈앞에 있는 사내의 실력을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락은 잠깐 주저하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흉악하게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거야!”
양준이 냉소했다.
“날 죽이겠다고? 그럴 주제가 안 되는 거 같은데.”
“뻔뻔스러운 자식!”
주락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이윽고 그의 손에 삼지창 모양의 비보가 나타났다. 비보는 서슬 퍼런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고, 진원을 주입하자 윙윙 소리를 내더니 강한 위세를 떨쳤다.
주락은 곧바로 삼지창을 내던졌다. 삼지창은 하늘을 가르며 위풍당당한 호랑이로 변하더니 커다란 입을 쩌억 벌리고 양준에게 달려들었다. 주락은 양준과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지 않고 그를 죽여서 화를 풀려 했다.
양준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안색이 차가워졌다. 상대가 다짜고짜 공격을 펼치자, 그 역시 격노했다.
이내 양준의 신형이 움찔하더니 삼지창의 공격을 피했다. 온몸의 힘을 끌어올리는 순간, 양준의 기세가 바뀌었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기운이 그의 몸 주위로 퍼져 나갔다. 그를 중심으로 무형의 기운이 천천히 퍼져 나가며 광풍을 일으켰다.
운훤은 울음을 그치고 어안이 벙벙해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양준의 변화에 깜짝 놀라 잠시 동안 방금 전에 당했던 모든 일들을 잊어버렸다.
완심어는 저도 몰래 입을 가린 채, 넋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