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1장. 정말 떠날 건가요?
이렇게 큰 변고를 겪다 보니 모두 심신이 피곤했다. 아직 동굴 속에 귀중한 서금수 몇십 마리가 묻혀 있고, 요수들이 쉽사리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운훤이든, 완심어든 서금수를 어찌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때, 완심어가 자그마한 건곤대를 꺼내더니 양준에게 건넸다.
“뭔가요?”
양준이 깜짝 놀랐다.
“댁의 전리품이에요. 둘이 쉬고 있을 때, 제가 매요의 몸에서 찾아낸 거예요.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아맞혀 보세요.”
양준은 눈으로 대략 가늠해 보더니 단언했다.
“제련된 귀중한 광물질이죠.”
“어떻게 알았어요?”
완심어는 깜짝 놀랐다.
양준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매요가 정보를 흘렸죠. 그녀는 서금수가 자신의 것이라고 했어요. 그렇다면 요수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에요. 매요가 특별히 이곳에 데려다가 일석광을 삼키게 한 다음, 서금수가 제련한 광물질을 거두어들였던 거예요. 게다가 동굴 안에서 탐색할 때, 서금수가 배설한 광물질을 하나도 보지 못했잖아요. 매요가 진작 모두 거두어 갔기 때문이었던 거죠.”
양준이 분석하는 것을 들으며 운훤의 눈동자에 이채가 반짝였다. 완심어도 양준을 다시 보았다.
“미처 몰랐네요. 아주 주도면밀한 사람이었군요.”
그녀는 미소를 짓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안에 제련된 일석광이 적지 않아요. 팔면 꽤 많은 정석과 바꿀 수 있을 거예요.”
양준은 잠깐 생각하다 그녀에게 건곤대를 돌려주었다.
“당신들도 이번에 손실이 크잖아요. 돌아가서 독오맹 본부에도 해명을 해야 할 텐데 당신들이 가지고 있으세요.”
완심어는 기쁜 표정으로 얼른 건네받았다. 사실 그녀도 그럴 생각이었으나 양준이 매요를 죽였기 때문에 남의 재물을 빼앗기가 무엇해서 그만두었던 것이다. 운훤은 뭔가 말하려고 입만 벙긋하다가 그만두었다.
“갑시다. 일단 이곳을 떠납시다. 가까운 성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양준은 먼저 일어났다. 그의 말에 운훤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독오맹의 세력 범위 중 가장 먼 외곽이었다. 삼림에서 벗어나 2, 3일 정도 걸어가면 꽤 큰 성곽이 있었다. 오는 길에도 일행은 그곳을 지나왔었다.
반나절이 지나 셋은 삼림에서 벗어났다. 양준은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마차를 임대해 운훤과 완심어를 태우고, 자신은 마부를 자처하여 성곽을 향해 마차를 몰았다.
그런 양준의 모습을 보고, 완심어는 또 한 번 양준을 달리 보게 되었다. 덩달아 운훤도 웃음이 많아졌다.
두 여인은 한동안 한담을 했다. 그러다 운훤은 피로감이 몰려와 잠에 빠졌다. 완심어는 심심해서 밖에 나와 양준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았다. 그녀는 손으로 턱을 고이고 고개를 갸웃하고서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열심히 채찍질하는 양준을 지켜보았다.
“왜 저를 보세요?”
양준은 그녀의 눈빛이 불편했다.
“댁이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 반나절이 지나니 활력이 넘치는군요.”
완심어가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제 신체 회복력이 일반인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보기만 해도 알겠어요. 젊으니까 참 좋네요.”
완심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양준이 조롱하듯이 웃으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끔 보았다.
“댁과 비교하면 중년이죠. 저하고 운훤 둘 다 이제 서른이 다 되었어요.”
완심어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운훤과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전에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더니만, 지금은 또 한 집 식구처럼 가까워졌네요. 여자들은 원래 그렇게 변덕스러운 건가요?”
양준이 묻자, 완심어는 순간 침묵을 지키더니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떠올랐다. 양준은 자신이 괜한 질문을 한 것 같아서 얼른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요.”
완심어는 고개를 젓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원래는 한 집 식구가 되었어야 했죠……. 운훤의 신분은 아세요?”
“그냥 신분이 그리 평범하지 않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을 뿐이에요.”
양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비보전의 마 대사나, 손영의 태도로 볼 때 운훤을 대하는 것이 살갑거나 심지어는 공경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일반 독오맹 제자라면 그들이 그렇게 대할 이유가 없었다.
“맞아요.”
완심어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운훤을 바라보았다. 운훤이 여전히 단잠에 빠져 있는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운훤은 사실 독오맹 맹주님의 딸이에요.”
양준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이에요. 운훤의 아버님이 독오맹 맹주님이라고요.”
“그런데 왜…….”
그 정도 신분이면 운훤은 호강을 누리며 매번 직접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평소 그녀의 행동거지에서는 대갓집 아가씨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 연유가 있어요.”
완심어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그런데 제가 말한 다음에, 또 다른 데 가서 입을 털고 다니면 안 돼요.”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요?”
양준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완심어는 엄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운훤에게는 원래 남동생이 있었어요. 자질이 뛰어나서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주를 보였죠. 독오맹의 특별한 제도 때문에 맹주님은 아들을 밑바닥으로 보내 단련시켰어요. 문파 사람들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게 했죠. 공자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어요. 자신의 실력으로 일반 제자에서 점차 대장의 자리에 올랐고, 수하에 많은 대원들을 두게 되었어요.”
달콤했던 지난날을 다시 떠올려서인지 완심어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쳐났다. 그녀는 임무 과정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사실 양준은 그런 말을 들으면서 따분하기 그지없었으나 이야기를 끊지 않았다.
“항상 위험한 일을 하는데 어찌 불상사가 없겠어요?”
완심어의 목소리가 갑자기 가라앉았다.
“임무를 수행하던 중 공자께서 불행하게 유명을 달리했어요. 소대의 대원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고, 한 사람만 남아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어요. 이번 상황과 거의 비슷했죠. 운훤은 남동생을 무척 아꼈어요. 동생의 죽음에 대해서 운훤은 모든 책임을 맹주님께 돌렸어요. 맹주님께서 기어코 공자를 밑바닥부터 단련시키겠다고 고집하지 않았다면 그런 불상사가 없었을 테니까요. 그때부터 운훤은 소저의 신분을 던져 버리고 동생처럼 독오맹에 가입해서 밑바닥부터 시작했어요…….”
완심어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울먹이기 시작했다.
양준은 덤덤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운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맹주님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지만, 공자께서 이루지 못한 일을 계속하려는 것도 있어요.”
완심어가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운훤이 왜 당신을 미워하지 않는지 아세요? 심지어 일이 마무리된 후에도 전혀 따지려 하지도 않고요.”
“무엇 때문인데요?”
“공자가 죽을 때 나이가 마침 스물이었고, 신유 경지 7단계였어요.”
완심어는 서글프게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당신처럼 생기가 넘치는 나이였죠. 그러니 운훤이 어떻게 당신을 미워하겠어요.”
양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다.
“운훤 남동생의 소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당신이죠?”
완심어는 당황해서 한참이나 멍해 있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영리하군요. 맞아요. 전 그때 공자의 소대 대원이었어요. 공자께서 목숨을 걸고 저를 구해 주셔서 전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그 때문에 저와 운훤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거예요. 운훤이 저를 탓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그냥 저를 마주하기가 껄끄러운 거예요. 저를 보면 공자가 떠오르니까요.”
“공자를 좋아했나요?”
양준이 씩 웃으며 물었다.
완심어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그를 흘겨보았다.
“그건 왜 물어보세요? 다 옛날 일인 걸요.”
“그런데 왜 저한테 이런 것들을 말해 주시는 거죠?”
“그리 영리하면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연유를 모르세요?”
완심어는 매섭게 양준을 쏘아보았다.
‘나쁜 자식,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척하긴. 다 눈치챘으면서도 전혀 내색하지 않네.’
양준은 엄숙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독오맹에 가입하지 않을 겁니다. 저를 설득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운훤의 처지를 동정하고, 그녀의 의지와 노력을 높게 사지만, 저는 할 일이 따로 있어요.”
“나쁜 놈!”
완심어가 화나서 소리쳤다.
“그리 큰 이득을 얻고서, 그냥 입을 싹 닦고 도망치려는 건가요?”
“제가 무슨 이득을 얻었다고 그러세요?”
“지금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댁이 운훤을 그거… 그게…….”
“그거 뭐요?”
“댁이 잘 알고 있잖아요.”
완심어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멀쩡한 녀석이 왜 이리 철면피지.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거짓말하는 재주는 일품이야.’
“아무튼 당신이 책임지세요! 당신이 독오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제가 소문을 쫙 낼 거예요. 독오맹의 모든 이들이 당신을 원망하게 할 거예요.”
양준은 음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완심어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하려는 거예요?”
양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달빛도 없고 바람도 세차니 참 좋은 밤이군요!”
완심어는 저도 모르게 사색이 되었다. 순간 양준의 실력으로 죽이려 들면 자신에게는 반항할 힘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완심어가 한창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안에서 운훤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 다 장난 그만 쳐.”
완심어는 깜짝 놀라더니 양준에게 혀를 홀랑 내밀어 보이고는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그녀는 운훤을 부축하고서 함께 앞쪽에 앉아 맑은 밤공기를 마셨다.
“정말 떠날 건가요?”
운훤이 슬픈 눈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양준은 정색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독오맹은 너무 작아 당신 같은 사람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군요. 나가서 식견을 넓히는 것도 좋죠.”
운훤은 옷깃을 여몄다. 왠지 무척이나 추웠다.
“어쨌든 이번에는 고마웠어요.”
“바보 아냐?”
완심어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운훤을 바라보았다.
“양준이 아니면, 손 아저씨나 다른 대원들의 복수도 할 수 없었잖아. 그리고 우리도 그곳에서 죽었을 거야. 그러니 당연히 감사의 인사를 해야지.”
완심어는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만약 양준이 없었다면 이번에 독오맹은 아마 전멸했을 것이다.
“별말씀을요. 사실 저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어요.”
양준이 고개를 저었다.
운훤은 쓴웃음을 짓더니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잠깐 더 앉아 있다가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심어, 날 안에 데려다 줘. 밖이 참 춥네.”
“그래.”
완심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훤을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안에서는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양준이 고개를 돌려 보니 두 여인이 서로 기대서 잠이 들어 있었다. 둘 다 편안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