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2장. 열화성
사흘 뒤, 세 사람은 열화성(烈火城)에 도착했다.
성곽에 들어서기 전부터 뜨거운 열기가 확 몰려왔다. 심지어 땅바닥마저 뜨거웠다. 뜨거운 나머지, 그 위에서 걷는 말은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었다.
양준은 이런 열기에 온몸이 가뿐해졌고 덩달아 기분도 좋아졌다.
화성(火性) 공법이나 무공을 수련하는 무인들은 열화성의 이런 특수한 환경 때문에 이곳에 장기간 머물렀다. 열화성이 이런 남다른 환경을 가지게 된 연유를 아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화성 공법이나 무공을 수련하는 무인은 이곳에서 수련하면 수련 속도가 다른 곳보다 훨씬 빠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공기 속조차 다른 여느 곳보다 더 등급이 높은 화성 영기가 모여 있는 듯했다.
소문에는 열화성 지하에 거대한 용암이 흐르고 있어 사방 백 리가 모두 특수한 지리적 환경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이을 확인한 이는 없었다.
양준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신식을 펼쳐 살펴 보았다. 지하에 뜨거운 기운이 흐르고 있는 것은 확실한 듯했다. 그는 원래 운훤과 완심어를 열화성에 데려다 주고 떠나려 했다. 이곳에는 독오맹의 지부가 있어 그녀들을 독오맹에 데려다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여인은 양준에게 며칠 더 쉬고 떠나라고 잡았다. 그리고 양준도 상처 때문에 며칠 요양하는 것이 좋겠다 싶어 승낙했다.
열화성에 들어가 그들의 신분을 밝히자, 열화성의 성주 기염(紀炎)이 서둘러 마중하러 나왔다.
기염은 초범 경지 1단계로 손영과 같은 경지였다. 그는 수련하는 것이 화성 공법인 데다 실력도 나쁘지 않아, 성곽의 성주로서 열화성을 지키게 되었다. 덕분에 독오맹에서도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이었다.
기염은 기골이 장대했다. 화성 공법을 수련해서인지 밖에 드러난 피부는 모두 짙은 붉은색을 띠었고, 성격이 화끈하고 시원시원해 보였다. 그는 직접 사람을 데리고 와 운훤을 성주부(城主府)로 안내했고, 하인을 붙여 시중들게 했다.
그는 이번 임무에서 독오맹의 세 소대가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다는 말에 깜짝 놀라며 구체적인 상황을 캐물었다. 완심어와 운훤은 서로 입을 맞추고 양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길을 지나던 고수가 매요를 죽여서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만 말했다.
양준은 그녀들의 처사에 만족스러워 감격의 눈빛을 보냈다. 원래는 그녀들이 사실대로 말할까 걱정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실을 말하게 되면 기염이 믿는가를 차치하고, 독오맹을 떠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다행히 운훤이든 완심어든 모두 양준을 팔아먹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두 여인의 설명은 완벽했다. 기염은 존재하지 않는 고수의 모양새만 상세하게 물었다. 운훤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대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기염은 연신 탄식하며 이름 모를 고수를 독오맹의 은인으로 모시겠다는 둥, 나중에 만나면 꼭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최대한 빨리 총부에 이 사실을 알려야겠습니다. 운 낭자께서는 많이 놀라셨을 테니 열화성에서 며칠 쉬십시오. 상처가 나아지면 제가 직접 총부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기염이 당부하고 나서 급히 자리를 떴다.
임무를 수행하다 신유 경지의 제자 스무 명과 초범 경지 한 명이 죽었다. 기염은 이렇게 큰일을 서둘러 총부에 보고해야 했다.
“이제 만족해요?”
완심어가 콧방귀를 뀌며 뾰루퉁해서 양준을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전 상처가 나으면 이곳을 떠날 거예요.”
양준은 코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멀리 썩 꺼지세요.”
완심어는 양준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운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양준은 그들에게 인사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상처를 치료하는 동시에 매요의 신식을 탐지했다. 매요의 신식에는 독소가 있었으나 양준의 식해에 있는 신식의 불꽃과 금인독안으로 깨끗하게 정화한 덕분에 순수한 신식의 힘과 매요의 깨달음만 남게 되었다.
그것들을 흡수하고 나서, 양준은 자신의 신식의 변화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다. 그는 지금에서야 신식에도 속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인이 신유 경지까지 수련하게 되면 머릿속에 식해가 열리면서 신식이 생겨난다. 일반 무인들의 신식은 대체적으로 비슷해 딱히 속성이 없었다. 그러나 일부는 여러 가지 기연을 얻음으로써 신식에 변화가 생기게 된다. 이를테면 양준은 보옥 속의 진령의 기운을 흡수해 신식이 불처럼 뜨겁게 바뀌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신식이 얼음처럼 차갑거나 번개처럼 빠르거나 강풍처럼 매섭기도 했다.
서로 다른 신식이 발휘할 수 있는 기능도 물론 달랐다. 그리고 변화를 거친 신식은 일반 무인들의 신식보다 몇 등급 더 강한 파괴력과 살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양준은 신식의 불꽃으로 연단을 하게 되면 뛰어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감이 생겼다.
그는 연단진결에서 연단대사들의 깨달음과 경험을 적지 않게 알게 되었다. 다만 지금까지 연단사들 중 신식의 불꽃을 갖춘 이가 없었기에 참고할 선례가 없었다. 하지만 양준은 만약 신식의 불꽃으로 연단할 경우, 진원으로 연단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고 편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양준은 곧 연단에 대해서는 잠시 접기로 했다. 현재 연단술에 있어서 그는 갓 걸음마를 뗀 수준이기에 아직 여러모로 더 많이 배워야 했다. 나중에 연단술에 대한 조예가 깊어지면 다시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현실적이었다.
한동안 깨달음을 얻고 나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아랫배의 상처도 놀라운 속도로 회복되었다. 만약영유의 약효는 역시 남달랐다.
*사흘이 지난 어느 날 밤, 운훤은 양준의 방문 밖에 서서 손을 든 채 망설이고 있었다. 도저히 문을 두드리고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완심어가 귀신처럼 그녀의 옆에 나타나더니 야릇하게 웃었다.
“깜짝이야! 뭐 하는 거야?”
운훤은 얼굴이 상기되어 가슴을 쓸어내리며 완심어를 흘겨보았다.
“너야말로 뭐 하려는 거야?”
완심어는 애매한 표정을 짓고서 혀를 찼다.
“그런 거 아니야.”
운훤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며칠 전에 있었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마음이 움찔했다.
“내일이면 떠날 거잖아. 난 그냥…….”
운훤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뭐 혹시라도 모르잖아. 그 자식이 너한테 빠져서 떠나지 않고 독오맹에 남으려고 할지.”
완심어가 운훤의 속마음을 대신하여 속 시원히 말해 주었다. 사실 운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고 말은 했지만, 양준이 그래도 자신의 곁에 남아 주기를 바랐다.
운훤은 오랫동안 힘들게 지낸 탓에 이제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싶었다. 다만 줄곧 그녀의 눈에 차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오늘 밤에 찾아온 것도 마지막으로 노력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완심어에게 들켜서 순간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이다.
완심어는 방 안을 자세히 탐지해 보았다. 양준의 기운이 평온한 것이 좌선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얼른 운훤에게 딱 좋은 순간이라고 눈짓했다.
운훤은 놀란 토끼처럼 당황해서 고개를 연신 저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 일을 당했음에도 그녀는 양준이 밉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에게 미련이 생겼다.
“오늘밤 잡지 않으면 너 아마 평생 후회할 걸. 그리고 독오맹을 위해서라도 한 번 더 생각해 봐. 잠재력이 대단한 남자야. 나중에 우리 독오맹의 기둥이 될 수도 있어.”
완심어는 말을 하다가 답답했는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들어갈 거야, 말 거야. 너 안 들어가면 내가 들어갈 거야.”
“네가 왜?”
운훤이 황당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완심어는 머리를 매만지며 아련한 모습을 보이더니 애교 띤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한 외모 하거든. 네가 싫다면 내가 가지려고. 내 앞날을 위해서 이 정도 대가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리고 어차피 시집갈 거면 양준 정도면 괜찮지. 나이가 어린 게 흠이지만 그래도 어른스러워.”
운훤은 입을 가리고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가볍게 중얼거렸다.
“너 이렇게 방탕했어?”
그 말에 완심어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러면 어때서? 너 도대체 들어갈 거야, 말 거야?”
운훤은 여전히 망설여졌지만, 완심어가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며 설득하자 그녀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고민하고는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부끄러운 얼굴로 방문을 열고서 들어갔다.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으면 안 되지, 어휴!”
완심어는 의기양양해하다가 곧 기운을 갈무리하고는 귀를 쫑긋하고 방 안의 기척을 엿들었다.
방 안,
양준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좌선하다가 놀라서 눈을 뜨는 동시에 앞으로 다가온 사람을 잡아채 침대에 던졌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누군가 자신을 기습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아래쪽에 깔린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그는 깜짝 놀랐다.
“어? 당신이군요?”
운훤은 억지로 침착한 척했으나 목까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양준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빨간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양준은 당황해서 잠깐 생각하다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죠?”
양준은 전혀 반항하지 않고 ‘나 드세요’ 하는 것 같은 운훤의 모습에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다.
“그렇다면 또 어쩔 건데요?”
운훤이 불현듯 대담하게 물었다.
“하지만 당신의 상처…….”
“거의 다 나았어요. 무슨 연유인지 이번에는 특별히 빨리 나았네요.”
운훤이 대답하는 동시에 옷섶을 들추며 수줍게 말했다.
“믿지 못하겠으면 여길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