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7장. 널 키울 거야
여인의 말은 칭찬 같았으나 사실은 비꼬는 말이었다. 양준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인간의 교활함은 마족의 잔혹함과 마찬가지로 널리 알려졌죠.”
“넌 간이 크구나.”
여인은 전혀 기죽지 않는 양준의 모습을 보고, 결국 웃으며 말했다.
“됐다. 나도 더는 너랑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구나. 총명한 사람과 대화하는 게 아둔한 사람과 대화하는 것보다 쉬운 법이지. 넌 총명하니 우리가 너한테 뭘 바라는지 맞춰 보거라.”
“생각해 보았지만 모르겠습니다.”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전 도대체 왜 당신들에게 찍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좀 알려주시지요?”
그가 태연한 얼굴로 차분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여인은 점점 더 그에게 흥미가 생겼다. 그녀는 양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가 한참 뒤에야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의 아래쪽에 서 있던 다른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네 신식의 힘은 남들과 달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널 점 찍은 이유야!”
“역시…….”
양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오기 전에 이미 짐작했었다. 몰래 신식의 힘을 사용하다가 관을 멘 사람에게 찍혔을 거라고. 그전까지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너에게 신식의 불꽃이 있지?”
수염이 새하얀 백발 노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게 신식의 불꽃이 없다면 관노 어르신께서 너를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부인해도 소용없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에게 신식의 불꽃이 있습니다.”
그가 인정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상석에 앉은 여인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그를 보더니 말했다.
“네 신식을 펼쳐 보일 수 있겠느냐? 네 자질이 어떤지 보고 싶구나.”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됩니다. 하지만 저도 궁금한 게 많습니다.”
“모두 말해 줄 수 있다.”
여인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죠!”
양준은 씨익 웃고는 신식의 힘을 방출했다.
순간, 대전 안은 열기로 뜨거워졌다. 뜨거운 기운이 용암같이 밀려왔다.
이에 여인은 안색이 변했다. 양준이 가지고 있는 신식의 힘이 이토록 강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다급히 기운을 내보내 청순한 소녀를 감쌌다. 소녀가 뜨거운 열기에 영향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과 새하얀 수염의 노인도 수단을 펼쳐 초범 경지 이하의 사람들을 보호했다.
신식의 힘은 순식간에 폭발했다가 다시 양준에 의해 거두어졌다.
모두들 멍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세 쌍의 눈은 흥분으로 반짝거렸다. 보물이라도 얻은 것처럼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네 신식이 이처럼 강할 줄 몰랐구나. 특별한 기연을 얻은 것이겠지?”
일반적인 신유 경지 7단계의 무인이라면 신유 경지를 초월하는 신식의 힘을 가질 수 없었다. 기연을 얻어야만 이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건 제 일입니다.”
양준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제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실 건가요?”
여인은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우리는 너에게 악의가 없고, 그저 널 키울 생각이라는 것이다.”
양준은 그만 멍해졌다가 버럭 화를 냈다.
“지금 절 속이는 겁니까?”
여인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서로 속고 속이는 것이 너희 인간들이 쓰는 수법 아니더냐? 우린 너희 인간에게서 배운 것이다.”
“기억하겠습니다.”
양준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싸늘하게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때, 대전 밖에서 난폭한 기운이 전해지더니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대전의 사람들은 모두 미간을 찌푸렸다. 여인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오는 이를 꺼려하는 눈치였다.
곧이어 웃통을 훌렁 깐 채 가죽 바지만 입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대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험상궂은 얼굴에는 짙은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양준을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치면서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이 자가 바로 관노 어르신이 들여보낸 인간인가? 지난번 놈보다 더 비실비실해 보이는데. 이런 놈으로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저견(楮見), 무례하게 굴지 말게.”
노인이 호통쳤다.
저견은 음산한 눈빛으로 노인을 힐끗 보더니 그제야 무릎을 반쯤 꿇고 상석에 앉은 여인에게 공수했다.
“려 대인을 뵙습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애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도 좋다. 의자를 내오너라!”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견은 손을 내저었다.
“전 그냥 관노 어르신께서 또 한 사람을 들여보냈다기에 그의 능력이 어떤지 보러 왔을 뿐입니다. 역시 실망스럽군요. 려 대인, 이렇게 젊은 소년은 그냥 죽이고 끝내시지요. 괜히 십 년을 낭비하면서 기다리지 않게요.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입니다. 그렇게 여러 번 손해를 보았는데 려 대인은 배운 게 없습니까?”
“저견, 선을 넘는군. 조상의 규칙을 잊은 것인가?”
노인은 버럭 화를 내면서 몰래 힘을 모았다.
저견은 냉소를 하며 위험한 기운을 뿜었다.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우리 일족의 운명은 출신이 불분명한 인간 녀석에게 맡길 게 아니라 제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이 감옥을 깨부수겠습니다. 려 대인, 어떤가요?”
여인은 가슴을 들썩이더니 억지로 웃음을 짜냈다.
“저견 대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니 우리 일족의 복일세. 그럼 우리는 저견 대인에게 희망을 품겠네. 하루빨리 그대의 생각대로 선조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바라네.”
저견은 씨익 웃더니 음산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인간 녀석, 앞으로 조심해. 여기는 바깥과 달라. 너에게 무슨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고.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급히 자리를 떴다. 대전 안의 사람들은 모두 안색이 어두워졌다.
양준은 눈알을 굴리며 심상치 않은 정보를 꽤나 많이 알아냈다.
저견이 왔다 가는 바람에 대전 안의 사람들은 계속 얘기를 나눌 흥미를 잃은 듯했다. 여인은 손을 내저었다.
“완아야, 저 자를 데리고 가 쉬게 해주거라.”
“네.”
완아는 대답한 뒤 자리에서 내려와 양준에게 손을 흔들었다.
“따라와.”
양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따라갔다. 양준이 떠나자, 대전 안에서 노인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려 대인, 저견은 점점 말썽을 부리는군요. 저희가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녀석을 이대로 두면 이곳은 조용할 날이 없을 겁니다.”
여인은 머뭇거리는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도 입을 열었다.
“저견 같은 사람에게는 인자하게 대할수록 대인이 나약한 줄 알아요. 그를 혼내줄 때가 되었어요.”
“생각을 좀 더 해보지.”
여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우리 일족은 이미 얼마 남지도 않았어. 정말 저견을 어찌하기라도 한다면……. 먼저 돌아가 있거라. 내가 생각을 해보고 너희들에게 알리겠다.”
“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떠났다. 여인은 내란을 일으키면 종족에 손해를 가져올까 걱정하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기에 두 사람은 저견에 대한 증오가 더욱 커졌다.
몇 해 동안 저견의 실력과 경지는 점차 강해졌다. 따라서 그는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은 것 같았다.
*양준은 완아와 함께 석성 안을 걸었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마족을 한두 명 마주쳤다. 완아는 앞에서 꿍얼거리며 걷고 있었는데 욕설을 퍼붓는 것 같았다.
이때, 양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저견은 너희 대인을 안중에 두지 않나 본데?”
“그 말종!”
완아는 버럭 화를 냈다.
“자신이 잘난 줄 알고 있지만 그저 음흉한 야심을 품은 늑대 새끼일 뿐이야. 머리를 굴리며 이 땅을 통제하려고 하는데, 대인이 자비를 베풀지 않았으면 진작 죽고도 남았을 거야.”
“음, 여인의 인자한 마음이 때로는 일을 그르칠 때가 있는 법이지.”
양준은 공감을 표했다.
“대인을 흉 보지 마. 대인은 세상에서 가장 착하신 분이야.”
완아는 뒤돌아서 양준을 노려보았다.
“알았어.”
양준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하지만 여기가 어딘지 말해 줄 수 있어? 너희들은 날 어쩌려고 데려온 거야?”
완아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대인께서 말씀해 주시기 전까지 나는 말하지 않을 거야. 너희 인간들이 아무리 간악하고 음험하다고 해도 난 세 살짜리 어린애가 아닌걸. 나한테서 뭔가를 알아내려고 머리를 굴리는 걸 모를 줄 알아?”
양준은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우리는 정말 널 해치지 않아. 대인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널 키울 거야. 네가 우리 대인의 소원을 이뤄 드릴 수 있다면 많은 이득도 얻게 될 거야.”
“날 키운다고? 날 어떻게 키울 건데?”
양준이 캐물었다.
“너희는 내 신식의 불꽃을 이용해서 뭘 할 건데?”
완아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양준이 아무리 캐물어도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준을 데리고 석실 앞에 도착한 완아가 입을 열었다.
“들어가. 앞으로 여기가 네 처소야. 넌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모든 건 우리가 널 위해 준비할 테니. 아, 그리고 널 감시하는 사람은 없지만 넌 도망치지 못할 테니 괜히 시도하지 마. 이곳은 이미 봉인되어 있어. 너도 느꼈지?”
양준은 씩씩거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완아는 웃으며 말했다.
“날 노려봐도 소용없어. 난 그저 명령대로 움직일 뿐이야. 그럼 내일 다시 보러 올게.”
말을 마친 그녀는 양준을 석실로 밀어넣고는 문을 닫고 떠났다.
그녀가 떠난 뒤, 양준은 문을 열어 보았다. 예상 외로 문은 마음대로 열 수 있었고 밖에도 감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이상, 봉인된 공간에서 양준은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어디로 도망치든, 여인이 손쉽게 자신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잡혀 온 이상 이곳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양준은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닫은 뒤, 자신의 처소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생각 외로 석실은 널찍했다. 방금 전의 대전보다도 면적이 더욱 컸다. 그리고 이 방에는 옅은 약 냄새가 풍겼다. 한쪽 방구석에는 크고 작은 약 가마가 놓여 있었는데 큰 것은 항아리만 했고, 작은 것은 손바닥만 했다. 또한 바닥에는 단약을 만들다가 실패한 뒤 남은 잔여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방은 연단사가 머물렀던 곳 같았다. 그는 한참 약 가마들 사이를 누볐다. 그리고 약 가마들 모두 사용한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군가 약 가마들로 연단을 한 듯했다.
다른 한 구석에는 기다란 탁상이 있었다. 탁상 위에는 서적처럼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