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7장. 양액이 거덜나다
마문이 펼쳐지자 녹색의 무늬가 나타난 완아의 얼굴은 평소와 다른 요염한 분위기가 풍겼다.
려용, 한비, 화묵 같은 지배자들은 마문을 더욱 깊은 단계로 펼칠 수 있었고, 그들의 실력도 더욱 크게 상승했다. 하지만 소현계에서는 적이 없다 보니 완아도 지배자들이 마문을 펼치는 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도 들어서 알고 있는 것이지 직접 본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또한 마신성 안에는 마문을 수련하는 법에 대해 적혀 있는 무공 서적들도 있는데, 그건 대마신이 남긴 하사품이라고 했다.
양준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크게 동해 빌려서 읽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완아의 말에 따르면 이 무공 서적들은 자질이 뛰어난 마족들만 볼 수 있다고 했다. 심지어 그녀도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양준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려용이 그를 잘 대해 주고 있지만 그는 주제 파악을 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려용에게 대마신이 남긴 무공 비법을 빌리는 건 현실적이지 않았다. 마음을 내려놓은 그는 하루하루 평범하게 보냈다. 매일 연단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수련하거나 완아에게 바깥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양준이 소현계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일 년의 시간 동안 양준의 연단술도 크게 향상되었다. 지금 그는 영진에 의지하지 않고도 영급의 단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약왕곡 소부생이 평생 바랐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양준은 일 년 만에 이룬 것이다.
양준도 감탄할 뿐이었다. 장소가 다르면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도 달랐다. 소부생은 연단술에서의 조예가 양준보다 깊었지만 그쪽 세상의 한계 때문에 영급의 단약을 만들어 내는 것은 꿈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양준은 영급 단약을 만들어 낸 뒤 심호흡을 하면서 휴식을 취하다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텅 빈 석실을 향해 소리쳤다.
“어르신, 려 대인을 좀 불러 주시겠습니까? 상의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단아는 허공에 숨어 있다가 그 말에 놀란 눈으로 양준을 힐끗 보았다. 인간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가 숨은 곳을 보고 있었다.
단아는 경악했다.
지난번에 반랑이 소란을 피운 사건이 일어난 뒤로 단아는 려용의 지시대로 수시로 어둠 속에서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진작에 자신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양준은 신유 경지 8단계밖에 되지 않았지만 단아는 초범 경지 3단계로 둘의 실력 차이는 현저했다.
‘어떻게 발견한 거지? 언제 발견한 거지?’
단아는 크게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고는 양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 그의 몸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다시 사라졌다.
한참 뒤, 양준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지며 눈에 보이는 잔물결이 일었다. 일그러진 공기 속에서 허공의 힘이 전해졌다. 곧, 려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준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려용은 나타날 때마다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
“날 찾았다며?”
려용이 양준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냐?”
“진원을 보충해야겠습니다.”
“진원을 보충해야겠다고?”
려용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는 신식으로 양준의 온몸을 훑어본 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진원이 충분한데?”
그녀의 강한 경지로는 당연히 양준의 몸과 경맥 안에서 흐르고 있는, 짙은 파괴성을 담은 진원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런 순수한 양성 진원은 일반 마족들의 마기를 억제하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
“아니, 아니요…….”
양준은 고개를 거듭 저었다.
“제 경맥 안에는 진원이 충분하나 단전 안에는 진원이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원이 없으면 연단을 할 수 없습니다.”
“무슨 뜻이지?”
려용은 더욱 의아해졌다.
“진원을 보충하려면 공법을 운행하면 되지 않느냐? 나더러 어떻게 해결하라는 거지?”
양준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수련하는 공법이 좀 특별합니다. 제 체질도 좀 특수하지요. 다른 이들처럼 진원을 수련으로 보충하지 않습니다.”
그의 몸속에 있는 진양원기는 항상 양성을 띤 천재지보를 흡수해서 얻었던 것이다. 천재지보의 기운을 몸속에 흡수한 뒤, 양액으로 제련해 단전에 저장하는 방식이었다. 만약 평범한 무인들처럼 가부좌를 틀고 공법을 운행하여 수련할 경우, 공기 중에서 기운을 얻어 금신에 저장할 수 있기는 했지만 양기가 충분한 환경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방법으로는 양액을 만들 수 없었다.
양준은 마지막으로 언제 양액을 보충했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났으니 단전의 양액은 이미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방울밖에 남지 않은 양액은 바로 보충하지 않는다면 금방 다 소진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양액의 억제가 없다면 금신의 사악한 기운은 폭주할 것이고, 양준은 금방 주화입마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럼 내가 뭘 하면 되지?”
려용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길게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혹시 양성을 띠는 천재지보가 있습니까? 전 그게 필요합니다.”
“양성의 물건은 우리 마족과 상극인데 우리가 어떻게 그런 재료를 가지고 있겠느냐?”
려용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믿지 못하는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를 속이는 건 아니지?”
“전 당신을 속일 이유가 없습니다.”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말 양성을 띤 물건이 없습니까?”
“정말 없어.”
이에 양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큰일이군요. 양성을 띤 물건이 없다면 진원을 보충하지 못할 테고, 진원을 보충하지 못하면 연단을 하지 못할 텐데… 보셨다시피 연단은 제 진양원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럼 어떡하지?”
려용도 초조해졌다.
양준은 연단술에 매우 재능이 있었다. 그의 성장 속도라면 십 년을 기다릴 필요 없이 성급의 단약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러한 이유로 계속해서 단약을 만들 수 없다고 하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려용은 양준이 도대체 무슨 특별한 공법을 수련했는지, 그의 체질이 얼마나 특수한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하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양준을 바라보는 려용의 얼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녀의 일족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갇혀 지냈다. 그들의 유일한 소원은 이곳을 떠나 바깥 세상을 보는 것이었다. 이제서야 겨우 희망을 보게 되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변고 때문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려용은 마족들이 이 소식을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할지 상상이 되었다. 생각을 하던 려용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손에는 양성을 띤 물건이 없지만 소현계 안에는 있지…….”
“어디요?”
양준은 기대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양액이 없다면 그의 입지도 난처했다. 고마 일족의 희망이 될 수 없다면 그는 생존 가치를 잃을 것이고, 려용도 그를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었다.
려용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먼저 두어 날 쉬고 있거라. 이틀 뒤, 네게 소식을 전할게.”
양준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뒤, 려용은 빠른 걸음으로 나갔다.
양액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양준도 더 이상 연단하지 못하고 따분하게 시간을 보냈다. 결국 그는 완아에게 자신과 함께 산책을 하자고 부탁했다. 생각해 보니 그는 소현계에 온 뒤 지금까지 석실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괜히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른 마족의 관심을 끄는 것이 싫었고, 연단술에 푹 빠져 있었던 탓도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한가해지니 그는 밖에 나가 움직이고 싶어졌다.
마신성을 거닐며 양준은 마족들의 난폭하고 잔인한 성미와 불굴의 의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무공을 연습할 때, 그들은 항상 진심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인간 무인들이 겨루는 방식과 전혀 달랐다. 정말 목숨을 건 싸움이었다. 항상 한쪽이 심하게 맞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어야 끝나곤 했다.
고마 일족의 신체는 매우 강해 중상을 입어도 한동안 요양하고 나면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양준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마신성의 커다란 광장에서 양준은 위엄이 넘치는 거대한 조각상을 보게 되었다. 사람의 형상을 본 뜬 조각상이었는데 어느 시대의 것인지, 어느 장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조각상은 매우 생동감 있고 위엄이 넘쳤다. 조각상의 곁을 지나는 무인들마다 모두 공손한 표정을 지었다.
조각상을 바라보던 양준은 은밀하고 신비한 기운이 조각상에서 풍겨 나오며 자신의 금신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기운에 금신 안의 사악한 기운이 하마터면 폭발할 뻔했다. 양준은 안색이 변하며 다급히 억제했다. 순간, 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땀을 뻘뻘 흘렸다.
바로 이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자세히 들어보려고 하는 순간, 그 목소리는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착각했나?’
“너 왜 그래?”
완아는 깜짝 놀랐다. 양준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더니 갑자기 안색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괜찮아,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가 봐.”
양준은 시선을 피했다.
“너희 인간은 몸이 왜 이렇게 약해…….”
완아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누구의 조각상이야?”
양준이 물었다.
“우리 선조인 대마신의 조각상이지.”
완아는 진지한 얼굴로 조각상을 향해 예를 올렸다.
“대마신의 조각상이라고?”
양준은 깜짝 놀랐다.
“그래. 위엄 넘치지? 대마신이 계시던 시대에는 우리 마족이 천하를 호령했대. 너희 인류나 요족들은 우리 마족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거지.”
“그렇게 대단해?”
“대마신은 당연히 대단하지. 무력으로 이름을 떨치셨으니. 지금까지도 그분과 견줄 수 있는 분은 없을 거야.”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지금은 어디 있는 거야?”
“몰라.”
완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너희 선조를 이곳에 봉인해 둔 거야? 너희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것도 몰라…….”
완아는 양준이 계속 모르는 것을 묻자, 버럭 화를 냈다.
“궁금한 게 뭐 이리도 많아? 짜증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