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0장. 포위되다
저견이 시전한 초식에 한비는 얼굴빛이 흐려졌다. 그녀는 온몸의 기운을 모두 끌어올리고 정신을 집중해 그의 공격에서 허점을 찾아내려 했다. 그녀의 보호를 받던 양준도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견의 공격에 반항하려는 생각조차 생기지 않았다.
저견이 입성 경지 몇 단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양준과의 경지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자신을 겨냥한 것이 아니지만 그 기세에 양준은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무수히 많은 주먹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비는 양준을 데리고 이리저리 피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단 걸음마다 규칙이 있었다. 폭발하는 주먹의 힘에 두 사람은 마치 풍랑을 만난 배처럼 수시로 전복될 위험에 처했다.
“한비, 넌 내 상대가 안 된다. 얌전하게 잡혀 주면 곱게 죽게 해주지.”
저견이 공격하는 동시에 고함을 질러 한비의 주의를 끌었다. 둘 다 입성 경지의 고수로서 실력에 일정한 차이가 있지만, 저견이 한비를 사로잡으려면 힘을 들여야 했다. 더욱이 혹시라도 실수로 양준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힘을 제어해야 했기 때문에 저견은 손발이 묶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비는 침묵을 지키며 이를 꼭 깨물었다. 그녀의 몸이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주먹 사이를 날렵하게 오가고 있었다.
저견은 한바탕 맹공격을 펼쳤으나 한비의 옷자락조차 스치지 못하자 화가 치밀었다. 그는 눈동자가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부하들 앞에서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는지 노기에 차서 소리쳤다.
“네가 자초한 거다. 마신변(魔神變)!”
고함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복잡하고 기묘한 검은 마문이 생겨나더니 온몸의 기혈과 전투력도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한비도 방심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마신변을 시전했다. 그녀의 예쁜 얼굴도 분홍빛의 마문으로 뒤덮이면서 동시에 천지간에 은은한 꽃향기가 퍼졌다. 진원으로 이루어진 꽃잎들이 하늘에서 하늘거리며 물밀듯이 저견을 덮쳤다.
저견은 조금도 피하지 않고 주먹을 내질렀다. 주먹에 의해 꽃잎들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버렸다.
“입성 경지 2단계? 여태껏 경지를 숨기고 있었던 거야?”
한비가 놀라서 소리쳤다.
저견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죽기 전에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너무 늦은 건 아니군!”
저견은 말하는 동시에 마기로 된 검고 긴 창을 내던졌다. 긴 창은 맹렬한 기세로 한비의 아랫배를 꿰뚫었다. 한비는 신음을 흘리며 피를 내뿜었다. 그녀는 기세가 빠르게 사그라지면서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용암 분출구 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견이 전력으로 실력을 펼치자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한비에게 중상을 입혔다. 이를 통해 지배자 사이의 놀라운 실력 차이도 엿볼 수 있었다. 저견은 아무 대책 없이 딴마음을 품은 것이 아니었다.
“어서 도망쳐…….”
한비는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마지막 힘을 짜내 양준을 내던지며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당부했다.
두 입성 경지 고수 사이의 충돌에 양준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비의 당부를 들었고,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저견은 그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도 려용과 마찬가지로 양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저견 같은 사람은 딱 봐도 이용할 만큼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없는 순간 그를 처리해 버릴 유형이었다. 려용과 손을 잡는 것만큼 안전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한비의 절망적인 시선 속에서 그녀가 던진 대로 날아갔다.
“인간을 사로잡아라.”
저견은 한비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쪽에 있던 부하들에게 차갑게 명령했다.
그중 양준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신유 경지 정상의 마족이 몸을 번쩍하더니 양준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한 손으로 양준의 목을 잡고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섬뜩하게 웃었다.
“인간, 지금부터 넌 저견 대인을 위해 일해야 할 것이다.”
양준은 어두운 낯빛으로 숨을 헐떡였다. 온몸의 뼈가 우두둑우두둑 소리를 냈다. 그의 금신이 이 같은 절망적인 압박감에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였다. 압박이 강할수록 금신의 반동력은 더욱 강해졌다.
양준은 문득 애당초 자신이 금신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절망 속에서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또한 수많은 절망적인 싸움 속에서 금신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순간 뇌리에 번뜩 스치는 뭔가에 양준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는 가볍게 소리쳤다.
“불굴지오!”
그의 몸을 가두고 있던 속박과 압박감이 한순간에 해제되었다. 그 순간 양준은 다시 자신의 몸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고,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입성 경지 2단계인 저견의 위압감과 기세는 여전히 산처럼 내리누르고 있었지만, 양준은 방금 전처럼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았다.
“난 누구를 위해서도 일하지 않을 것이다.”
양준은 마족에게 씩 웃어 보였다. 그의 손바닥에 나타난 양액은 의념의 제어 하에 예리한 비수로 변했다.
푸욱-
양액으로 된 비수가 마족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그는 눈이 휘둥그레져 당황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순도가 높은 진양원기는 사악한 기운의 천적이기에 그의 몸속 마기를 정화했다. 곧이어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몸이 꿰뚫린 통증과 자신을 억제하는 진양원기 때문에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힘을 전혀 모을 수 없었던 그는 그대로 용암 분출구 쪽으로 떨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저견도 순간 놀라고 말았다. 고작 인간 따위가 자신의 위압감에도 싸울 힘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자신의 부하가 이처럼 영문도 모르게 죽자, 저견은 울화통을 터뜨렸다.
“죽여 버릴 것이다!”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그는 커다란 손을 쫙 펴서 양준을 잡으려 했다.
양준은 온몸의 솜털이 모두 곤두서는 것만 같았다. 그가 신유 경지 정상의 무인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불의의 기습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입성 경지 고수가 공격하자 본능적으로 강한 불안감이 생겨났다.
양준이 손을 흔들자 양액 열몇 방울이 손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양액들은 허공에서 황금빛 긴 창으로 변해 저견의 손을 찔렀다.
푸욱-
저견의 공격이 한순간에 막혔다. 순수한 진양원기는 저견마저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의 손바닥의 마기가 빠르게 정화되더니 곧이어 손바닥에 물집이 생겼다.
양액을 뿜어낸 다음, 양준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아래쪽으로 몸을 던졌다.
한비가 용암 속에 떨어지려는 순간, 양준은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겨드랑이에 끼고서 진원을 돌려 두 사람을 감싸고는 용암 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두 사람은 한순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추격해라!”
저견은 화가 정수리까지 치밀어 앞장서서 쫓아갔다.
저견의 부하들은 서로 마주 보다가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뒤따랐다. 그들은 호전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을 억제하는 환경 속으로 뛰어들자니 왠지 두렵고 주저하게 되었다.
용암 속,
양준은 매우 익숙하게 한비와 함께 빠르게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양준의 겨드랑이에 끼워진 한비는 표정이 착잡했다. 그녀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양준을 바라보며 씁쓸함을 삼켰다.
그녀는 자신이 인간에게 구해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만약 양준이 중요한 순간 폭발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아마 이미 죽었을 것이다. 마신성을 통일하기 위해서 저견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그녀를 반드시 죽여야 했으므로 손속에 여지를 두지 않을 것이 뻔했다.
‘어린 놈이… 어떻게 한 거지?’
그처럼 횡포한 압박감에도 움직일 수 있다니.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실 양준을 던지면서 도망치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 자신조차도 절망에 빠져 있었다. 옆모습으로 보아, 양준은 냉엄한 표정을 하고서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한비는 오히려 그의 눈동자에서 숨겨진 흥분감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는 이 같은 위험하고 자극적인 느낌을 즐기는 듯했다.
‘괴짜야!’
한비는 한참 생각하다가 갑자기 얼굴빛이 차가워지더니 입을 열었다.
“서둘러. 저견이 쫓아오고 있어.”
위쪽에서 포악하고 분노에 찬 기운이 전해졌다. 저견은 거의 폭발하기 직전인 듯했다.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견딜 수 있는 한도는 저에게 좌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 그 위치인가요?”
양준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었다.
“거의 그 정도. 좀 더 아래쪽으로 갈 수도 있어.”
한비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견의 한도는 어느 위치인 거 같나요?”
“입성 경지 2단계라면 아마 백 장 정도 더 내려갈 수 있을 거야! 이곳의 양기가 너무 짙어서 우리 고마 일족을 억제하거든.”
“그럼 못 따라오겠네요.”
양준은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한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데리러 오기 전에, 양준이 아래쪽에 내려가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양준이 어느 정도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말투와 지금 행동으로 보아 더 아래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 듯했다.
그녀는 기대감을 가지고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다.
“견뎌 낼 수 있어?”
“몰라요. 그렇지만 한 번 시도해 보려고요. 그 자에게 잡히는 것보다는 낫죠.”
“사실… 저견은 너를 죽이지 않을 거야. 넌 잡혀도 생명의 위험은 없어. 그런데 왜 이처럼 모험적으로 행동하는 거야?”
“려 대인 쪽을 더 믿거든요. 만약 제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저견에게 잡힐 경우, 저를 다 이용한 다음, 죽여 버리려고 할 거예요.”
“주제 파악을 잘 하는군!”
한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하고 화묵도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겠죠?”
양준이 불현듯 그녀를 바라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한비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며 아연실색해서 양준을 바라보았다.
“역시…….”
양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얼굴빛이 흐려졌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하지만 결정 내리지는 않았지. 우리 고마 일족은 인간에게 빚을 지고 싶지 않아 하거든.”
한비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그녀는 공손함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있는 그대로 말했다.
“그런 생각이 있었다니, 지금이라도 당신을 죽여 후환을 없앨 수도 있습니다.”
양준이 냉소를 흘렸다.
“마음대로 해.”
한비가 고개를 홱 돌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죽이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부상을 입었다 해도, 제가 당신을 죽이려면 그렇게 쉽지 않거든요.”
“역시나 주제 파악을 잘 한다니까!”
한비가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고 하던 당신의 생각을 바꿀 필요는 있을 것 같군요. 만약 다시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저도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을 겁니다. 지금 당신을 죽이지 않은 건 자비로워서가 아니라, 남의 지배 하에 있으니 어쩔 수 없어서입니다.”
한비는 입을 삐죽거리고는 말문을 닫았다. 양준과의 대화에서 그녀는 주도권을 가질 수 없었다. 양준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