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1장. 화산 아래 동굴
저견의 추격에도 양준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명석한 두뇌로 한비와 흥정을 했다. 이번에 자신이 그녀를 구해 준 대가로 자신에 대한 그녀의 적의를 조금이나마 줄여보려는 속셈이었다.
뒤쫓는 무리에서 저견은 선두에 있었다. 그의 건장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에 의해 뜨거운 용암이 양옆으로 밀려났다. 그의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으나 양준과 한비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신식으로 그들의 위치를 추적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 얌전하게 잡히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나한테 잡히는 순간 뼈도 추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저견은 추격하는 내내 소리쳐 경고했다.
양준은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지금 멈추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아무튼 그는 저견의 손에 잡힐 생각이 없었다. 이윽고 한 달 전 그가 수련하던 깊이에 이르렀다.
이곳에 이르자 한비의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양준이 진원으로 감쌌지만 그녀의 온몸의 마기가 꿈틀거리며 본능적으로 주위의 양기를 배척하려 했다. 방금 전 한비가 말한 것처럼 이곳은 그녀가 들어올 수 있는 한계치로, 더 아래로 내려가면 그녀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달리 말해, 이곳에 도달한 이상 앞으로 그녀의 생사는 양준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었다. 만약 양준이 그녀를 죽이려 한다면 이곳에 그녀를 내버려 두면 되었다. 뒤쫓아오는 저견이든, 이곳의 양기든 모두 중상을 입은 한비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 한비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준은 그녀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진원을 더 많이 뿜어서 그녀를 꼭꼭 감쌌다. 그녀를 버릴 생각은 없는 듯했다. 이를 눈치챈 한비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차갑고 그윽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마음이 착잡해졌다.
“인간, 네놈이 내 화를 돋웠어. 반드시 살아도 죽느니만 못하게 만들 것이다.”
저견의 고함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양준이 끝까지 타협하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자, 결국 분노가 폭발한 듯했다. 그는 다시 속도를 올리고 끈기 있게 그들을 쫓았다.
양준은 안색이 살짝 바뀌더니 속도를 높였다. 그러나 경지가 저견보다 낮기에 쌍방의 거리는 점점 더 좁혀지고 있었다. 게다가 저견 같은 고수가 기세를 뿜어내는 바람에 화산의 기운이 불안정해졌고, 그로 인해 아래쪽 용암이 빠르게 위로 솟구치면서 양준을 방해했다.
이십 장, 삼십 장, 오십 장…….
깊어질수록 주변의 양기와 열기가 점점 더 강해졌고, 그 열기에 양준도 땀투성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들려 있는 한비 역시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한계치에 다다른 거야?”
한비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그녀 또한 양준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재수가 없군. 너 같은 인간하고 같이 죽게 되다니.”
한비가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자신의 마지막이 매우 유감스러운 모양이었다.
“입 다무시죠.”
양준이 화를 버럭 냈다. 이런 상황에 이르러서도 한비가 여전히 자신을 얕잡아볼 줄이야. 마신성에 있을 때에도 적지 않은 마족들이 그를 얕잡아보았다. 완아도 지금은 그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지만, 처음에는 여느 마족들과 마찬가지였다.
고마 일족의 눈에 인류는 하급 종족이고, 오직 그들만이 고귀한 혈통이었다. 양준을 바라보는 고마 일족의 눈에는 언제나 거만함과 경멸이 어려 있었다. 양준은 그러한 시선이 너무나 불편했다. 특히 한비는 더했다. 그녀는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굽어보는 태도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이윽고 푸드득,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한 쌍의 날개가 양준의 등 뒤에서 펼쳐졌다. 날개가 펼쳐짐에 따라 양준의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또한 화려하고 커다란 날개는 양준의 조종 하에 수축되어 두 사람을 겹겹이 감쌌다. 덕분에 타 죽을 것만 같았던 열기가 많이 약해졌다.
“천도의 법칙?”
한비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그녀는 자신을 감싼 양염지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화려한 날개에서 이해할 수 없는, 현묘함과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현묘함과 힘은 양준이 수련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별한 기연을 만나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떻게…….”
한비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연이은 놀라움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안목이 괜찮네요. 맞아요. 바로 천도의 법칙이 가져다준 힘입니다.”
양준이 조롱했다.
“네 행운은 참 시샘이 날 지경이야.”
한비는 나지막하게 말하면서 손을 내밀어 날개를 만져 보았다. 그런데 손이 날개에 닿는 순간 우지직, 하고 가벼운 소리가 들려왔다. 날개에 내재된 양성 원기는 그녀의 마기와 상극이었다. 양성 원기 때문에 상처를 입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녀의 마기가 정화될 수 있었다.
한비는 손을 거두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한참 감지해 보고 나서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저견의 속도가 늦어졌어.”
“이제 곧 한계치에 이를 겁니다.”
양준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그가 위쪽에서 지키고 있는 이상, 우리는 나갈 수가 없어. 그럼 조만간 잡히게 될 거야.”
한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려 대인께서 저 자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겁니다. 당신은 려 대인과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하면서도 려 대인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것 같군요. 그분은 인자하지만 무지하지 않습니다. 저견이 감히 사람을 거느리고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려 대인께서 빠른 시간 내에 소식을 들을 수 없다고 해도 며칠이 지나면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러면 분명 우리를 구하러 올 겁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한동안 숨어 있으면 됩니다.”
양준이 냉소하며 말했다.
한비는 얼굴을 붉히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 명의 지배자 중 한 명으로서 평소라면 이렇게 간단한 일을 당연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겪은 일들이 모두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라, 지금 그녀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인간, 후회할 것이다.”
위쪽에서 저견의 분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비! 죽고 싶지 않으면 인간을 데리고 빨리 나와.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두 사람 모두 그의 말을 무시했다. 저견이 고함을 지르는 순간, 추격이 멈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입성 경지 2단계라 하더라도 그를 억제하는 환경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을 희망이 보여서인지, 한비는 얼굴이 밝아졌다.
“내려 줘.”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여태껏 인간의 겨드랑이에 끼어 있으면서 반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의 상처…….”
양준이 그녀를 힐끔 보았다.
“너희들 인간의 취약한 몸뚱이와 동일시하지 마. 우리 고마 일족은…….”
양준은 그녀가 말을 끝내기 전에 풀어주었다. 그의 반감을 눈치챘는지, 한비는 분별 있게 말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그의 곁을 따라다니며 그의 진원과 양염지익의 이중 보호를 받았다.
위쪽에서는 저견의 고함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그의 기세 때문인지 용암은 점점 더 불안정해졌다. 양준과 한비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신식을 펼쳐 주위를 탐지했다.
이때, 갑자기 한비가 기쁜 얼굴로 한쪽을 가리키며 환호를 질렀다.
“이쪽이야!”
양준은 놀라서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감지해 보다가 곧 미소를 짓고는 그쪽으로 질주했다.
잠시 뒤,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용암이 사라졌다. 두 사람은 통로에 뛰어들었다. 통로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건조했다. 그리고 이곳의 열기는 용암 속에 있을 때처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도 않았다.
화산 아래쪽에 이런 곳이 있다니. 양준은 뜻밖의 행운에 기쁨을 금치 못했다. 둘은 땅바닥에 앉아 한참 동안 숨을 헐떡였다. 두 사람 모두 막다른 위험에서 벗어난 기쁨과 흥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양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왼쪽은 뜨거운 용암이 여전히 솟구치는 반면, 오른쪽은 끝을 알 수 없는 통로였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죠. 만에 하나 용암이 흘러들어오면…….”
양준이 걱정되어 제안했다. 용암은 지금 압력에 의해서 위쪽으로 솟구치고 있지만, 일단 압력이 사라지는 순간 통로를 덮칠 것이 뻔했다.
한비는 그 말에 공감했는지 반박하지 않고 힘들게 몸을 일으켜 양준을 뒤따랐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양준은 손으로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비는 감히 그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못했다. 이곳은 양기가 여전히 짙어, 그녀는 양준의 진원으로 양기의 침입을 막아야만 했다.
똑- 똑-
한비의 상처에서는 피가 연신 흘러내렸다. 조용한 통로 속에서 그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양준은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비가 좀 전에 보여준 태도와 고마 일족의 강한 신체로 볼 때, 그 정도의 중상은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구불구불한 통로를 따라 안쪽으로 계속해 걸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을 걷던 그들은 원기가 극히 짙은 동굴에 이르렀다. 동굴은 매우 넓고 천정도 보이지 않았다. 빛이라고는 없어 양준은 이곳의 환경을 자세하게 알 수 없었다. 신식을 펼쳐 보니 어떤 생명의 기운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제야 그는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이런 특수한 환경에서는 신비한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이런 생명체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강하고 위협적이어서 지금 만나면, 양준이든 한비든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여기서 쉽시다.”
양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은 뒤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한비는 자리에 앉으면서 양준을 잡아당겼다. 양준은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옆에 앉았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양준은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한비는 분명 그의 진원의 보호가 필요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말을 꺼내기 싫어 울며 겨자 먹기로 행동으로 자신의 뜻을 밝혀야만 했다.
‘참 위선적이야!’
양준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