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3장. 성정?
양준이 정말 떠나려 하자, 한비는 곧바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녀는 얇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슬픈 눈망울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대단히 억울한 일을 당한 듯이 무척이나 가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한비처럼 도도한 여인은 보통 이런 표정을 지을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었다. 양준이 이대로 떠난다면, 그녀는 반드시 그의 뒤를 따라야 했다. 눈앞에 이렇게 큰 광맥을 두고 채굴할 수가 없다니. 그녀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마 일족에게는 정석이 너무나 필요했다.
“어떡할까요?”
양준이 고개를 갸웃하고서 여유 있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 말대로 채굴한 사람이 주인인 거로 해.”
한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럼 시작합시다.”
양준은 기분 좋게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비는 일언반구도 없이 뒤돌아 진원으로 정석이 매장된 암벽을 깨기 시작했다. 자갈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녀는 자갈 속에서 정석을 찾은 뒤 기쁜 표정으로 허공 반지에 넣었다.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정석을 차지하려는 한비의 모습에 양준은 실소하고 말았다. 그는 느긋하게 앞으로 다가가 암벽을 깨기 시작했다.
정석은 보통 다른 광물 속에 내재되어 있기에 정석 광맥에서 정석을 1할 정도 채굴한다고 해도 매우 풍부한 광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화산 아래쪽의 정석 광맥은 보통 풍부한 광맥이 아니었다. 이곳은 채굴할 수 있는 정석이 거의 3할 정도나 되었다.
양준이 말한, 채굴한 사람이 주인이라는 말에 한비는 열정을 불태웠다. 그녀는 상처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격렬하게 암벽을 부수고 채굴해 나갔다. 정석을 찾으면 살펴보지도 않고 그냥 반지 속에 넣었다. 마치 양준이 빼앗아갈까 봐 초조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반면 양준은 느긋하게 움직였다.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아가다 보니 대다수의 정석은 모두 한비가 차지하게 되었고, 그는 그중에서 아주 작은 일부분만 가질 수 있었다. 채굴하는 동시에 한비는 몰래 양준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의기양양해졌다.
‘나쁜 인간, 감히 채굴 속도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나하고 경지 차이가 얼만데!’
그녀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혹여 양준이 화가 나서 자신을 내버려 두고 갈까 봐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이제 한비가 모은 정석은 양준의 몇 배에 달했다. 이쯤 되자 그녀는 이곳의 정석을 양준이 나누어 가질까 걱정하지 않았다. 양준의 수단으로 자신에게서 정석을 빼앗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통로는 뚫을수록 깊어지고, 깊을수록 정석의 양이 많았으며 크기도 점점 더 커졌다. 양준은 심지어 사람 머리 크기의 정석을 채굴하기도 했다. 한비는 그 크기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이렇게 큰 정석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눈앞의 재물에 정신을 빼앗겨 자신들이 피난 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때 한비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양준은 자신보다 수확이 훨씬 적었지만 전혀 초조해하지 않고 차분하기만 했다.
‘나하고는 비길 수가 없다는 걸 알고 조금만 얻어도 만족하는 건가?’
한비는 몰래 추측했다.
그럴 수도 있었다. 이곳에는 정석이 매우 풍부했다. 그리고 한비는 고마 일족 전체를 위해서지만, 양준은 자신만을 위해 채굴하는 것이었다. 양이 적어도 그 혼자 사용하기에는 충분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한비같이 강한 사람도 피곤함을 느꼈다. 은연중 승부욕 때문에 그녀는 양준보다 몇 배나 더 되는 정신과 체력을 소모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방금 전에 채굴한 정석을 들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양준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힘들어. 좀 쉬지.”
그녀는 말하는 한편, 먼저 양준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물러섰다. 그녀는 양준의 진원의 보호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고는 몰래 허공 반지에서 불필요한 물건들을 내던졌다.
조금 지나, 그녀는 다시 정석을 채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금 멈춰 섰다. 얼굴에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띠고서 연신 고개를 저었다.
“허공 반지가 다 찬 건가요?”
양준은 곧 문제점을 발견했다.
한비는 그윽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건곤대가 있으면 두어 개 빌려줘.”
양준은 도울 방법이 없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는 무엇으로 정석을 저장했어?”
그녀는 양준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양준에게서 건곤대나 허공 반지를 보지 못했다. 그가 채굴한 정석은 번쩍하면 사라져 있었다. 도대체 어디에 저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비밀이라서 알려 줄 수 없습니다.”
“대단한 척하긴!”
한비는 콧방귀를 뀌었다. 허공 반지는 등급이 높은 저장 비보였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허공 반지는 집 한 채 정도의 물건을 저장할 수 있었다. 양준 같은 인간이 허공 반지보다 등급이 높은 저장 비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를 악물더니 양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계속 으슬으슬하네.”
“상처가 심해진 거 아닌가요?”
양준은 깜짝 놀랐다. 그는 한비가 이곳에서 죽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한비는 어쨌든 마족의 4대 지배자 중 한 명이었다. 만약 그녀가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그는 려용에게 해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고마 일족 전체의 원수가 될 수도 있었다. 소현계에서 떠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찾기 전까지 양준은 고마 일족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몰라.”
그녀는 말하면서 흠칫 몸까지 떨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채굴하던 것을 멈추고 옷을 벗어 그녀에게 던져 주었다. 그녀는 착잡한 표정으로 옷을 받아 들고 가볍게 말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양준은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방금 전까지 몸을 부르르 떨던 한비는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자신이 건넨 옷의 두 소매를 매듭지어서 간단한 보자기를 만들더니 정석을 주워 넣고 있었다.
양준은 어이가 없었다. 그제야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너무 탐욕스러운 거 아닙니까?”
양준이 한바탕 비웃었다.
“뭘 안다고 그래? 우리 고마 일족이 정석을 얼마나 오랫동안 원했는데. 당연히 조금이라도 더 채굴해야지. 정석 하나가 우리 고마 일족에게는 아주 큰 쓰임새가 있거든.”
한비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서 계속해 보자기에 정석을 주워 넣었다.
“그럼 바지까지 드릴까요? 이것도 보자기로 만들 수 있어요.”
양준이 냉소하며 말했다.
“좋아!”
한비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양준은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그녀에게 소리쳤다.
“기억할 거예요. 앞으로 더는 당신의 말을 믿지 않을 겁니다. 지조라는 게 있기나 한가요?”
“지조는 또 뭐야?”
한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건 정조뿐이었다.
양준은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말문을 닫고 묵묵히 정석을 캤다.
한비는 이제 더는 방법이 없었다. 허공 반지는 이미 꽉 찼고, 양준이 그녀에게 주었던 옷에도 꽉꽉 담았다. 더는 정석을 담을 곳이 없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한쪽에 서서 양준이 정석을 채굴하는 것을 빤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부러운 나머지 눈알이 다 빨개질 지경이었다.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놀랍게도 양준은 전혀 멈출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가 채굴한 정석을 어디에 저장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한비가 대략 짐작해 보니 그동안 양준이 채굴한 정석은 자신보다 두 배 정도는 더 많았다. 그녀는 그제야 양준이 왜 그리 차분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과 다툴 필요가 없었다. 그는 진작 그녀의 저장 능력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 인간은 도대체 무슨 저장 비보를 쓰는 거지? 어떻게 저렇게 큰 공간이 있을 수 있지?’
며칠 동안, 한비는 줄곧 양준을 탐지하면서 비밀을 찾아내려 했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뒤로도 양준은 여전히 정석을 채굴했다는 것이다. 그의 몸은 마치 밑 빠진 항아리처럼 정석이 있는 만큼 다 저장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도와주면 나간 다음, 반을 나한테 나눠 주면 안 돼?”
한비는 더는 앉아만 있을 수 없어 조용히 제안했다.
양준은 음산하게 그녀를 힐끗 보더니 콧방귀를 뀌고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그럼 4할! 아니, 3할도 안 돼? 내가 도와주면 속도가 더 빠를 거잖아. 그러면 너도 손해 보지 않지.”
한비는 이를 악물고 먼저 양보했다.
“2할은? 1할이라도 돼… 적어도 1할은 나눠 줘야 해.”
“나한테 말 걸지 마세요. 난 당신과 말하고 싶지 않거든요.”
양준은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속 좁긴! 혼자서 그리 많은 정석을 다 쓸 수 있어? 그동안 채굴한 양만으로도 아마 몇십 년은 쓸 수 있을걸.”
“다 쓰지 못하면 가져다가 다른 물건과 바꿔도 됩니다.”
양준은 손가락을 꼽으며 하나하나 세기 시작했다.
“약재, 비보, 무공, 공법 심지어 여인도 바꿀 수 있습니다.”
한비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파렴치해!”
“주제 파악을 하셔야죠. 지금 당신은 제 보호를 받아 무사한 겁니다. 저한테 왈가왈부하지 마세요. 정말 확 던져 버리고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한비는 화가 났으나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입성 경지로 이곳에서 손쉽게 양준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에 양준이 자신을 구해 주었고, 지금 또 그의 도움이 필요하기에 그녀는 결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행동으로 보아, 그녀는 적어도 은원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양준도 그녀가 싫지는 않았다.
“어?”
양준이 갑자기 놀라서 소리치더니 눈앞의 자갈 속에서 특이한 정석을 주워들었다. 정석은 그리 크지 않았다. 양준이 전에 채굴한 정석에 비하면 작은 편에 속했고, 포도 알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내재된 기운이 세숫대야만 한 정석과 비교해도 수십 배가 더 짙었다. 그것을 손에 넣는 순간, 양준은 저도 모르게 표정이 흔들렸다.
“성정(聖晶)?”
한비도 놀라서 외치더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형형한 눈빛으로 양준의 손에 든 정석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