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9장. 멸세마안
“당연하지. 우리는 그렇게 예의 없는 사람은 아니야.”
려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궁금하대?”
한비는 입을 삐죽였다. 화묵도 웃으며 말했다.
“나한텐 그런 악취미는 없어.”
“그럼 들어오세요.”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식해로 들어간 그는 신혼 영체로 변해 식해의 방어를 풀었다. 곧 세 가닥의 기운이 그의 식해로 들어왔다. 고마 일족 세 지배자의 신혼 영체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석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자, 완아는 옆에서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조급한 마음에 이 사람, 저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참지 못하고 양준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도 세 지배자가 양준과 중요한 일을 얘기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신분으로는 개입할 자격이 없기에 무모하게 양준의 식해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잠자코 기다렸다.
*식해 안, 뜨거운 기운이 드리웠다.
양준을 제외한 셋은 모두 저도 모르게 신식의 힘을 펼치며 뜨거운 기운을 막느라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고마 일족은 이런 뜨거운 기운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려용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난번에 그녀가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양준이 가지고 있던 신식의 불꽃은 이 정도로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조차도 부담스러울 만큼 뜨거웠다.
양준은 신식의 불꽃을 열 개 넘게 삼킨 뒤, 신식이 훨씬 강해졌던 것이다.
“우리가 얘기하기 편한 공간 좀 없을까?”
려용이 제안했다.
양준은 생각하다가 그들이 꺼리는 게 무엇인지 파악하고 먼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갑시다. 저쪽엔 신식의 불꽃이 없어요.”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자 불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는 오색 섬이 보였다. 다들 눈앞이 밝아지며 양준을 따라 섬으로 날아갔다.
신혼 영체가 섬에 닿자 고마 일족의 세 지배자는 모두 깜짝 놀랐다.
“왜 네 식해에서 우리의 신식도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 거지?”
한비는 놀란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래.”
화묵도 똑같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오색 섬은 뭐 하는 곳이야?”
려용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세 사람이 양준의 식해 안에서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 것은 이 섬과 연관된 게 분명했다.
“그 얘기를 하려고 오신 건 아니죠?”
양준은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그는 세 사람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온신련은 수시로 사람들의 신혼에 힘을 불어넣어 줬다. 섬에 당도했으니 그들이 온신련에 의해 이득을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이득이라고 해 봤자 미미하겠지만.
하지만 온신련의 주인인 양준은 달랐다. 오랫동안 누적되면 미미한 힘도 남들이 샘 날 만한 정도로 모이기 마련이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나.”
려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너에게 좋은 물건이 꽤나 많은 것 같구나.”
“사람마다 비밀이 있는 셈이지요.”
양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젠 말해 주십시오. 당신이 저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거든요. 다른 두 분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의 말을 들은 화묵과 한비는 려용에게 시선을 돌렸다. 려용은 생긋 웃더니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을 봐.”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화묵과 한비는 시선을 돌렸다. 하늘에는 굳게 감은 눈이 떠 있었다. 그 눈을 바라보는 순간, 화묵과 한비는 저도 모르게 불안하면서도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둘의 신혼 영체는 영문도 모른 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지난번처럼 눈을 뜨게 할 수 있어?”
려용이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생각을 전했다. 그러자 굳게 닫힌 눈이 서서히 떠지기 시작했다. 길고 위엄이 넘치는 황금빛 동공이 세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이는 대단한 고수가 싸늘한 시선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시선을 받으면 누구든지 자신이 아주 작은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눈빛에 가루가 되어 세상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화묵과 한비는 강하게 몸을 떨었고, 려용마저도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자네들도 이게 뭔지는 알고 있지?”
려용은 흥분된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몽롱한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멸세마안?”
잠깐 침묵하던 화묵이 소리쳤다. 한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려용과 같이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멸세마안이라고?”
“틀림 없어. 조상이 남긴 기록과 똑같았으니까. 그리고 지난번에 저 눈동자가 나에게 금빛을 쏘았는데, 그때 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위력을 느꼈지. 그러니 멸세마안 외에 다른 것일 리 없어.”
려용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는지 가슴을 들썩이며 말했다.
“하늘이시어, 드디어 제가 살아생전 멸세마안을 보는군요.”
화묵은 눈물을 흘리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는 눈동자를 향해 절을 했다. 곧이어 려용과 한비도 같은 행동을 했다.
양준은 의아한 얼굴로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때, 금빛 세 갈래가 눈동자에서 튀어나오더니 정확하게 세 사람의 신혼 영체를 맞혔다.
양준은 안색이 변했으나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금빛에 맞은 뒤, 세 사람은 사라지지도, 다치지도 않고 오히려 기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들은 지혜의 세례를 받은 것처럼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몰래 살펴보니 세 사람은 금빛에서 뭔가를 얻은 것이 확실했다. 그는 세 사람을 방해하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금인독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한참 뒤, 세 사람 모두 눈을 떴다. 그들의 신혼 영체는 전보다 훨씬 강해져 있었다.
‘이들도 많은 이득은 얻은 모양이군.’
양준은 생각에 잠겼다. 그도 금인독안이 고마 일족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세 사람도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기쁘고 흥분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두 공손하게 양준을 바라보더니 공수하며 말했다.
“대인을 뵙습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봐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오늘부터 당신이 우리 고마 일족의 족장입니다.”
려용은 뜨거운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화묵과 한비도 반박하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 심하지 않습니까?”
양준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저는 인간이고, 당신들은 마족입니다. 몸에 흐르는 피가 다른데 제가 어떻게 고마 일족의 족장이 될 수 있겠습니까?”
“대인, 먼저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제가 자세히 설명해 드릴게요.”
려용은 미소를 짓더니 하늘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디에서 멸세마안을 얻게 되셨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양준은 생각을 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불편합니다.”
대충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입성 경지의 고수들 앞에서 그런 장난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니 양준도 그들을 속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 묻지 않을게요.”
려용도 신경 쓰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대인께서 저희한테 아직 의심을 품고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만약 대인이 모두 말해 주었다면 저희가 되레 고마 일족을 이렇게 속셈이 없는 사람에게 넘겨줘도 되나 싶었을 거예요. 대인의 행동은 대마신의 선택이 지당하다는 것을 설명하지요.”
“대마신?”
양준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게 그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멸세마안은 바로 대마신의 눈입니다.”
려용이 대답했다.
양준은 그만 제자리에 굳어졌다.
“마신성에서 일 년 넘게 살았으니 대마신에 관한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계실 거예요.”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려용은 대마신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었다. 그녀는 그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대마신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더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 제가 설명하기도 편하겠네요.”
려용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대마신은 업적이 위대한 고수로서 통현대륙에 기록된 이들 중에서 단연 최고의 고수예요. 그 세대에 마족은 가장 강한 종족이었어요. 다른 모든 종족은 마족의 부속물에 불과했죠. 그런 마족에서도 저희 고마 일족은 혈통이 가장 고귀한 종족이자 대마신을 시중하는 노복이었어요.”
려용은 뿌듯한 얼굴로 얘기를 꺼냈다. 한비와 화묵도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대마신의 경지는 더없이 강해 그와 견줄 수 있는 상대가 없었지요. 실력이 너무 강해 적이 없자, 그는 이 세계를 벗어나고 싶어 하셨어요. 더 높은 차원의 세상이 있지 않나 찾아보고 싶었던 거죠. 기록된 바에 의하면 그는 무사히 이곳을 떠나서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가셨다고 해요. 하지만 다른 책에서는 그가 실패해 신혼이 불에 타버렸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죠. 그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뒤로 누구도 그의 행방을 몰랐으니까요. 제가 보기에 대마신은 실패하셨어요. 그렇지 않으면 멸세마안을 남겼을 리가 없죠.”
려용은 슬픈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대마신은 떠나기 전에 저희 일족을 소현계에 봉인하셨어요. 그는 자신이 떠나면 마족이 약세에 처할 것이고, 일부 종족들은 배신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죠. 저희는 대마신의 노복으로 멸족될 위험이 닥칠 게 뻔했어요. 그래서 저희 고마 일족을 소현계에 가두어 두신 거예요. 대마신도 저희를 영원히 가둘 생각은 없으셨나 봐요. 특별히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남겨 두신 걸 보면요. 저희가 성공적으로 이곳을 탈출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아마대마신의 충성스러운 노복이었던 고마 일족을 잊었을 거예요. 대마신은 이젠 이 세상에 없지만 눈을 남겨 두셨죠. 그 눈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대인이 멸세마안을 가졌다는 것은 대마신이 대인을 인정했다는 뜻이죠. 대마신이 인정한 사람이니 그의 노복인 저희 고마 일족은 당연히 대인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대인이 바로 저희 고마 일족의 주인이에요. 저희는 대마신을 모시던 것처럼 대인을 모실 것입니다. 대인은 분명 대마신이 보내 주신, 우리를 도와 이 세계를 벗어나게 해줄 분이세요.”
려용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