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650화 (649/853)

제 650장. 검은 책의 주인

려용의 말을 들은 양준은 한참이나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양준은 그녀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대마신의 멸세마안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만 믿기에는 증거가 부족했다.

“그것 참 공교롭네요. 제가 여기에 온 건 무심결에 관노에게 잡혀서 들어온 거잖습니까? 제 식해 안의 이것이 멸세마안이라고 확신합니까?”

“확신해요.”

려용뿐만 아니라 한비와 화묵도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몸에는 고마 일족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우리의 선조는 대마신을 모신 노복이었으니 이 점은 틀림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 모든 게 대마신께서 미리 준비하고 이끌어 주신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선조들을 따라서 저를 주인으로 모실 필요는 없어요. 사실 저는 이런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요.”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려용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곧 양준이 뭘 꺼려하는지 알아챘다. 그가 마신변을 펼치면 모든 고마 일족을 통제할 수 있지만 그의 지금 실력은 이제 겨우 신유 경지 8단계밖에 되지 않았다. 마신변이 없다면 다른 고마 일족들은 언제든지 그를 죽일 수 있었다. 한 종족을 굴복시키려면 절대적인 무력이 꼭 필요했다.

“대인께서 실력 문제로 그러시는 거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저희 셋은 대인의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보는 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전 멸세마안이 대인을 선택했다면 대인은 나중에 반드시 대마신처럼 강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절 너무 대단하게 보시는군요.”

양준은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엄숙한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이 얘기는 당분간 하지 맙시다. 전 다른 일에 관심이 갑니다만.”

“말씀하시지요.”

려용은 양준을 강요해 대답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너무 몰아붙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양준은 고마 일족에 대한 믿음이 거의 없었다.

“마신성 안에 마신변을 수련할 수 있는 공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려용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대인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무공 서적을 보여 드릴 생각이었어요. 대인의 마신변은 멸세마안에서 얻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전통적인 마신변이에요. 대인의 몸속에는 대마신의 기운이 흐르고 있으니 당연히 이러한 사실들은 알고 계시겠죠.”

양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려용의 추측은 사실과 달랐다. 그는 소현계로 오기 전에 마신변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입마 수단은 멸세마안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금신에서 알아낸 것이었다.

“대인, 제가 사실을 얘기하면 화내지 마세요.”

려용은 가볍게 웃으며 양준의 표정을 살폈다.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대인의 마신변은 우리 일족의 모든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마신변에 대한 대인의 이해도가 너무 낮아 위력을 전부 발휘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대인의 마신변은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어요.”

양준은 깜짝 놀랐다가 바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그럼 제 마신변이 더욱 큰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겁니까?”

“맞아요.”

려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쭉 이 정도라면 저희 고마 일족이 어떻게 대인 옆에서 대인을 보호하며 함께 싸움에 나가겠어요?”

양준이 마신변을 펼치면 고마 일족의 모든 사람들은 나무토막처럼 굳어졌다. 만약 정말 적을 만난다면 그들은 그저 죽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마신변을 2단계까지 수련하셔야 해요. 2단계에 이르러야 저희에 대한 통제의 힘을 거둘 수 있어요. 그럼 우리도 함께 적을 물리칠 수 있고요.”

려용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좀 재밌군요.”

양준은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까지 그는 려용 무리가 자신을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말에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의 능력으로 고마 일족 전체를 굴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그들은 점차 실망할 것이고, 따라서 그를 무시할 것이 뻔했다. 양씨 가문의 계승 싸움을 겪어 본 그로서는 아랫사람들을 다루는 수단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신변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힘을 키울 수 있는 수단을 놓친 적이 없었다.

“언제든지 무공 서적을 달라고 하실 수 있으세요.”

려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가죠. 오늘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서 생각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양준이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세요. 대인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너무 어색합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인이라는 두 글자를 음미했다. 생각할수록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지시에 따를게요.”

“전처럼 대해 주십시오.”

양준은 웃으며 말했다.

“고마 일족이 저를 대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불필요한 갈등을 빚을 수도 있고요.”

려용은 실소했다.

“괜한 생각입니다. 고마 일족은 예로부터 지배자의 명령에 따랐어요. 저희 셋이 인정한다면 모든 이들이 인정한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하지만 정 불편하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할 얘기를 마쳤으니 저흰 이만 물러갈게요.”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려용과 화묵은 양준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혼 영체가 빠른 속도로 물러났다. 한비는 떠나지 않고 복잡한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이죠?”

양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아니, 화산에서 구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려고.”

“당신도 절 구해줬잖아요. 우리는 서로 빚지지 않았어요.”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며칠 뒤 답례할게요. 어쩌면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뭔데요?”

“때가 되면 알게 될 겁니다.”

한비는 말을 마치고 빠른 속도로 양준의 식해를 떠났다.

양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세 지배자는 떠나지 않고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려용이 웃으며 말했다.

“물어보는 걸 잊었군요. 거처를 바꾸지 않겠어요? 여긴 연단방으로 하고.”

전에는 양준의 신분을 확신할 수 없어 그를 배려하고 신경 쓴다고 했지만 남들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 그리 좋은 조건을 제공하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이제 신분을 확인한 이상, 려용은 그에게 더욱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여기도 충분히 편합니다. 연단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연단에 대해서는…….”

려용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전에는 우리와 협력 관계였으나 지금은 우리가 부탁하고 있는 입장이니 연단하기 싫다면…….”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원래도 연단술을 연구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셔서 오히려 감사한데요.”

그 말을 들은 려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감격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신분이 달라졌으니 려용은 양준에게 연단을 계속하라고 요구할 수 없었다. 양준이 거절한다면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면 시녀 몇 명을 불러 시중을 들라고 할까요? 우리 고마 일족의 소녀들은 미모와 몸매를 겸비하여 인간보다 못하지 않…….”

려용은 입술을 깨물고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화묵은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류가 여색을 즐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한비는 저도 모르게 목을 가다듬더니 어색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완아면 됩니다. 다른 사람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양준은 려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젊은 남자인 그가 여색을 즐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 년이 넘도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려용은 그를 배려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더 많은 생각과 계산 때문에 그의 곁에 사람을 두려는 듯했다. 만약 양준이 고마 일족의 소녀에게 감정이 생긴다면 그들은 더욱 쉽게 양준을 묶어 둘 수 있었다.

“알겠어요.”

려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에는 만족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완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여전히 전처럼 모시거라. 무슨 요구든 다 들어주고.”

완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려용 일행이 떠나가고 석실에는 그녀와 양준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막무가내로 양준을 잡고 흔들면서 이를 악물고 물었다.

“나쁜 놈, 우리 대인과 무슨 말을 했기에 대인이 나더러 널 모시라고 하는 거야?”

“별 얘기 안 했어. 그저 담소를 좀 나누었을 뿐이야.”

“인간은 역시 음험하고 교활하구나.”

완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대인께서 네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라고 했는데 너 혹시 선을 넘는 걸 바랄 건 아니지?”

“안 그래.”

“정말 안 그럴 거야? 믿지 못하겠어. 맹세해 봐.”

양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소녀의 수다에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생각을 좀 해보다가 정석 하나를 꺼내 완아에게 건넸다.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로 가서 놀아.”

완아는 경멸 어린 얼굴로 말했다.

“고작 정석 하나로 날 매수하려고?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양준은 정석을 하나 더 건네주었다. 이에 완아는 기쁜 얼굴로 받아 들고는 곧장 사라졌다.

석실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방금 전, 식해에서 세 지배자와 한 얘기를 떠올리자 양준은 여전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 년 동안 그는 열심히 연단술에 몰두했지만 시시각각 앞날과 계획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평생 고마 일족에게 감금당한 채, 이곳에서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변고로 자신이 완전히 주도권을 쥐게 될 줄이야. 이렇게 되니 그는 감금당할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려용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자세를 낮추면서 그에게 호의를 표해 그녀에게 이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양준은 은근히 려용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대화로 그는 오랫동안 궁금했던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가진 검은 책의 본래 주인이 대마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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