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4장. 약속
팔각루의 지하실 안,
양준은 마신변을 유지한 채, 마문의 힘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고마 일족의 세 지배자는 멀리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들 수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찬사의 눈빛을 보냈다. 그동안 그들은 양준의 성장을 직접 지켜보며 대마신의 후계자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려용에게는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다. 아직까지도 양준이 고마 일족에 소속감을 느끼게 할 만한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쿠웅-
커다란 소리가 전해지더니 양준을 중심으로 난폭한 힘이 폭발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세 지배자는 깜짝 놀라며 일제히 손을 뻗었다. 그들은 현묘한 기운을 내보내며 결계를 만들어 밀실을 완전히 봉쇄했다.
난폭한 기운이 결계 안에서 마구 날뛰었다. 양준은 힘겨운 얼굴로 몸속에서 폭주하는 힘을 통제했다. 한참 뒤에야 그 힘은 잠잠해졌다.
려용 무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려용은 다급히 양준의 곁으로 달려가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한참 뒤에야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그냥 좀 짜증이 나서.”
“짜증이 난다고요?”
려용은 깜짝 놀랐다. 양준처럼 침착한 사람도 짜증 날 때가 있을 줄이야.
“큰일은 아니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먼저 돌아갈게.”
양준은 한마디 던지고 다급히 떠났다.
세 지배자는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휴, 이런 온실 속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화묵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이곳에 계속 있으면 구속당하는 느낌이 들 거예요.”
한비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저견이 죽은 뒤로 세 지배자는 양준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계속 작은 소현계에 있다 보니 그가 갇힌 듯한 느낌을 받는 것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마 일족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지라 바깥 세상을 갈망했지만 이곳을 싫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양준은 달랐다. 넓은 세상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잡혀 들어왔으니 적응이 안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세 지배자는 모두 바보가 아닌지라 양준이 왜 짜증이 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오래 남겨 둘 수는 없을 것 같구나.”
려용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가서 얘기해 볼게요.”
한비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래, 다른 이유가 있나 알아보아라.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말하라 하고.”
려용이 당부했다.
한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실 안,
양준은 손에 약재를 든 채, 오래도록 정신을 가다듬지 못했다. 연단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이때, 향긋한 냄새가 그의 코끝에 전해졌다. 고개를 들고 바라보자 한비가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고민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 볼래요?”
한비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고민?”
양준은 깜짝 놀라며 미소를 지었다.
“나에게 고민할 일이 뭐가 있겠어?”
“그런데 왜 짜증이 난 거죠?”
“모르겠어.”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터놓기 싫은 모양이었다.
“말하기 싫은 겁니까?”
한비는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양준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농담을 건넸다.
“왜? 한비님께서 이제는 상담도 해주는 거야? 정말 상담을 해주고 싶다면 당신보다는 려용이 더 어울리겠지.”
“전 왜 안 되는데요?”
한비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맨날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는데 누가 당신한테 마음을 털어놓겠어?”
양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한비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건 그거고. 젊은이가 고민이 있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래도 제가 당신보다 한참 더 살았는데 인생 경험은 더 풍부할 거예요. 저도 그 나이대를 겪어 보았으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저에게 말해도 됩니다. 제가 상담 못 할 건 없어요.”
“남녀 사이의 일도 알아?”
양준이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한비는 할 말을 잃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녀는 평생 남자에게 마음을 쏟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양준이 정말 이런 일로 고민하는 거라면 그녀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소현계를 벗어나고 싶은 겁니까?”
한비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언제 그러고 싶다고 했어?”
양준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아닙니까? 결국 이곳에서 속박받는 것 같아 짜증 난 거잖아요.”
“조금은 그래.”
양준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여긴 자유롭지 않아.”
“우리가 아무리 진심으로 대해도요?”
“당신들과 상관없는 문제야. 난 해야 할 일을 못 하고 있으니까 답답한 거야. 사람들을 찾고 있거든.”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로서는 한비가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겠어요.”
한비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마세요. 오래 잡아 둘 생각도 없었어요.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이곳을 떠나도 돼요.”
“무슨 뜻이야?”
양준이 기쁜 얼굴로 물었다.
한비는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관노 어르신이 당신을 들여보낸 건 당신이 신식의 불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당신이 성급 단약을 만들어 내기를 바랐거든요. 그런데 당신의 연단 속도가 너무 빨라 소현계에 저장된 약재는 거의 소진된 상태에요. 어차피 약재가 없으면 연단하지 못할 거고, 계속해서 연단술을 익히고 싶다면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그 말을 들은 양준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줄곧 자신을 가두고 있던 족쇄가 깨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자유를 되찾은 듯한 착각도 들었다.
“기쁘죠?”
한비는 경멸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려 대인과 나, 그리고 화묵은 원래도 당신의 자유를 제한한 적이 없었어요.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으면 곧바로 내보냈을 겁니다. 당신이 우리를 의심해서 그런 요구를 말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양준은 살짝 민망했다. 그런 걱정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고마 일족이 모든 희망을 그에게 걸고 있으므로 그는 떠나고 싶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자신을 공경하고 순순히 말을 따른다고 해도, 떠나겠다고 하면 그들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비가 그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을 줄이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대마신이 선택한 후계자인 이상 저희 고마 일족은 조상의 말씀에 따라 영원히 당신을 모시고 당신의 명령에 따를 거란 걸 말해 주고 싶어요. 당신이 이걸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 일족은 아마 당신 손에서 끝장나겠죠.”
한비는 싸늘하게 말을 던지고 돌아서서 떠나갔다.
양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저견이 죽은 뒤에 세 명의 지배자가 자신을 대한 태도를 떠올리자,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진심을 다해 그를 대했지만 그는 항상 거리를 유지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앞의 공기가 일그러지더니 고마 일족의 세 지배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준은 고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뭔가를 상의한 듯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려용이 먼저 양준을 바라보며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한비 말이 좀 심했죠? 고마 일족을 생각해서 그런 거니까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한비는 뒤에서 나오며 난처한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내가 미안해. 내가 너희들의 진심을 알아주지 못했어.”
양준이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도 고마 일족 생각만 했으니 이기적이었죠. 하지만 이젠 당신 입장에서도 생각을 하려고요. 여기를 벗어나고 싶은 거죠?”
려용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세 지배자는 모두 뜨거운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한비는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고, 화묵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려용은 한결같은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을 떠나고 싶은 것도 당연한 거예요. 좋아요. 내보내 줄게요. 당신은 우리 고마 일족이 아니니 소현계의 제한을 받지 않아요. 마음대로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난 지금 가겠다고 한 적 없어.”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셋은 저도 모르게 눈을 반짝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비가 그러는데 약재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네. 진작 다 썼는데 저견에게서 잔뜩 찾아내서 지금까지 버틴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연단 속도로는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다 써버릴 거예요.”
“그럼 먼저 그 약재를 다 쓸 거야. 만들어 낸 단약도 너희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약재가 없어지면 그때 다시 나갈게.”
“그러세요. 당신이 일 년 반 동안 고생해 줘서 우리 고마 일족은 많은 단약을 얻게 되었고, 실력도 크게 향상되었어요. 그들을 대신해서 감사를 전할게요.”
려용은 웃으면서 말했다.
“별말씀을.”
“어쨌든 자신을 외부인이라고 생각하잖아.”
한비는 씩씩거리며 말했다. 방금 전에 사과하기는 했지만 양준이 떠나겠다고 하자 그녀는 여전히 화가 났다.
“약재가 없으니 내가 남아 있어도 소용없잖아. 몇십, 몇백 년 동안 약재가 생기기를 기다릴 수는 없는 거 아니야? 그건 시간 낭비야. 내가 나가서 약재를 찾아 연단할 수도 있어. 그러면 성급 단약을 만들어 내는 건 금방이야.”
양준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 연단술이 알맞은 수준에 도달하면 반드시 돌아와 너희들을 데리고 떠나겠다고 약속할게.”
세 지배자는 놀란 얼굴로 멍하니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과 흥분이 가득 넘쳤다.
“정말인가요?”
려용이 다급히 물었다.
“그럼! 난 누군가와 약속한 적이 없어. 이게 처음이야.”
양준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려용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진심을 알아챈 그녀는 눈에 이슬을 매단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한비와 화묵도 감사를 표하며 마음속의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고마 일족은 약속 내지 선조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얻어도 여전히 당신을 따를 겁니다.”
려용은 단호한 얼굴로 덧붙였다.
“이 얘기는 나중에 하자고. 일단 남은 약재를 모두 가져와.”
양준은 웃으며 말했다.
“다 가져왔어요.”
려용은 말하면서 손에 있는 허공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산처럼 쌓인 약재가 양준의 눈앞에 나타났다.
“남은 약재들이에요.”
“최대한 빨리 연단할게.”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