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7장. 생각이 바뀌었어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땅이 흔들리며 쌓인 눈이 흩날렸다. 희몽과 축영월은 미친 듯이 도망치고 있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침착하고 평온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들의 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군데군데 찢어져 허연 속살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찬바람이 스며들어오자 축영월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어서!”
희몽이 도망치며 소리를 질렀다.
“사형이…….”
축영월은 말하면서 뒤돌아보았다. 그러다 흉악한 요수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서렸다.
“죽었어. 돌아보지 마.”
희몽은 침착하게 말했지만 마음은 매우 심란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빙정늑대(冰晶狼)를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실력이 족히 7급이나 되는 빙정늑대는 온몸이 강철처럼 단단했다. 그래서 비보와 무공의 위력은 그놈의 몸에 옅은 흔적밖에 내지 못했다.
늑대는 속도가 매우 빨랐고, 발톱과 이도 매우 날카로웠다. 셋은 늑대와 만나자마자 멍해졌다. 제조는 두 여인의 눈앞에서 배가 갈린 채, 처참하게 죽었다. 그들은 이전에도 그 주변을 여러 번 다녀갔었다. 매번 무사했는데 이번에 사고가 생길 줄이야.
침착한 희몽에 비하면 축영월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죽음의 위협을 받자 그녀는 신유 경지 7단계의 실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 채, 미친 듯이 도망치기만 했다. 희몽이 수시로 비보를 사용해 빙정늑대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면 축영월은 진작에 잡혔을 것이다.
“언니!”
축영월은 울먹이며 소리를 질렀다.
“죽고 싶지 않으면 울지 마!”
희몽은 무거운 얼굴로 당부했다. 축영월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는데 그들의 앞쪽에 그림자 하나가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희몽은 눈을 반짝이며 다급히 구원을 청했다.
“앞에 있는 친구, 우리를 좀 도와줘!”
순간, 그녀는 희망을 보았다. 상대가 이렇게 겁없이 서 있는 거로 봤을 때, 빙정늑대를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문파의 선배나 동문일 수도 있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녀와 축영월은 무사할 것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앞쪽에서 경기(勁氣)가 날아들더니 정확하게 그녀의 발 아래에 떨어졌다. 상대방의 적의를 느낀 희몽은 다급히 축영월을 이끌고 발걸음을 멈췄다.
“참 공교롭군!”
비꼬는 목소리가 앞쪽에서 들려왔다.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희몽은 경계 어린 얼굴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희몽은 그만 멍해졌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축영월도 입을 틀어막고 소리를 질렀다.
“너 괜찮아?”
“내가 괜찮지 않기를 바랐나 봐?”
양준은 냉소를 하며 말했다.
“아니야, 우린 그런 적 없어…….”
축영월은 다급히 손을 저으며 조급한 표정을 지었다.
“그 남자는?”
양준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자신을 속였던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죽었어! 빙정늑대에게 죽임을 당했어.”
희몽은 축영월을 보호하며 차갑게 대답했다.
“죽었다고?”
양준은 그만 멍해졌다.
“전에는 우리가 잘못한 게 맞아. 제조는 너에게 틀린 방향을 알려 주면 안 되었고, 나도 너를 일깨워 주어야 했어. 하지만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할래?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큰일나. 쫓아오는 빙정늑대는 7급 요수야. 누구도 막지 못한다고!”
희몽이 다급히 말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어!”
이때, 슈우욱,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살기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희몽은 안색이 변하더니 다급히 돌아섰다.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이며 실을 내뿜어 등 뒤에서 공격해 오는 얼음 기둥을 막아냈다.
쿠우웅-
수많은 얼음 기둥이 부서지며 새하얀 안개가 만들어졌다. 희몽은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어깨가 얼음 기둥에 쓸려 피가 솟구쳤다.
커다란 모습이 세 사람 앞에 나타났다. 이를 드러낸 채, 흉악하게 으르렁거리는 빙정늑대였다. 늑대의 입에서는 비릿한 악취가 풍겼다. 늑대는 커다란 눈으로 희몽과 축영월을 노려보며 침을 질질 흘렸다.
빙정늑대가 덮쳐오는 순간, 양준은 하늘로 날아올라 아래쪽을 굽어보았다. 요수는 온몸이 옥처럼 투명하게 빛났고 털도 부드러워 보였다. 하지만 온몸으로 난폭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희몽과 축영월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양준 때문에 지체된 사이에 그녀들은 이미 빙정늑대의 공격 범위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죽기를 기다리느니 싸워 보기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희몽은 다급히 전류가 흐르는 비보를 꺼내 진원을 주입하고 빙정늑대를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축영월도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비보를 꺼냈다. 부채를 움직이자 바람이 칼처럼 하늘을 뒤덮으며 빙정늑대를 덮쳤다.
둘이 손잡고 공격하자 위력이 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단한 가죽으로 둘러싸인 빙정늑대에게는 간지러운 정도였다. 건장한 몸통에 불꽃이 연신 튀었지만 늑대는 무사했다. 놈은 입을 쩍 벌리고 포효했다. 그러자 얼음 기둥이 생기며 빠른 속도로 두 여인에게 날아갔다.
두 여인은 재빨리 굴렀지만 여기저기 다쳐 피를 흘렸다. 그러자 자극받은 빙정늑대는 더욱 난폭해졌다.
그녀들이 일어서기 전에 수많은 얼음 기둥이 또 날아왔다. 도망칠 데 없이 빼곡히 날아드는 공격에 두 여인은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이때, 희몽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초조한 얼굴로 하늘에 서 있는 양준을 향해 외쳤다.
“도와줘!”
양준은 차가운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를 속인 제조가 이미 빙정늑대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그를 일깨워 주지 않은 두 여인도 그와 다를 바 없었다. 그들 때문에 그는 족히 7~8일이나 낭비했던 것이다.
양준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희몽은 금세 그가 아직도 전의 일로 기분이 상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다급히 외쳤다.
“전에는 우리가 잘못했어. 널 속인 건 제조지만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어. 그렇다고 이렇게 우리를 죽게 내버려 둘 거야?”
“왜 너희를 구해 줘야 하는데? 나도 죽을 뻔했어.”
양준은 싸늘한 시선으로 방관하며 말했다.
빙정늑대가 덮쳐오자 희몽은 다급히 몸을 비켰다. 하지만 늑대의 발에 배가 긁히고 말았다. 옷이 찢어지며 새빨간 피가 배에서 흘러나왔다. 희몽은 고통에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공법을 펼쳐 늑대와 싸웠다. 축영월도 다급히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둘이 합심해도 빙정늑대의 공격은 막을 수 없었다. 요수는 그녀들의 목숨을 바로 취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마치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실력을 다 드러내지 않고 살살 공격하고 있었다. 심지어 놈의 눈에는 장난기가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7급 요수는 지능이 낮지 않았다. 자원과 조건이 충분하다면 사람으로 모습을 바꿔 요족이 될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이를 깨달은 희몽은 또다시 양준에게 도움을 청했다.
“우리는 뇌광신교의 제자야. 네가 우리를 구해 주면 돌아가서 이번 손실을 보상할게. 제조도 죽었으니 화가 풀릴 만도 하잖아?”
“뇌광신교?”
양준은 표정이 움찔했다. 어디선가 이 문파에 대해 들어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희몽은 그가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자신의 문파와 연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기대하며 물었다.
“우리 문파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미안한데 없어.”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나쁜 자식!”
희몽은 화가 나 이를 악물고 욕을 퍼부었다. 당장이라도 양준을 없애 버리고 싶었다. 원래 그녀는 양준이 속아서 고생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이 인간은 얄밉기 그지없었다.
‘설산에서 확 죽어 버릴 것이지.’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도 구해 주지 않다니.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
희몽이 소리를 질렀다.
양준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너희들을 구해 줘도 되는데, 내가 이전에 속은 것 때문에 기분이 많이 안 좋거든. 내 기분이 좋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네가 살아남는다면 내가 남자인지, 아닌지 기꺼이 보여줄게.”
말하는 사이, 두 여인은 점점 빙정늑대의 공격을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희몽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도대체 어떡해야 만족할 건데? 요구를 말해 봐. 그대로 해줄 테니!”
“난 어쩌고 싶지 않아.”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구경하는 방관자의 태도를 취했다.
희몽은 화가 나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양준의 느긋하고 평온한 모습을 보고서, 그녀는 양준에게 빙정늑대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이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적어도 그는 7급 요수의 앞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느긋하고 여유롭게 구경하는 모습을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그가 구경만 하고 나서지 않으려 하는 데에는 그녀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제발 부탁해.”
희몽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서러움과 원망이 마음속에서 피어올랐지만 꾹꾹 누르고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사형, 제발 부탁해.”
축영월도 불쌍한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며 애원했다. 눈물이 가득 고인 그녀는 겁에 질렸지만 힘들게 버티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을 본 양준은 표정이 변했다. 얼굴의 싸늘한 표정도 점차 사라졌다. 문득 축영월의 눈이 하응상의 눈과 비슷해 보였던 것이다.
양준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않았다. 희몽은 그가 끝까지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은 거라고 생각했다. 이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영월, 애원하지 마. 우리는 이곳에서 죽을 것 같아. 죽기 전에 저 자의 모습을 기억해 둘 거야. 죽어서 귀신이 되어 저 자를 따라다니며 평생 못살게 굴 거야.”
그녀는 말하면서 양준을 차갑게 흘겨보았다.
양준은 실소를 터뜨렸다.
“너 정말 악독한 여인이구나.”
“너도 똑같아.”
희몽도 지지 않고 말했다.
양준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실력으로 도망칠 수 있지 않나?”
그녀의 실력이 축영월보다 월등히 강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위험 앞에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기에 자신의 모든 실력을 발휘한다면 빙정늑대를 이기지는 못해도 도망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축영월은 달랐다. 그녀는 겁에 질려 멍청해졌는지 공격이 혼잡하고 어지러웠으며 출수도 엉망이었다. 오랫동안 보호를 받으며 살아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사람은 일반적으로 신분이 낮지 않았다.
“내가 도망치면 영월이는 어떡해? 난 너처럼 비겁하지 않아.”
희몽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꽤 의리가 있군.”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생각이 바뀌었어. 구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