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658화 (657/853)

제 658장. 우리와 함께 다니자

양준은 애초에 자신을 속였던 남자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여인 둘을 괴롭힐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상황을 알아볼 사람이 필요했다.

희몽은 그의 말에 기뻐서 소리 질렀다.

“정말이야?”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인데?”

희몽이 다급히 물었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녀는 양준이 어떤 과분한 요구를 해 오더라도 축영월을 건드리지 않으면 다 허락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몸으로 갚아야 하는 거 아니야?”

양준은 아래턱을 매만지더니 사악하게 웃으며 물었다.

희몽의 얼굴빛이 순간 음산하고 차가워졌다. 어떤 요구라도 허락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양준이 정말로 이처럼 뻔뻔스럽게 요구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분노가 들끓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가까스로 빙정늑대의 얼음 기둥 공격을 막아 내며 외쳤다.

“난 괜찮아. 하지만… 영월이는 안 돼!”

“그래?”

양준은 뜻밖이라는 듯이 희몽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냥 농담으로 던진 것이었다. 사실 두 여인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이번에 만나서 대화해 보니 두 여인은 간사하고 속셈이 있는 사람은 아닌지라 그녀들을 구해 줘도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왜 아직도 가만있어! 우리가 죽고 나면 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희몽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말하는 사이, 빙정늑대는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공격이 점점 더 포악해졌다. 그녀와 축영월의 수단으로는 더는 버텨 낼 수가 없었다. 만약 양준이 계속 보고만 있는다면 그녀들은 늑대의 밥이 될 게 뻔했다.

“알았어!”

양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느릿느릿 하늘에서 내려왔다.

커다란 요수가 멀리서부터 달려들었다. 이내 놈의 뾰족한 송곳니가 훤히 드러났고, 악취가 풍겨왔다. 축영월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녀가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서 있는데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남의 어깨 위에 얹혀 있었다. 주위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멀어졌다. 그녀는 놀란 나머지 얼른 눈을 꼭 감았다.

희몽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미처 정신을 차릴 사이도 없이 양준의 손에 들렸다. 양준이 쏜살같이 달리자 흉악한 빙정늑대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희몽은 그 와중에 뒤돌아보며 끊임없이 양준을 재촉했다.

“빨리, 늑대가 다 쫓아왔어.”

양준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참 쉽게 말하네. 이게 내 최선이야.”

희몽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빙정늑대가 점점 더 뒤처지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지나 빙정늑대는 더는 쫓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 서더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울부짖었다. 그 울부짖음에는 씁쓸함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넓게 펼쳐진 설산의 어느 한 곳,

양준은 가만히 서서 두 여인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따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눈밭에서 지내본 경험이 풍부한 듯했다. 곧이어 눈 더미에 굴이 생겼다. 굴은 안이 널찍하고 밖이 단단해 보였다.

희몽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뒤돌아보더니 힘없이 말했다.

“우린 먼저 옷부터 갈아입고 약도 좀 발라야 해. 이곳에 가만히 서 있어. 만약 훔쳐보거나 하면 그냥 눈알을 파 버릴 거야.”

“어허, 너 이제는 내 사람이야. 그까짓 거 보는 게 뭔 대수야?”

양준이 희롱하듯이 말했다.

“너……!”

희몽은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그녀는 한참이나 이를 갈고서 분노에 차 말했다.

“나는 괜찮아. 하지만 영월은 안 돼!”

말이 끝나는 동시에 두 여인은 굴에 들어갔다. 이윽고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여인이 피로 물든 옷들을 벗고 있는 듯했다.

양준은 당혹감에 빠져 안색이 어두워졌다. 문득 희몽이 전혀 후회하는 빛이 없음을 느꼈다. 만약 그녀가 정말 매달린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정말 나한테 자신을 맡기려는 건 아니겠지? 쓸데없는 짓을 했군! 왜 괜히 자신을 얽어매는 조건을 내걸었지?’

반 시진이 다 되어서야 안에서 희몽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들어와도 돼.”

양준은 씩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굴속으로 들어갔다. 굴 안은 꽤 널찍했고, 그렇게 차갑거나 습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밖에 비해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두 여인은 깨끗한 옷으로 바꿔 입은 상태였다. 양준은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제조가 앞을 막아서서 그녀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만났을 때는 그녀들이 피로 얼룩져 있다 보니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키 큰 여인은 빼어난 몸매에 아름다운 용모를, 키 작은 여인은 아담한 체구에 귀여운 용모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키 큰 미인은 불쾌한 표정으로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어린 미인은 한쪽에 웅크리고서 머뭇거리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연약한 모습이었다.

“안녕!”

양준이 인사를 건네며 두 사람의 맞은편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난 또 엄청 대단한 실력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결국 빙정늑대 앞에서 줄행랑을 놓는 거였어.”

희몽이 야릇한 말투로 비꼬았다.

전에 양준은 7급 요수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담담하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자신과 한바탕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때문에 그녀는 양준이 대단한 재주가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결국 도망치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하자 그녀는 괜히 실망스러웠다.

‘그냥 속도가 좀 빨랐던 거구나. 빙정늑대와 맞서 싸우려는 용기조차 없다니.’

“도망치든, 어떡하든 너희 둘을 구했잖아.”

양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7급 요수는 초범 경지 인간과 같았다. 만약 두 여인의 눈앞에서 요수를 죽이면 자신의 실제 전투력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양준은 그녀들의 신분과 성정을 알기 전에 모험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구해 준 건 고마워.”

희몽이 진지한 표정으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동시에 손을 내밀어 축영월을 툭툭 쳤다. 축영월은 아직 두려움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라 깜짝 놀랐다. 뒤늦게 희몽의 뜻을 알아차린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마워.”

“별일 아니니까, 괜찮아!”

“그리고 전에 그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사과할게.”

희몽은 붉은 입술을 꼭 깨물고 힘든 표정으로 말했다.

“제조가 너를 속였을 때, 우린 너한테 귀띔하려고 했었어. 하지만 네 정체나 네가 설산에 들어온 의도도 모르고, 또 네 실력도 몰라서…….”

“괜찮아. 밖에 있으면 항상 경계심을 가져야지. 그리고 그 자식도 죽었잖아. 이 일은 이쯤 넘어가자.”

양준은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희몽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눈앞의 사내가 상대하기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 보여주던 모습과는 달리 그렇게 차갑고 매정하지 않았다.

“우린 뇌광신교의 제자들이야. 난 희몽, 얘는 축영월. 넌?”

희몽은 자기소개를 끝내고 양준을 바라보며 물었다.

양준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넌 어느 세력이야?”

희몽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난 어느 문파에도 속해 있지 않고 그냥 혼자 돌아다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네 재주를 봐서는 어느 세력에서 양성한 것 같은데. 엄청 뛰어난 건 아니지만 네 정도면 무척 괜찮은 수준이거든.”

희몽이 놀라면서 말했다.

양준은 빙정늑대의 횡포한 공격에서 두 사람을 구했다. 제조의 실력으로는 그녀들을 구할 수 없었을 터였다.

‘누구의 가르침도 받지 않고 혼자 수련하는데 저렇게 대단할 수가 있나?’

“어쩌다 설산에서 길을 잃었어? 어디 가려는 거야?”

희몽이 계속해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양준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듯했다.

“실수로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나갈 길을 찾지 못했을 뿐이야.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아무튼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갈 거야.”

양준은 되는 대로 둘러댔다.

“그래.”

희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했다.

“이 설산은 구체적으로 어느 세력의 지역이 아니야. 근처에는 두세 곳의 세력밖에 없어. 우리 뇌광신교도 그중 하나야. 우리가 지금 있는 곳은 뇌광신교의 세력 범위라고 말할 수 있어. 적지 않은 제자들이 설산에 들어와 기연을 찾기도 해. 희귀한 약재나 보물을 찾을 수 있나 해서 말이야. 딱히 갈 데가 없으면 우선 우리와 함께 가자.”

양준은 그녀들을 힐끔 보았다. 희몽이 자신에게 이러한 제안을 한 것은 그에게 호감이 있거나 전에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 그녀들은 상처를 입었기에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했다.

“좋아!”

양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희몽의 표정이 풀리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며칠간 셋은 동행했다. 설산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여정이 짧지 않았다. 두 여인은 부상을 입은 탓에 속도가 빠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가끔씩 깊게 쌓인 눈 속에서 약재를 찾아 캐다 보니 적지 않은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양준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누군가 길을 안내하는 것이 혼자서 헤매는 것보다 훨씬 더 빨랐다. 이렇게 네닷새가 지나자 셋은 설산의 위험 지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참 걷고 있는데, 양준이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멀리 바라보았다. 잠깐 뒤에 그는 희몽에게 말했다.

“저쪽에서 너희 뇌광신교 사람들이 오는 것 같아.”

“정말?”

희몽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맞아. 모두 너희가 전에 입었던 황금빛 옷을 입고 있어.”

“그럼 우리 문파 사람들이 맞아.”

희몽은 축영월의 손을 꼭 쥐었다. 며칠간 팽팽했던 신경이 순간 느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축영월도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양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들에게 나 같은 외부인이 설산에 있다는 걸 들키면 좀 시끄럽겠지?”

희몽이 당황해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우리와 함께 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니, 그럼 나중에 다시 만나자.”

양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빨리 한쪽으로 날아갔다. 희몽이 미처 막을 사이도 없이, 그는 눈 깜짝할 사이 종적을 감추었다.

“어… 왜 그냥 가 버리지?”

축영월은 놀란 눈빛으로 양준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더니 섭섭해하며 말했다. 희몽은 착잡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서서 잠깐 생각하더니 문득 이를 갈며 말했다.

“나쁜 자식, 여태껏 날 속였잖아. 괜히 속만 태웠어.”

“뭘 속였는데?”

“저 자식이 몸을 허락해야 한다고 해서 난 또…….”

희몽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이제 보니 양준은 그냥 농담을 던진 것이었다. 그가 정말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이렇게 가 버릴 수가 없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언니, 혹시 정말 좋아하는 거야?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쫓아가 봐.”

축영월이 웃으면서 그녀를 놀렸다.

“무슨 허튼소리야!”

희몽이 입을 삐죽거렸다. 며칠간 동행하면서 희몽은 양준이 전처럼 그렇게 밉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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