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668화 (667/853)

제 668장. 바람의 눈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나를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포섭하겠다는 거야? 지금은 어떤 요구도 다 승낙할 수 있지만, 이곳을 떠나는 순간 언제든지 번복할 수 있거든.”

“맞아요. 그래서 제가 당신이 약속을 지키게 노력해야죠. 저는 뇌광신교의 제자예요. 저를 탓하지 마세요.”

희몽이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양준은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는 희몽을 탓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희몽은 적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는 적에게 자비로운 적이 없었다.

양준의 차가운 태도를 알아차린 희몽은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왜 그리 고집을 부리세요? 단 장로님께서 무엇을 얻으려는지 모르지만 당신이 협조하면 절대 홀대하지 않을 거예요. 지금도 당신을 감금했지만 괴롭히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았어요. 그분의 성의를 알 수 있잖아요.”

“맞아. 아주 성의가 넘치지.”

양준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좀 타협하면 안 되나요? 당신만 타협하면 당신도, 단 장로님도, 저도 모두 좋을 거예요.”

희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권유했다.

“너한테도 좋은 점이 있어? 단해가 여러 조건을 약속했나 봐?”

양준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희몽은 대답하지 않고 품 속에서 비취색의 옥으로 된 병을 꺼내 마개를 열었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하얀 안개가 병에서 퍼져 나왔다. 희몽이 가볍게 불자 안개는 빠르게 지하 감옥으로 흘러 들어와 양준의 주위를 자옥하게 채웠다.

양준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안개는 그의 모공을 통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은연중에 어딘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혈액 순환과 심장 박동이 빨라지며 머릿속에서는 심지어 음탕한 소리가 떠올랐다.

희몽이 상기된 얼굴로 설명했다.

“이건 강한 최음제예요.”

“지금 뭐 하려는 거야? 강제로 나를 취하려는 거야?”

양준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꽃같이 예쁜 여인이 사내에게 최음제를 쓰다니. 참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래요. 단 장로님께서는 제가 당신의 아이를 가지면 당신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고 했어요.”

희몽이 은근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양준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금세 단해의 사악한 심보를 눈치챘다. 단해는 자신이 양준을 제어할 수 없게 되자 이런 더러운 수단을 동원한 것이었다. 아무리 독한 사람이라도 제 새끼는 예쁜 법이다. 만약 양준의 자식이 생기고 그 자식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면 양준은 얌전하게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기다리는 시간은 길어지겠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잠깐 뒤, 양준의 주위에 자욱했던 안개가 모두 그의 몸속에 흡수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양준의 눈동자가 빨갛게 달아오르며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는 뜨거운 눈빛으로 감옥 밖의 희몽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은 짙은 공격성을 띠고 있었다.

양준이 이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자 희몽은 저도 모르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녀는 온몸을 비비 꼬았지만 크게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약 기운이 퍼지기를 기다렸다.

“너 날 좋아해? 자신의 평생을 나한테 맡기려는 거야?”

양준은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으며 차갑게 희몽을 바라보았다.

“좋아한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희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린 아직 익숙하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에게 나를 맡기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인 것 같아요. 당신은 연단사인 데다가 앞날이 창창하잖아요. 전 뇌광신교의 일반 제자일 뿐이에요. 두각을 나타내려면 남자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어요.”

“그건 너만의 생각이야. 설령 내가 너를 품었다 하더라도 앞으로 너를 잘 대해 주지 않을 테니까. 너한테 손찌검을 할지도 몰라.”

희몽은 흠칫하더니 암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운명에 맡길 거예요.”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군!”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호감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젠 약 기운이 퍼졌겠죠?”

희몽은 얇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더니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단 장로님, 문 좀 열어 주세요.”

감옥 문에 빛이 반짝이더니 주위의 금제가 순식간에 해제되었다. 희몽은 문을 열고 들어와 양준 앞에 다가가더니 몸을 수그리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사람을 취하게 하는 향기가 퍼지고 여인의 기운에 영향을 받아 양준은 폭발할 조짐을 보였다. 눈동자에는 야수 같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희몽은 두려웠지만 마음속 불편함을 억누르고 눈을 감고서 양준에게 붉은 입술을 내밀었다. 호흡이 흐트러진 가운데 희몽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얼굴은 온통 붉게 타올랐다.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희몽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번쩍 떴다.

양준이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죄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는 눈동자가 맑고 호흡이 평온했다. 방금 전 최음제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냉혹한 표정을 하고서 혐오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스스로 자신을 아껴야 해.”

양준이 차갑게 한마디 했다.

희몽은 발버둥 쳐서 겨우 양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는 서둘러 감옥에서 빠져나갔다. 그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제가 그동안 당해 온 유혹술이 수두룩합니다. 그깟 최음제로 저를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단 장로님, 수단이 참 비열하시군요.”

양준이 허공의 한 곳을 지켜보며 냉소를 흘렸다.

지하 감옥 밖,

신식으로 안의 움직임을 탐지하던 단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양준, 난…….”

희몽은 입만 벌름거리며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양준은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희몽은 얼이 빠진 듯 한참 동안 갈등하다가 얼굴을 감싸 쥐고 떠나갔다.

“정말 기이한 일이네요. 저 최음제는 제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것이라 초범 경지 무인도 당해 내지 못하는데, 저 자는 어떻게 무사한 걸까요?”

허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단해는 표정이 흐려졌다. 그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처럼 아무 방법도 통하지 않는 양준을 두고, 그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아니면 저 자식을 바람의 눈(風眼) 쪽으로 데리고 가면 어떨까요?”

허기가 낮은 목소리로 제안했다.

“바람의 눈? 바람의 힘을 이용해 신혼을 끌어내려는 것인가?”

단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물었다.

“맞습니다.”

허기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저 자를 굴복시킬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그렇다면 저 자의 신혼을 얻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우선 저 자에게는 관을 멘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있지요. 그리고 신식의 불꽃을 보존했다가 인연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 흡수하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우리 문파의 제자가 행운이 닿아 그의 신식의 불꽃을 흡수할 수 있다면…….”

단해는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자세히 생각해 보니 허기의 방법이 그럴듯해 보였다. 계책이 생기자, 단해는 더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거로 하지. 그런데 바람의 눈의 힘을 이용하려면 교주께 보고해야 하네.”

“일이 성사된 다음, 다시 보고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교주께서도 반드시 기뻐하실 거예요.”

“알겠네. 자네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게나. 잠시 뒤에 저 자를 데리고 가겠네.”

단해가 손을 저었다. 허기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흥분된 표정으로 날아갔다.

단해는 지하 감옥 밖에서 잠깐 생각한 다음에야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다짜고짜 양준을 손으로 잡아들었다. 양준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이처럼 호의를 무시하다니. 그럼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게나.”

단해는 바람의 눈 쪽으로 날아가는 한편, 양준에게 말했다.

양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금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우리 뇌광신교의 근본이라 불릴 수 있는 몇 곳이 있다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은 그중 한 곳으로, 바람의 눈이라고 하지. 바람의 기운이 내재되어 있다네. 문파 내 바람 속성 공법과 무공을 수련하는 제자들은 모두 그곳에서 수련하면서 깨달음을 얻지. 그곳 외에 우레의 눈(雷眼)이라는 곳도 바람의 눈과 거의 비슷한 곳이네. 나조차도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네. 그런 힘은 인간이 막아 낼 수 있는 게 아닐세. 바람의 눈에서는 설령초범 경지 3단계 무인이라도 신혼이 끌려 나오게 되어 있지.”

양준은 순간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지금 후회해도 늦지 않았네. 희몽과 아이만 낳는다면 자네를 뇌광신교의 사람으로 인정해 줄 것일세. 앞으로 꼭 홀대하지 않고 예우를 다할 것이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단해는 마지막으로 설득하려고 애썼다.

“싫습니다.”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숨을 가다듬으며 지금 마신변을 시전해 단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를 궁리했다. 하지만 남의 문파라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일단 실패하면 더는 시도할 기회가 없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문득 사방에서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는 바람의 기운이었다. 그동안 느껴 본 적이 없는, 짙고 방대한 기운이었다. 이때, 등 뒤 견갑골에서 심한 통증이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기쁨과 흥분감이 동시에 전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낯빛을 가다듬고 얼른 마음속 생각을 억누르며 멀리 바라보았다.

멀리 허공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변화무쌍한 바람의 기운이 천지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갈수록 바람의 기운은 점점 더 짙어졌다.

“참 장관이지 않나? 이곳에 바람의 눈과 우레의 눈이 있기에 우리 뇌광신교가 이곳에 뿌리를 내린 것이네. 이곳은 우리 문파의 금지 구역이라고 할 수 있지. 허락받은 일부 제자를 제외하고, 누구도 이곳에 발을 내디딜 수 없네. 이곳에서 수련하는 제자들은 수련 효과가 배가 될 수 있다네.”

단해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 차 있었다.

양준은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한 천지조화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는 결코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우연히 천지간의 기운이 이곳에서 방출된 것이었다.

말하는 사이, 두 사람은 빠르게 소용돌이와 가까워졌다. 허기는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단해가 양준을 데리고 온 것을 보자 그는 흥분해서 말했다.

“제자들은 모두 내보냈습니다. 지금 시작하시죠.”

단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양준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네. 바람의 눈에 들어가는 순간, 자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네.”

“더 말할 필요 없습니다.”

양준이 피식 웃었다.

“죽음을 자초하는군.”

허기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단해는 심호흡을 하고서 말했다.

“그렇다면 들어가게나.”

단해는 말하면서 양준을 데리고 빠른 속도로 앞쪽으로 날아갔다. 곧 두 사람은 바람의 눈 근처에 접근했다. 단해처럼 높은 경지의 사람도 진원을 돌려 바람의 눈의 살상력과 흡입력을 막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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