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5장. 비우
천소종은 거석성을 중심으로 한 근처 4대 세력 중 하나였다.
4대 세력이라고는 하나, 사실 다른 세 곳은 천소종과 비교할 수 없었다. 저력이나 고수의 경지로 따지면 천소종은 다른 세력보다 훨씬 앞섰다. 고월동천, 라생문, 뇌광신교에는 입성 경지의 고수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천소종에는 입성 경지 고수가 두세 명 정도 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입성 경지 고수 아래로 초범 경지 3단계 고수도 네 명 있었는데, 다들 널리 알려진 이들이었다. 네 명 모두 강력한 수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창염도 그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내막을 잘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 천소종은 다른 세 곳의 세력과 엇비슷했다. 천소종에는 제자가 많지 않아 뇌광신교 같은 세력보다 인원수가 적었다.
양준은 창염과 함께 날면서 천소종의 상황을 쉬지 않고 물었다.
창염은 과묵한 편이었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지만 양준의 질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동시에 그 역시도 양준을 살펴보았다.
반나절 뒤, 천소종에 가까워지자 창염은 발걸음을 멈추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앞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곧 강력한 기운이 빠른 속도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기운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파동은 아주 강했는데 창염보다 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압박감은 창염의 것과 다르게 강물처럼 부드러웠다.
양준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묻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파란 빛이 신속하게 가까워지더니 창염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파란 빛이 사라지고 옷을 과감하게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피부가 하얗고 눈에 물기가 촉촉해 애절한 느낌을 풍겼다. 그리고 입가에 있는 작은 점이 그녀의 요염함을 한층 더해 주었다.
양준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힐끔힐끔 보았다. 여인은 꺼리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요염한 얼굴에 흥미로운 표정을 띠고서 양준을 훑어보았다.
창염은 미간을 찌푸렸다.
“비우(绯雨), 어떻게 나온 거야? 조사님이 널 가둘 때 반년 뒤에야 나올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설마 도망친 거야?”
“나 도망친 거 아니야.”
비우는 입을 삐죽였다. 그러다 갑자기 양준에게 다가가서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양준의 턱을 치켜올렸다.
“이 총각은 어디 사람이지? 왜 이렇게 낯설지?”
양준은 괜히 소름이 돋았다.
창염은 재빨리 양준을 자신의 뒤로 숨기고 비우를 가로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소란 피우지 마. 조사님이 찾는 사람이야.”
“조사님이 찾는 사람이라고? 조사님이 얘를 왜 찾는데?”
그 말에 비우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나도 몰라.”
창염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네 장난감은 아니야.”
“알았어.”
비우는 짜증이 난 얼굴로 입을 삐죽거렸다.
“넌 천소종에 얌전히 있지 않고 여긴 왜 온 거야?”
“조사님이 나오라고 한 거거든. 그분의 명령 없이 내가 나올 수 있겠어?”
비우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조사님이 나에게 벌을 면할 기회를 주셨어. 내가 이번 일을 잘 해결한다면 반년 동안의 감금은 없던 일로 해주신대.”
“무슨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창염은 호기심이 동해 한마디 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뺨을 철썩, 때리더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안 물은 거로 해. 나 먼저 돌아갈게. 넌 알아서 해.”
“가지 마! 네가 물었으니 대답할게.”
비우는 창염의 팔을 잡고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는 창염이 원하든 말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천소종에서 백 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제자 한 명이 수련하다가 동굴을 발견했다. 안에는 금제가 걸려 있었고 영기가 가득했는데, 오래전에 어떤 고수가 남겨 놓은 보물 창고인 것 같았다. 이에 그 제자는 문파의 사형제들을 불러 열 명이 넘게 합심해 겨우 금제를 풀 수 있었다. 신이 난 그들은 안에서 기연을 찾기 위해 곧바로 들어갔지만, 안에는 숨겨진 함정이 또 있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은 방심한 탓에 모두 서혼지충(噬魂之蟲)이라는 고대 벌레에 당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알게 된 종주는 비우에게 이 일을 처리하라고 한 것이었다.
“서혼지충? 이미 멸종된 거 아니었어?”
창염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누가 알겠어? 어느 비열한 자식이 우리 천소종 근처에 이런 곳을 만들어 놨는지. 그놈의 시체를 찾으면 갈기갈기 찢어 놓겠어.”
“어떻게 처리하려고? 그건 일반인이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너도 거기서 죽을 수 있다고.”
“그러게.”
비우는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나 좀 도와줘.”
“내가 어떻게 도와줘? 나도 서혼지충을 대처할 방법이 없어.”
“넌 화성 공법을 수련했잖아? 그것들을 태워 죽이면 되지 않을까?”
“진원의 불로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생각이 없는 거 아니야?”
창염은 코웃음을 쳤다. 그러다 양준을 힐끗 보더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너 말고 날 도와줄 사람이 없단 말이야. 역완(力丸)이랑 비전(飛箭)은 내가 이런 일을 맡은 걸 알고 피하기 바쁘다고. 정말 너무 얄밉지?”
비우는 이를 악물며 경멸 어린 말투로 말했다.
“나도 널 피했어야 했어.”
창염은 머리가 아팠다. 이런 일인 줄 알았다면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비우와 오랫동안 함께하면서도 항상 그녀의 겉모습에 속아 함정에 걸려들곤 했다.
“이미 늦었어.”
비우는 창염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넌 무조건 날 도와줘야 해.”
창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번엔 정말 안 돼. 이 녀석을 데리고 조사님 뵈러 가야 해.”
“이미 두 달이나 끌었잖아. 나랑 잠깐만 가서 보고 오면 돼. 정 안 될 것 같으면 나도 억지로 몰아붙이지 않을게.”
창염은 미간을 찌푸렸다. 고민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비우는 그를 끊임없이 설득했다.
한참 뒤에야 창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 번 도와줄게. 하지만… 안 될 수도 있어.”
비우는 크게 기뻐하며 연신 아부했다.
“네가 최고야. 역완과 비전은 확 죽어버리라고 해.”
“하지만 나도 요구가 있어.”
“뭔데?”
창염은 목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오십 년 전에 네가 천홍화양(千紅花釀) 술을 빚은 거로 기억하는데.”
비우는 안색이 변하며 이를 악물었다.
“오십 년 전의 일도 기억하고 있어?”
“좋은 건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창염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일이 성사되면 나한테 절반 줘.”
“안 돼. 그 술은 내가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렵사리 천 가지 영화(靈花)를 수집해 빚고, 오십 년 동안 기다린 거란 말이야. 나도 아까워서 한 모금도 안 마신 걸 절반을 나눠 달라고 해? 정말 역완이나 비전보다 더 얄미워! 이럴 거면 네 도움 필요 없어.”
양준은 놀란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천홍화양이라는 술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히 여기는 것 같았다.
“너 스무 항아리 있잖아. 나한테 절반 준다고 해도 열 항아리나 남아.”
“한 항아리밖에 못 줘. 더는 꿈도 꾸지 마.”
“여덟 항아리!”
“한 항아리!”
“다섯 항아리!”
한참 옥신각신 다툰 끝에 창염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
“한 항아리로 해, 그럼.”
“그것도 네가 이번 일을 해결하는지 봐야지. 네가 도움이 안 된다면 한 모금도 안 줄 거야.”
비우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고는 양준을 흘겨보며 말했다.
“넌 왜 웃어? 이게 우스워?”
“아니요, 그냥 재미있어서요.”
양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두 초범 경지 3단계 고수의 다툼에서 그들 사이에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왠지 덩달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는 오랫동안 이런 감정을 느껴 보지 못했다. 통현대륙에 온 뒤로 그는 항상 혼자였다.
“가자, 그곳이 어디야?”
조건 협상을 마친 창염은 더는 시간을 허비하기 싫었다.
“따라와.”
비우는 말을 마치고 앞장서서 날아갔다.
여인이 엉덩이와 허리를 실룩이며 나는 모습은 아주 요염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하얗고 긴 목이 드러났다.
“보지 말게. 자네 눈알을 파버릴 수도 있네.”
창염이 양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그렇게까지 합니까?”
양준은 깜짝 놀랐다.
“지난번 라생문에서 한 장로가 몇 번 더 봤다고 그녀에게…….”
창염은 말하면서 손을 뻗어 양준의 사타구니 쪽을 확 내리치는 동작을 했다. 양준은 안색이 흐려졌다.
“그래서 조사님이 쟤를 감금한 거야. 쟤가 저렇게 방탕해 보여도 사실은 숫…….”
창염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먹이 날아왔다. 무방비 상태로 있던 창염은 주먹에 맞아서 백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비우는 공중에 서서, 싸늘한 얼굴로 나가떨어진 창염을 보며 호통쳤다.
“내가 귀머거리로 보여?”
양준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괜히 창염이 걱정되었다.
“총각, 이리 와. 누님이 데려갈게.”
비우는 갑자기 웃는 얼굴로 양준에게 손짓했다. 그러고는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양준을 진원으로 감싼 채 앞으로 날아갔다.
“저 녀석의 헛소리 듣지 마. 쟤는 날 헐뜯기만 해.”
비우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몇 번 더 보는 건 괜찮아. 너를 괴롭히지 않을게. 난 아주 착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