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1장. 기수봉
비우가 향한 곳은 참 아름다운 산이었다. 산 정상에서는 폭포가 은하수같이 쏟아지며 물안개가 자옥해 대자연의 상쾌함이 느껴졌다. 비우는 양준을 데리고 흘러내리는 폭포를 지나쳐 산허리에 있는 산굴 앞에 도착했다. 양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긴장을 푼 뒤 감지해 보았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긴 기수봉이라고 내가 사는 곳이야. 우리 네 호법은 모두 자신만의 산을 가지고 있어. 그들이 있는 곳은 아주 떠들썩해. 하지만 난 시끄러운 것을 싫어해서 홀로 여기서 살아. 따라와.”
말을 마친 비우는 양준을 데리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내부는 널찍했으며 건조하고 깔끔했다. 안의 석실들은 산을 깎고 다듬어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는데 벽 곳곳에는 빛을 내뿜는 신비한 돌들이 잔뜩 박혀 있었다. 이곳에는 나쁜 냄새는커녕 은은한 향기까지 감돌았다.
양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우처럼 술을 좋아하는 여인은 여자다운 모습이 없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 그의 그녀의 거처는 매우 정결했다.
“사질, 앞으로 이곳에서 함께 살자. 나 혼자 외로워.”
비우는 갑자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저더러 여기서 살라고요?”
“그래, 전에 널 산골짜기에 둔 건 네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야. 너도 우리 천소종의 제자인 셈이니 산을 선택해 살 권리가 있어. 그리고 너 연단하려면 이렇게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 좋지 않겠어? 여기 꽤 괜찮아. 창염이나 다른 애들이 사는 곳은 매일 드나드는 사람이 있어 아주 시끄러울걸.”
“여기 조건이 좋긴 하네요.”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잘 생각해 봐. 난 진지하니까.”
비우는 생긋 웃었다. 홍조가 낀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과일 같았다.
두 사람은 산허리에서 이리저리 돌다가 드디어 텅 빈 공간에 이르게 되었다. 말로는 그들이 뻔뻔스럽게 자신의 술을 노린다며 투덜거렸지만 정작 이곳에 이르자 비우는 열정적으로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녀는 탁자와 의자를 배치하고 직접 담근 술인 천홍화양을 몇 항아리 꺼내 놓았다. 그리고 또 진귀한 영과도 푸짐하게 준비해 두었다.
준비를 마치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서 급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곧 창염과 역완, 그리고 키가 크고 깡마른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술 향기를 맡은 것 같아.”
역완은 짙고 두꺼운 눈썹을 꿈틀거리며 코를 벌름거렸다. 창염은 양준이 본 적 없는 요수를 메고 씩씩하게 걸어왔다. 탁자에 놓인 술 항아리를 확인한 둘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우는 참 좋은 여인이야.”
비우는 낯빛이 차가워지더니 버럭 화를 냈다.
“한 명당 한 항아리야. 다 마시고 꺼져.”
“알았어, 알았어!”
역완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술 항아리 하나를 안고서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다.
양준은 몰래 깡마른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 사람은 천소종에 있는 네 명의 고수 중 마지막 한 명으로서 똑같이 초범 경지 3단계였다. 하지만 창염에게서 압박감을, 비우에게서 부드러움을, 역완에게서 괴상함을 느꼈던 것과 달리, 민감한 양준은 그 사람에게서 더없는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그도 양준을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새로 온 사질인가?”
그의 웃는 모습에 양준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에게는 커다란 뻐드렁니가 있었다. 역완이 충분히 못생긴 줄 알았는데 눈앞에 있는 비전과 비교하면 역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천소종의 두 고수는 아주 특징이 뚜렷했다.
“양준이 사숙을 뵙습니다.”
양준은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비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활을 당기는 자세를 취했다.
슈욱-
이내 천지가 살짝 진동하는 듯하더니 주변의 영기가 한순간 정체되었다. 양준은 본능적으로 실눈을 떴다. 순간, 독사에게 겨냥당한 듯한 위기감이 몰려왔다.
창염, 비우, 역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는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비전의 손가락이 움직이자 슉 하는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공격이 양준에게 날아왔다.
양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순간 그의 진원이 거세게 내뿜어지며 묵직한 주먹을 앞쪽으로 내뻗었다.
쿠웅-
기운이 어지러워지고 진원이 난폭하게 날뛰었지만 양준의 신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 명은 눈앞이 밝아졌다. 비전은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괜찮군. 창염이 네 실력이 일반적인 신유 경지 무인보다 훨씬 강하다고 했거든. 믿지 않았는데 지금 보니 우리 천소종에 기둥이 될 만한 인물이 또 한 명 늘었구나.”
“사숙께서는 활을 사용하십니까?”
양준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비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이때, 비우가 다가오더니 몰래 양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얘는 음흉한 놈이야. 절대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 어두운 곳에 몰래 숨어서 공격하지. 그럼 그의 날카로운 화살을 피할 사람이 없거든. 음험하게 사람을 해치고 싶다면 쟤한테서 많이 배워.”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비전이 방금 전 선보인 공격은 떠보는 것에 불과할 뿐, 악의나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양준에게는 버거운 공격이었다. 천소종의 네 호법은 모두 얕보아서는 안 될 인물이었다.
“외모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법이지.”
비우는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봐, 말 조심해.”
역완이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됐어, 됐어.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자고. 천홍화양을 오십 년이나 기다렸단 말이야. 어서 마시자고.”
창염은 앞으로 나가서 술 한 항아리를 잡고 입구를 봉했던 진흙을 걷어내더니 한 입 크게 마셨다. 그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홍조가 돌았다.
“좋은 술이야.”
그가 호탕하게 술을 마시자 역완과 비우도 참지 못하고 다급히 술을 마셨다.
양준은 옆에 앉아 영과 한 알을 들고 천천히 먹었다. 사람들의 호방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속으로 따뜻한 기분이 들었다. 네 사숙은 사이가 아주 돈독했다. 가끔씩 다투기는 하나, 모두 형제 자매들 사이의 투닥거림 정도였다.
한바탕 술을 마시고 나자, 네 명은 각자 추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더는 초범 경지의 고수다운 품위가 보이지 않았다. 비우의 얼굴에는 홍조가 드리웠다. 그녀는 게슴츠레하게 양준을 힐끗 보더니 자신의 술 항아리를 던져 주며 미소를 지었다.
“사질, 너도 마셔 봐.”
술을 받아 든 양준은 그녀를 힐끗 보고 호방하게 입안에 부어 넣었다.
술은 독한 느낌이 없이 입안으로 들어가자 부드럽고 향긋한 냄새가 가득 맴돌았다. 그러나 양준이 찬사의 말을 내뱉기도 전에 아랫배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더니 곧이어 활활 타올랐다.
양준은 안색이 변했다. 온몸의 피와 살, 경맥이 모두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보이지 않는 충격이 몸속 이곳저곳에 가해졌다. 순간, 그의 몸은 말을 듣지 않고 뻣뻣해지더니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비우는 재빨리 양준에게서 술 항아리를 빼앗아 갔다. 네 명의 초범 경지 3단계 고수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폭소를 터뜨렸다.
한참 웃은 네 사람은 양준을 잊고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누구도 양준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양준이 다시 깨어났을 때, 주변은 적막만 감돌았다. 다른 세 사람은 이미 간 듯했다. 엉망진창이 된 연회장에서 비우만 옆의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녀는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 몽롱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깼어?”
비우가 웃으면서 물었다.
양준은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만 끄덕였다.
천홍화양이 그리 독할 줄이야. 술 맛이 강하지 않았으나 안에 담긴 기운은 어마어마했다.
“괜찮아?”
“아주 좋습니다.”
한참 감지해 본 양준은 진원이 몸속에서 빠른 속도로 흐르며 피와 살, 경맥도 전보다 더 단단해진 것을 발견했다.
“그럼 됐어. 네게 준 천홍화양 말이야. 한 달에 아무리 많아도 세 모금을 넘기지 마. 많이 마시면 몸에 안 좋아. 난 잘 테니 넌 알아서 해.”
비우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 참, 다름 애들한테 앞으로 넌 기수봉에 묵을 거라고 말했어. 그들이 네가 연단할 약재를 가져올 거야.”
“알겠습니다.”
양준이 대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우는 눈을 감았다. 오똑한 코에서 고른 숨결이 전해졌다. 그녀는 여태까지 억지로 잠을 쫓으며 그를 지키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양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몸속에 남은 약 기운을 모두 흡수한 다음에야 일어서서 가득 널려 있는 쓰레기를 치웠다.
두 시진 뒤, 비우는 천천히 잠에서 깼다. 그녀는 양준 앞에서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기지개를 쭉 켠 다음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그러자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따라와. 너에게 수련하기 적합한 곳을 찾아 줄게.”
비우는 양준을 손짓해서 부르고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영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
얼마 가지 않아 반짝반짝 빛나는 석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석실은 사방의 벽과 바닥 모두 정석이 깔려 있었다. 정석에서는 진법 문양이 은은하게 나타날랑 말랑 했는데 그 영향인지 천지 영기가 끊임없이 석실 안으로 흘러들었다. 그곳에서 양준은 아늑하고 편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천지의 기운이 끊임없이 몸으로 흘러들어 실력을 키워 주는 것만 같았다.
이곳은 수련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양준은 신식으로 감지해 보았다. 그
제야 석실에 깔린 정석이 한 층이 아니라 최소한 열몇 층 정도며 두께가 무려 1, 2장에 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석을 이렇게 많이 사용해 석실을 만들다니. 참 통이 크군.’
멍하니 눈앞의 석실을 바라보던 양준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 어때?”
비우가 물었다.
“사숙께서 평소 수련하는 곳이죠?”
석실 중앙에 누군가 오랫동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련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제가 여기를 사용하면 사숙은 어찌합니까?”
“난 당분간 안 써.”
비우는 웃으며 말했다.
“입성 경지의 현묘함을 깨달을 때에야 쓸 일이 있겠지.”
비우와 다른 세 명은 진작 초범 경지 3단계의 정상에 도달했지만 입성 경지의 현묘함을 깨닫지 못해 경지의 속박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입성 경지로 진급하지 못했던 것이다. 네 호법이 모두 입성 경지에 오른다면 천소종의 실력은 한층 더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부담은 가지지 않아도 돼. 석실을 그냥 놔두기도 아깝잖아.”
비우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이곳에서 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수련에만 몰두해. 심심하면 나와서 날 찾아도 되고. 난 보통 기수봉에 있어. 날 보지 못하면 창염이나 다른 애들을 찾아가도 돼. 그들도 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거야.”
비우는 그렇게 당부한 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