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6장. 부운성
천소종을 떠난 지 한 달이 다 되어서 일행은 드디어 통현대륙의 중립 지대에 도착했다. 중립 지대는 인간, 요족, 마족 세 종족이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이는 다른 곳에서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양준은 공기 중에서 맴돌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이곳에서는 그에게 익숙한 마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또 다른, 익숙지 않은 기운은 아마도 요기(妖氣)인 것 같았다. 마기와 요기는 인류의 고수가 흡수할 수 없지만 마족과 요족에게는 꼭 필요한 영양분이었다.
중립 지대에 들어서자 창염 일행은 더욱 경계를 높였다. 중립 지대는 그 어떤 곳보다도 혼란스러웠다. 조금만 조심하지 않으면 큰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또 며칠 더 가서 일행은 드디어 높게 솟은 산봉우리를 보게 되었다. 산봉우리 아래로 몇십 리 되는 곳에 성곽이 있었다. 바로 일행의 목적지인 부운성(浮雲城)이었다.
창염의 발걸음은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반나절 뒤, 그들은 부운성에 도착했다.
충분한 정석을 납부한 뒤, 일행은 성안으로 들어갔다. 양준은 창염 일행의 경계가 많이 풀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만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안에 들어서면 큰 위험은 없네. 부운성은 인간, 요족, 마족이 같이 관할하고 있다네. 성주는 입성 경지의 고수만 맡을 수 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곳에서는 방자하게 굴지 못할 걸세.”
“그럼 성주는 무슨 종족인가요?”
양준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나도 잘 모르겠네. 부운성은 삼 년마다 성주를 한 번씩 바꾸는데, 세 종족의 고수들이 대련을 통해 선발한다네. 바로 이 때문에 부운성이 조용한 거지. 한 종족이 독차지한다면 다른 두 종족은 자리가 없을 걸세.”
창염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로 지금의 성주는 마족이야. 걱정하지 마. 세 종족의 안정과 연관된 일이기 때문에 성주도 함부로 나서지 못할 거야. 중립 지대가 혼란스러워진다면 대륙 전체가 혼란스러워질 테니까.”
“나와 미나는 이곳의 연단사 협회에 갈 건데, 창염 자네들도 같이 가지 않을 텐가?”
두만이 물었다.
“우린 됐네.”
창염은 고개를 저었다. 연단사들은 콧대가 높기로 유명했다. 그들은 천소종이든, 뭐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연단사 협회에 들어가면 좋은 소리도 듣지 못할 텐데 창염의 성격으로 싸움을 벌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두만의 입장이 난처해질 터였다.
창염이 양준을 보며 말했다.
“사질이 가고 싶다면 두 장로와 같이 가. 시간이 되면 내가 찾으러 갈게.”
미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래. 넌 연단사니까 우리랑 같이 가도 돼.”
그녀는 양준과 함께하면서 그에게서 연단술을 배우고 싶은 눈치였다.
“계집애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혹시 우리 사질을 좋아하는 거 아니야?”
비우가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
미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왜 저 나쁜 놈을 좋아해요?”
양준은 실소를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 그냥 사숙들과 함께 있을게요.”
두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강요하지 않겠네. 자네 이리로 와 보게.”
그는 양준에게 손짓했다. 이에 양준은 의아한 얼굴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두만은 미소를 짓더니 거울집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이건 예전에 얻은 것인데 이번에 사용하면 좋을 것이네. 음, 빠를수록 좋다네.”
“이게 뭡니까?”
양준은 의아한 얼굴로 손에 든 거울집을 훑어보았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네.”
두만은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미나를 데리고 연단사 협회 쪽으로 걸어갔다.
두만이 떠나자 창염이 말했다.
“가자, 머물 여인숙을 찾자고.”
비우는 양준의 곁으로 다가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두 장로가 네게 뭘 준 거야?”
“저도 몰라요.”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여인숙에서 창염은 방 두 개밖에 얻지 못했다. 부운성의 여인숙은 곧 필 천년마화 때문에 손님이 꽉 찼던 것이다. 방 두 개도 여인숙 주인이 어렵사리 비워 낸 것이었다.
상의를 거친 뒤, 비우가 양준을 데리고 한 방을 쓰고 나머지 셋이서 한 방을 쓰기로 했다. 양준은 비우와 지내는 데 익숙해져서 불만이 없었다. 비우는 여인이었지만 사숙과 사질의 사이이므로 양준은 다른 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손에 거울집을 들고 가부좌를 틀고 앉은 양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부운성에 들어서자마자 두만이 이런 것을 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열어 봐. 나도 두 장로가 너에게 뭘 줬는지 궁금해.”
비우가 웃으면서 말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거울집을 열려다가 갑자기 픽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숙들도 들어오시지요.”
옆방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역완과 비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역완은 숨을 들이쉬더니 짐짓 엄숙하게 말했다.
“사질이 사숙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는군. 내가 가서 혼내 주고 와야겠어.”
비전도 그 뒤를 따랐다. 창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하는 수 없이 따라왔다.
사람들은 방 안에 모여앉아 양준의 손에 든 거울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다들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들의 주목을 받으며 양준은 거울집을 열고 안에서 매미 날개처럼 얇은 무언가를 꺼냈다. 그 물건은 무슨 재료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촉감이 차가웠다. 그리고 특정된 곳에는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었다. 얼핏 보면 사람의 얼굴에서 벗겨낸 가죽처럼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였군!”
창염이 감탄했다.
“두 장로는 참 섬세해.”
“외모를 바꾸는 건가요?”
양준도 이것의 효용을 알아보았다.
“써 봐.”
비우가 재촉했다.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자신의 얼굴에 덮었다. 그러자 무언가 얼굴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내 차가운 것이 피부에 스며들며 시원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숙들의 표정을 보니 이걸 쓰기 전후의 변화가 꽤나 큰 것 같았다.
“이건…….”
역완은 입을 떡 벌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전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게 많이 달라졌어요?”
양준이 웃으며 물었다.
“너 스스로 봐!”
비우는 손을 휘둘러 양준의 앞에 물로 된 거울을 만들어 주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 양준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거울에 나타난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게다가 분위기도 그와는 전혀 달랐는데 여인처럼 피부가 하얀, 준수한 모습이었다.
“기생오라비 아니에요?”
양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자신의 얼굴을 꼬집었다. 그러자 거울에 비친 사람도 그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했다.
“대단해!”
창염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비보는 정말 대단하군. 네 얼굴뿐만 아니라 생명의 기운까지도 달라졌어.”
“이것만 있으면 네 신분이 들통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비우도 생긋 웃으며 말했다.
“두 장로께 정말 고마워해야겠구나. 오는 내내 이 문제 때문에 머리 아팠는데.”
양준이 천년마화의 약물을 만들러 망천애에 오르게 되면 누군가의 주목을 받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만약 너무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 남들의 목표물이 되어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두만이 준 비보는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간단하게 용모를 바꾸는 것은 창염 일행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너무 쉬워 다른 사람에게 들킬 수도 있었고, 양준의 생명의 기운을 숨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양준이 아무리 뛰어난 행보를 보인다고 해도, 그래서 남들에게 주목당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것은 양준 본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두 장로에게 좋은 물건이 꽤 많네.”
창염은 감탄하며 말했다. 지난번에는 별 세계에만 있는 연청석을 꺼내더니 이번에는 용모를 바꾸는 비보를 꺼냈다.
‘연단사들은 정말 어마어마한 부자들이군.’
특히 등급이 높은 연단사들은 원하는 게 있으면 직접 찾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말만 하면 그들에게 연단을 부탁하려는 무인들이 구해 주기 때문이었다. 연청석과 이번 비보 역시 모두 두만이 남들에게 연단을 해주고 받은 보수일 것이다.
“사질의 지금 모습이 전보다 훨씬 보기 좋아. 난 이렇게 멀끔하게 생긴 얼굴이 좋거든.”
비우는 깔깔 웃었다.
양준의 원래 얼굴은 못생기지 않았지만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싸움터를 누비다 보니 날카롭고 난폭한 기운이 더해지면 볼수록 멋스럽고 우람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천하를 뒤흔들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준수하다 못해 요염했다. 천하에 있는 모든 여인들의 호감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양준은 덤덤한 얼굴로 생각을 해보다가 진원을 돌려 얼굴에 모았다. 그러자 얼굴이 꿈틀거리며 외모가 살짝 바뀌었다.
“이제야 완벽하군.”
거울을 비춰 본 양준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바꿨어? 아까 모습이 얼마나 잘생겼는데?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아까보다는 못하잖아.”
비우는 입을 삐죽거렸다.
“완벽한 게 가장 큰 결함이에요. 이럼 좀 더 자연스럽죠.”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을 들은 비우는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양준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나중에 두 장로께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네. 이 물건이 있으면 우리는 마음껏 실력을 펼칠 수 있을 거야.”
창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 내가 역완, 비전과 함께 망천애에 가서 상황을 살펴보고 올 거야. 시간이 많이 남은 게 아니니까. 사전에 상황을 살펴보면 준비하기도 편하겠지. 비우, 넌 사질과 함께 성안에 있어. 녀석을 잘 보호하고. 부운성은 그나마 안전하지만 싸움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알겠어.”
비우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각자 방으로 쉬러 돌아갔다.
양준은 얼굴에 쓴 비보를 거두지 않았다. 쓰고 있으면서 비보의 성능을 파악할 생각이었다.
*밤의 장막이 드리우자, 부운성 하늘에 노인과 청년이 신비롭게 나타났다. 노인은 백발이 성성했고, 청년은 스무 살 정도로 보였다. 청년은 생기 넘치는 눈으로 떠들썩한 부운성을 살펴보았다. 노인도 한참을 둘러보다니 혼탁한 눈에 빛이 감돌았다. 그는 추억에 잠긴 것처럼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