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3장. 사람 잘못 건드렸어
섭추봉은 초범 경지 1단계로 통현대륙에서는 강한 경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초범 경지에 들어선 것은 확실했다. 반면 적요는 양준과 마찬가지로 신유 경지 정상으로 두 사람의 실력 차이는 꽤 되었다. 섭추봉이 진원을 돌리자 적요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섭추봉이 출수하기 전에 적요가 갑자기 물건 하나를 그녀에게 던졌다. 그녀는 잽싸게 물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물건을 훑어보던 그녀의 얼굴빛이 급변했다.
“금룡령(金龍令)?”
섭종이 놀라서 외쳤다.
“왠지 방자하다 했더니, 녀석이 부운성 성주의 금룡령을 가지고 있었군.”
비우는 금세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섭추봉이 들고 있는 영패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두어 번 실룩였다.
“정말 대단한 배경을 가지고 있군요.”
양준이 웃으며 말했다.
부운성의 금룡령이 있으면 성주의 귀빈이나 마찬가지였다. 양준은 적요와 부운성 성주의 관계는 알 수 없었지만, 마족의 입성 경지 고수 아우구의 수단과 횡포함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금룡령을 확인하자, 섭추봉의 살기와 기세는 확 꺾였다. 그녀는 놀란 눈빛으로 적요를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어디에서 얻은 금룡령이냐?”
그녀는 적요가 마족의 아우구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적요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아우구 성주께서 선물한 겁니다.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가서 확인하시죠.”
“물론 확인할 것이다.”
섭추봉의 표정은 종잡을 수 없이 변화무쌍하게 바뀌었다. 그녀는 곁에 있던 한 무인에게 손짓하며 분부했다.
“가서 주량 부성주를 모셔와.”
“예!”
무인은 대답한 뒤 번개같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대치 상태가 되자, 구경꾼들은 모두 수군덕거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섭추봉은 복잡한 표정으로 적요를 훑어보았다. 상대가 금룡령을 꺼내자, 그녀는 아우구가 무서워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고모, 저 자를 꼭 죽여야 해요.”
섭종이 억눌린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는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서 눈빛에는 증오와 독기를 가득 품고 있었다.
“하지만 저 자에게는 금룡령이 있잖느냐.”
섭추봉이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데요?”
섭종이 이를 악물고 나지막하게 외쳤다.
“금룡령이 있다고 제 손이 잘린 복수를 하지 못한단 말인가요? 여하를 불문하고 저 자를 반드시 죽일 거예요.”
섭추봉은 입술을 실룩이더니 몇 마디 위로하려 했다. 하지만 섭종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는 순간, 그녀의 마음속은 분노로 들끓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섭종은 그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억울함이라고는 모르고 자라 왔었다. 그리고 부운성에서 섭종의 이름을 대면 누구든지 양보하다 보니 이렇게 분한 일을 당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난생처음 이런 일을 겪어 본 것이다.
“정말 저 자를 죽여야 하겠느냐?”
섭추봉의 눈빛에서 점차 위험한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 자를 죽여야만 제 원한을 풀 수 있습니다.”
“그래. 고모가 네 소원을 들어주마.”
섭추봉은 차가운 얼굴로 결단을 내렸다. 적요를 죽이려면 반드시 주량이 도착하기 전에 손을 써야 했다. 주량이 도착한 뒤에는 손쓸 방도가 없을 터였다. 그녀는 적요가 어떤 사람인지, 아우구와는 무슨 관계인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주량이 아우구에게 두어 마디 하면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어차피 저 녀석은 아우구의 손님에 지나지 않아. 아우구가 손님을 위해 주량과 척질 일은 없겠지.’
이렇게 생각한 섭추봉은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비취색 진원이 다시 한번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눈 깜짝할 사이 하늘에서 독사의 모습으로 바뀌어 꿈틀거리며 적요에게 달려들었다.
적요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뜨거운 진원이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왔고 훨훨 타오르는 불길이 그를 겹겹이 둘러쌌다. 비취색의 독사는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 채 불길을 꿰뚫고 적요를 물려 했다. 독사의 입에서 비릿하고 구린 기운이 쏟아져 나오며 적요를 감싼 진원의 불길을 부식시켰다.
한순간 적요의 진원 방어벽이 뚫리고 독사가 코앞으로 닥쳐왔다. 적요는 동공이 수축되면서 신형이 번쩍하더니 독사의 치명적인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그가 미처 몸을 가누기도 전에 땅속에서 비취색 독사들이 튀어나오며 사방팔방에서 물 샐 틈 없이 공격했다.
적요의 당황하던 표정이 곧 진정되었다. 그는 신법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움직였다. 순간 주위에는 수많은 그림자가 촘촘하게 나타났다.
구경꾼들은 깜짝 놀라 탄성을 질렀다. 적요가 섭추봉의 공격을 받고도 무사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사람들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여인숙 3층의 어느 한 곳에서 천지를 울리는 기운이 폭발했다. 하늘을 찢어 버릴 것만 같은 기운의 파동이 전해졌고,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잔물결이 사람들의 눈앞에서 겹겹이 퍼져 나갔다. 물결에는 현묘한 힘이 내재되어 있어 물결이 닿는 곳마다 비취색 독사들이 활기를 잃더니 다시 비취색 진원으로 바뀌어 불에 깡그리 타 버렸다.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이 사방을 비추었다. 그것은 마치 해와 달이 폭발하며 빛을 내뿜는 것처럼 비취색 진원을 정화시켜 버렸다. 장내는 순식간에 쾌청해졌다.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적요의 앞에는 또 다른 청년이 서 있었다. 바로 무역 지역에서 적요와 지화담을 다투던 청년이었다.
“양준……!”
적요가 양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입꼬리를 실룩였다. 얼굴에는 살짝 달갑지 않은 기색이 서려 있었다.
방금 전, 폭발한 기운에서 그는 양준의 강한 전투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양준 같은 연단사는 전투에 능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도 상대의 전투력은 그보다 훨씬 강했다. 연단술도 상대보다 못하고, 이제는 전투력마저도 뒤처지자 적요는 크게 충격을 받게 되었다.
양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능하다면, 그 역시도 화를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섭추봉과 섭종의 일 처리 방식을 보아하니, 설령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조만간 그들에게 쫓겨다닐 것이 뻔했다. 무역 지역에서 섭종과 지화담을 다투는 순간부터 원한은 이미 맺어진 것이었다.
천소종의 네 호법은 부운성의 입성 경지 고수들과 맞설 수 없을 듯했다. 이제 양준은 적요에게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적요는 여러모로 신비한 느낌을 주는 것이 버팀목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잘만 하면 이번 위험도 해소할 수 있을 듯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양준은 과감하게 공격했다.
비우도 창가에서 가볍게 내려왔다. 그녀는 방그레 웃으며 두 청년 앞에 서더니 흰 이를 꼭 깨물고 말했다.
“골칫거리를 만난 것 같구나.”
적요가 입을 삐죽거렸다.
“저들은 절 죽일 수 없습니다.”
“그래? 어린 나이에 큰소리 한 번 잘 치는구나. 우리 사질과 똑같네.”
비우가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둘이 바로 한패거리예요.”
섭종이 양준을 보자마자 소리치더니 양준과 비우를 가리키며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양준은 냉담한 표정이었다. 사실 무역 지역에서 그는 섭종에게 주먹만 날렸을 뿐, 실질적으로 그를 해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상대가 앙심을 품고 있으니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 고모가 꼭 복수해 줄 테니까.”
섭추봉은 얼굴에 한기를 품고서 별안간 손을 저었다.
“셋 다 죽여라!”
그녀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그녀가 데려온 무인들은 일제히 진원을 폭발시키며 세 사람을 공격했다.
비우는 웃음을 머금은 채, 자신에게 달려드는 무인 열몇 명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기괴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주위에는 순식간에 짙은 물안개가 생겼다. 물안개는 다시 물방울로 응결되어 비우의 제어하에 드높은 기세로 무인들을 공격했다.
“초범 경지 3단계?”
섭추봉의 얼굴빛이 바뀌었다.
비우가 공격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과 상대의 커다란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이번에 섭종을 위해 복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데려온 무인들 가운데서 가장 실력이 높은 이도 초범 경지 2단계밖에 안 되었다. 그 외에 초범 경지 1단계가 두 명 더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신유 경지였다. 이 정도의 실력으로는 초범 경지 3단계 고수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섭추봉은 화가 치밀어 표정이 어두워졌다.
여러 해 동안, 부운성에서는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거역하지 못했다. 주량의 보호를 받았기에 설령 초범 경지 3단계 고수라도 그녀를 만나면 모두 예의를 차렸다. 하지만 지금 형세가 급박하게 나빠졌다.
‘가증스러운 외부인들, 감히 나를 건드려.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슈욱- 슈욱- 슈욱-
드높은 기세의 물방울 공격은 비우에게 달려드는 무인들을 파죽지세로 쓰러뜨렸다. 무인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떨어졌다. 초범 경지 무인 세 명만이 겨우 공격을 피해 무사할 수 있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남의 세력 범위였기에 비우는 결코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기세에 눌려 상대가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랐다.
비우의 수단을 경험한 초범 경지 무인 세 명은 암담한 표정으로 다시 비우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또 달려들려고? 다음 번에는 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거야.”
비우가 환히 웃으며 여유 있게 한마디 던졌다.
“고모!”
섭종이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섭추봉의 표정이 연신 바뀌며 어찌 할 줄을 모르고 있는데, 문득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꼼짝 말거라!”
그 소리가 사람들의 귀에 들리는 순간, 강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강한 기운의 압박감에 모든 사람들은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곧이어 그림자 하나가 멀리서부터 빠르게 가까워지더니 장내 한가운데에 내려섰다.
섭추봉은 눈을 반짝이며 얼른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이 애교스럽게 상대를 불렀다.
“주량!”
주량은 그녀를 무덤덤하게 보더니, 곧 시선을 옮겨 비우와 양준이 등 뒤에 보호하고 있는 적요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음침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적요에게 다가갔다.
비우와 양준은 실눈을 떴다. 두 사람의 온몸의 기운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렸다.
섭추봉은 주량이 자신을 대신해 치욕을 되갚아 주려는 줄 알고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섭종을 진정시키려고 그의 머리를 가볍게 다독였다. 섭종은 비릿하게 웃으며 자신을 건드린 세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 지켜보려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지금까지 주량은 섭추봉을 아낀 나머지, 그녀의 어떤 요구도 다 들어주었다. 이번에도 물론 예외일 수가 없었다. 섭종 역시 복수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의 입가에는 잔인하면서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