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694화 (693/853)

제 694장. 또 졌습니다

음산한 표정을 한 주량이 빠르게 접근해 왔다. 양준은 온몸의 기운이 상대의 강한 기세에 억눌렸는지, 손발이 차가워지며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입성 경지 고수는 그의 지금 경지와 큰 경지 두 단계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만약 상대가 정말 공격한다면 그는 전혀 반항할 힘이 없었다. 심지어 비우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이때, 양준의 등 뒤에 있던 적요가 가볍게 뭐라고 속삭이자, 양준과 비우는 깜짝 놀랐다.

주량은 양준과 비우를 무시하고 곧장 적요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적 공자, 다친 데는 없는가?”

주량의 목소리에는 관심이 배어 있었고, 심지어 은은하게 걱정과 공포심도 섞여 있는 듯했다. 마치 적요가 방금 전의 싸움에서 조금이라도 다쳤을까 두려워하는 듯했다.

다들 깜짝 놀라 수군거렸다. 섭추봉은 웃던 얼굴을 굳힌 채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섭종은 입을 떡 벌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다행이군.”

주량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긴장을 풀었지만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은 모습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적 공자, 놀랐겠구먼. 늦게 왔다고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정말 괜찮습니다.”

주량은 그제야 양준과 비우를 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적 공자의 친구들인가?”

“네, 새로 사귄 친구들입니다.”

적요가 웃으며 대답했다.

주량의 표정이 순식간에 살갑게 변하더니 감탄하는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후배들이 참 대단하구먼. 적 공자의 친구니 우리 부운성의 귀빈이네. 걱정하지 말게나. 이 일은 반드시 제대로 해결하겠네.”

주량은 말하면서 표정이 차갑게 변하더니 뒤돌아 섭추봉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섭추봉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앞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적요가 방금 전에 아우구의 금룡령을 꺼내 보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우구의 손님임을 말해 줄 뿐이었다.

‘주량은 왜 저 녀석에게 저리 예의를 갖추지? 심지어 일부러 호감을 사려는 것 같기도 하고… 저 녀석의 배후에 주량마저 두려워하는 힘이 있는 건가?’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량은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주 아저씨……!”

섭종은 주량의 분노를 느끼고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쓰러질 것만 같은 것을 겨우 참았다.

찰싹-

뺨을 때리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섭종은 해진 자루처럼 나가떨어졌고 허공에서 몇 바퀴를 돌고서야 찍소리도 못 하고 땅바닥에 떨어져 혼절했다.

“뭐 하는 짓이에요?”

섭추봉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점차 맑아졌다. 그녀는 섭종이 뺨을 맞고 혼절한 것을 보자 소리를 질렀다.

찰싹-

또다시 뺨을 치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섭추봉의 예쁜 얼굴에는 다섯 손가락 자국이 찍혀 있었고, 입가에는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섭추봉은 볼을 감싸쥔 채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공포와 두려움이 서린 눈빛으로 여태껏 자신을 아끼던 남자를 바라보았다. 문득 눈앞의 남자가 너무나 낯설었다. 주량의 냉담한 표정에 그녀는 마치 얼음물에 빠진 것처럼 심장마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주량이 차갑게 질문했다.

섭추봉은 넋이 나간 채 고개를 저었다.

“우매한 것!”

주량이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서 차갑게 말했다.

“몇 해 동안 네가 부운성에서 내 이름을 걸고 저 잡놈과 함께 별짓을 다해도 내가 그냥 눈감아 주었지.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구나.”

“왜 이러시는데요?”

섭추봉이 목소리를 곤두세우고 울부짖었다.

“넌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을 건드렸어.”

주량의 얼굴빛은 냉담했다.

“네 아들놈을 데리고 멀리 사라져. 그리고 다시는 부운성에 발을 들여놓지 말거라. 만약 이곳에서 다시 너를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 지는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섭추봉은 놀란 나머지 얼굴이 창백해진 채, 경악에 빠져 주량을 바라보았다. 주량이 이런 매정한 말을 내뱉을 줄 꿈에도 생각지 못한 듯했다.

“어서 꺼지지 못해!”

섭추봉이 움직이지 않자, 주량이 노하여 소리쳤다.

주량의 살기를 느낀 섭추봉은 흠칫했다. 그제야 그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이 설령 아우구 가문의 사람을 건드렸다 해도 주량이 지금처럼 자신을 대하지 않았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주량의 매정한 모습에서 그녀는 적요 배후의 강력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주량마저도 눈치껏 행동해야 하는 엄청난 ‘괴물’이었다. 이를 알게 되자, 섭추봉은 금세 애절하게 눈물을 흘리며 매달렸다.

“이렇게 매정하지 굴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지금 저분한테 사과할게요. 앞으로 더는 저분을 건드리지 않을게요.”

섭추봉은 초범 경지 1단계밖에 안 되었고 문파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미색으로 주량의 호감을 사 부운성에서 떵떵거리며 살았었다. 이제 주량이 없다면 그녀의 실력과 경제력으로는 그런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지난 몇 해 동안, 그녀가 부운성에서 미움을 산 사람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주량의 보호가 없어지는 순간,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섭추봉은 무릎을 꿇고서 주량의 다리를 끌어안고 큰 소리로 애원했다.

구경꾼들은 섭추봉을 가련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는 오히려 통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섭추봉은 부운성에서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해 이미 인심을 잃었던 것이다.

주량은 전혀 흔들림 없이 냉담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섭추봉은 실망하고 말았다. 상대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되자, 그녀는 침착한 표정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당신이 저를 내쫓아도 원망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그동안의 정분을 봐서라도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당신이 부탁을 들어주면 지금 당장 떠날게요.”

섭추봉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던 주량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지난날 행복했던 시절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그는 가볍게 탄식하고 나서 말했다.

“말해 봐. 마지막 소원은 들어줄 수 있어.”

섭추봉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젯밤에 저한테 성주부에 대단한 연단사가 왔다고 했었죠. 그분에게 종아의 손을 이을 수 있는 단약을 부탁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얘기한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연단사라면 그런 단약을 만들 수 있잖아요?”

“물론 만들 수 있어.”

주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섭추봉의 얼굴에 기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부탁은 내가 들어줄 수 없어.”

“그래도 한때는 부부로 지냈는데 정말 이렇게 매정하게 나올 건가요?”

“내가 매정한 게 아니고 네가 어리석은 거야.”

주량이 다가서서 섭추봉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가 건드린 청년이 바로 그 연단사의 제자란 말이다. 그 연단사는 아우구도, 금각도, 나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야.”

섭추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이제 가. 앞으로는 눈썰미를 갖추고 살아.”

주량이 손을 내저었다.

섭추봉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를 가득 품고서 얄따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녀는 땅바닥에 혼절해 쓰러진 섭종을 안고서 독살스럽게 주량과 적요를 쏘아보더니 신법을 펼쳐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구경꾼들 중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음산한 표정을 하고서 조용히 섭추봉의 뒤를 따랐다. 두 모자와 원한이 있었다면 이제 따질 시간이 된 것이다.

주량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지하지 않았다.

“저 여인은 이제 곧 죽겠군요.”

양준이 가볍게 중얼거렸다.

“쌤통이야!”

비우가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섭추봉처럼 미색을 팔아 권세가에게 빌붙으면서도 주제 파악을 못 하는 여인들을 가장 경멸했다.

주량이 다가오더니 친근한 표정으로 양준과 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천년마화가 필 때까지는 아직 시일이 남았다네. 적 공자의 친구들도 성주부에 며칠 머무는 건 어떤가?”

적요도 기대감이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이 같이 성주부에 가기를 바라는 듯했다.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사숙 몇 분이 밖에서 일을 보고 계셔서 저희는 이곳에서 그분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주부에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렇구먼. 그럼 강요하지 않겠네. 시간이 되면 언제든지 성주부로 와도 되네.”

주량이 살짝 웃으며 적요를 바라보았다.

“적 공자, 우리 먼저 돌아가세.”

적요는 양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주량과 함께 떠나갔다.

주위는 쥐 죽은 듯이 적막이 흘렀다. 구경꾼들은 아직도 방금 전의 사건에서 정신을 못 차린 듯했다. 다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청년을 위해 주량은 자신이 아끼는 애인을 손찌검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부운성에서 내쫓았다. 그야말로 냉혹하고 매정하기 이를 데 없는 처사였다. 게다가 양준과 비우는 그 청년과 인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량 같은 인물의 열정적인 초대를 받았다.

‘저 청년의 정체가 엄청난가 보군.’

한참이나 지나서야 인파가 천천히 흩어졌다. 호사가들은 양준에게서 적요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려 했지만, 양준과 비우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진작 여인숙에 숨어 버렸다.

두 사람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적요가 배경이 있다고는 느꼈지만, 여전히 상대의 출신과 배경을 낮게 짐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추측했지만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성주부,

적요는 돌아오자마자 사부를 찾아갔다.

사부는 조용한 방에서 눈을 감고 좌선하고 있었다. 그는 적요가 조용히 들어가서 오랫동안 기다린 뒤에야 천천히 눈을 떴다.

“사부님, 저 또 졌습니다.”

적요가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또 졌다는 말이냐?”

사부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네. 이 단약을 보십시오.”

적요는 양준이 만든 영급 단약을 사부에게 공손히 건넸다.

사부는 단약을 받아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단문이라?”

그러고는 신식을 펼쳐 한참 동안 감지해 보더니 표정이 수시로 바뀌었다. 사부는 한참 뒤에야 단약을 적요에게 돌려주고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너와 겨룬 상대가 만들어낸 단약이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었느냐?”

“저와 나이대가 비슷했습니다.”

적요는 얼른 양준의 생김새를 사부에게 말해 주었다. 사부는 조용히 귀담아들으며 수염을 쓰다듬더니 다 듣고 나서 한마디 했다.

“대단한 젊은이구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녀석의 연단 기법은 서투른 편이야. 보아하니 엄격한 가르침을 받은 것 같지는 않구나. 그러니까 녀석은 자신의 사부가 없다는 말이다.”

“그럴 수가 있나요?”

적요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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