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720화 (719/853)

제 720장. 빙종의 종주

어림짐작으로도 거의 2백여 명이 모두 같은 상황이었다. 경지가 높든 낮든, 나이가 많든 적든 하나같이 증상이 똑같았다. 초범 경지 고수도 피하지 못하고 모두 생명의 기운이 흐트러져 있었다. 문파 내 제자들이 영문 없이 한꺼번에 이 모양이 될 수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놈이 음험한 술수를 부린 게 분명했다.

‘그런데 녀석이 무슨 재주로 입성 경지 고수 네 명의 코앞에서 이런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

천호 일행은 의혹이 일었다.

“자네가 한 짓인가?”

천호는 다른 두 입성 경지 고수에게 눈짓하는 동시에 양준을 차갑게 바라보며 물었다.

“알아맞혀 보십시오.”

“무슨 짓을 한 건가? 왜 저들이 저리 고통스러워하는가?”

천호가 성난 목소리로 질문했다.

양준이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천호의 눈짓을 받은 고수 두 명이 내려가서 탐지했다. 놀랍게도 제자들의 몸에는 어떤 상처도 없고, 또한 중독된 증상도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이나 마주 보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독되지도 않고, 부상을 입은 것도 아닌데 제자들이 왜 다 저 모양이 됐지?’

두 사람은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얼른 신식을 펼쳐 제자들의 상태를 자세히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신식을 방출한 지 얼마 안 되어 두 사람 모두 낯빛이 급변하더니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뭐야?”

두 사람은 비명과 함께 무언가에 뒤쫓기기라도 하듯이 볼품없이 허둥지둥 도망쳤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천월과 천호는 모두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찌 된 일이에요?”

천월이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신식으로 탐지하지도 말고.”

그중 한 명이 창백해진 얼굴로 질주하며 고함을 질렀다.

“신식을 노리는 무언가가 있는데 들러붙으면 떨쳐버릴 수가 없소.”

동시에 다른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입성 경지 1단계 고수 두 명이 큰 피해를 입고 경황실색하고 있었다. 천월은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천호는 차가운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는데,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짙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양준의 수단이 요상한 나머지, 입성 경지 1단계 고수마저도 당하고 말았다. 그는 몰래 진원을 모으며 경계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성 경지 고수 두 명은 점차 진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얼굴이 창백하고 미간을 잔뜩 구겼으며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푼 것인가?”

고수 중 한 사람은 양준을 바라보는 태도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에게서 더는 경멸의 눈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신혼의 고통을 참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역시 입성 경지시군요. 이런 상황에서도 명석함을 유지할 수 있다니.”

양준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한마디 칭찬했다.

그들은 명석함을 유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투력도 손상 받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제자들을 걱정할 뿐이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에요?”

천월이 경악에 빠져 물었다. 그녀는 두 장로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들마저도 술수에 당했다. 방금 전 만약 자신이 신식을 펼쳐 감지했다면 그녀 역시 꼼짝없이 당했을 터였다.

“감지하기 어려운 벌레가 제자들의 식해에 퍼져 있소. 우리가 신식으로 탐지할 때, 우리 신식에도 들러붙었소.”

그중 한 사람이 원망 어린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며 천천히 설명했다.

“잠시 벌레를 제압했지만 완전히 내쫓으려면 시간이 걸릴 듯 하오. 제자들의 실력으로는 그 정도까지 할 수 없을 거요.”

“벌레? 어떤 벌레를 말하는 거에요?”

천월이 사색이 되어 물었다.

“설명하기 어렵소. 저 녀석한테 물어보시오.”

천호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주저하는 낯빛으로 한참이나 지나서야 양준의 속박을 풀어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자네가 이겼네. 먼저 자네를 풀어주는 것으로 우리의 성의를 보이는 걸세. 얌전하게 우리의 물음에 대답하게나.”

“상황 파악을 잘하는 사람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말이 있죠.”

양준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네 장로의 얼굴이 모두 일그러졌다. 입성 경지 네 명이 초범 경지 1단계 젊은이를 대처하면서 상대를 어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술수에 당했다. 또한 빙종의 재산이 수없이 훼손되었고 몇백 명 제자들의 생사가 불분명해졌다. 이번에는 그야말로 체면이 땅바닥에 떨어진 셈이었다.

양준의 비웃음에 화가 단단히 났지만 네 사람 모두 꾹 참았다.

“무슨 벌레인가? 자네가 방출한 것이니, 잘 알고 있겠군.”

천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적지근하게 말했다.

“서혼지충이라고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그 말에 네 장로 모두 흠칫 했다. 그들은 물론 서혼지충에 대해 알고 있었다. 서혼지충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고, 신혼의 기운을 흡수하는 벌레였다. 일단 서혼지충에 감염되면 그것들은 번식이 빨라 내쫓거나 박멸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전설로만 듣던 벌레로 그것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서혼지충에 당한 고수 한 명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빙종이 세상과 담을 쌓았다고는 하나 무식하지는 않다네. 서혼지충이 대단한 줄은 알지만 입성 경지 무인의 신혼을 삼킨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이건 서혼지충일 수가 없네.”

입성 경지 무인은 서혼지충을 대처할 수 있었다. 서혼지충의 해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한 신혼의 기운으로 순식간에 그것들을 죽일 수도 있었다. 때문에 양준이 서혼지충이라고 말하자, 그는 상대방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양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죄송한데요, 제 서혼지충은 전설 속의 것과 좀 다릅니다. 전설 속의 것보다 좀 더 강하죠.”

지난번 창염과 비우를 따라갔다가 서혼지충을 얻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거의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서혼지충은 줄곧 양준의 식해 안, 오색 섬에서 생활하면서 자양분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때보다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양준은 천월과 실랑이질하면서 빙산을 훼손하는 한편, 지나는 곳마다 수많은 서혼지충을 뿌려 놓았다.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뛰쳐나오던 빙종의 제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서혼지충에 당하고 말았다.

“자네가 서혼지충이라고 말하면 서혼지충인가? 왜 자네는 아무 일도 없는가? 자네는 도대체 어떻게 서혼지충을 방출한 건가?”

고수가 냉랭하게 물었다.

“질문이 너무 많으시군요. 제가 당신께 일일이 대답할 의무는 없습니다. 한 가지만 알려드리겠습니다. 빙종 제자들은 반 시진 내에는 생명의 위험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반 시진이 지난 다음에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 벌레들이 그리 고분고분하지 않거든요.”

양준은 경멸 어린 눈초리로 그 고수를 힐끔 바라보았다.

“자… 자네, 화를 자초하는군! 빙종 제자 한 명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자네는 죽어야 할 것이네.”

양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몇백 명이 함께 죽는데, 뭐 당신들이 괜찮다면 저는 좋습니다.”

네 사람은 금세 침묵을 지켰다. 모두 머리가 지끈거렸다.

빙종은 원래부터 제자가 많지 않았다. 많아 봤자 5백 명밖에 안 되었다. 만약 한 번에 2~3백 명이 죽는다면 빙종에게는 막대한 손실이었다.

‘이 자식 완전 악마군!’

그들은 모두 일격에 양준을 죽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양준이 미워 죽을 지경이어도 거리끼는 게 많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양준을 죽이면 서혼지충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당장 양준에게 패배를 인정하자니 모두들 내키지 않았다. 다들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하고 있는데 한 여인의 목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자네 혹시 양씨인가?”

양준의 낯빛이 급변했다.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니 멀지 않은 곳에 아름다운 몸매의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무척이나 젊어 보였는데 기껏해야 소안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경지는 감지할 수 없었고, 기운이 평온하며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양준은 그녀에게서 강한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빙종의 네 장로들에게서도 이런 압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그곳에 가만히 서 있었는데 마치 빙하 세계와 하나가 된 것처럼 그녀가 없는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입성 경지 3단계인 듯했다.

양준은 심호흡을 하고서 경계심을 드러냈다. 강적인 줄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여인의 한마디에 마음속 포악함과 분노가 점차 누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신비한 힘이 내재돼 있어 양준의 마음속 원망과 불평, 분노를 보듬어 주는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듣기 좋았다.

“종주님을 뵙습니다.”

네 장로가 모두 낯빛을 가다듬고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되네. 그런데 소동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네?”

그녀의 말투에는 질책하는 뜻이 없었지만, 네 장로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저도 모르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

양준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빙종의 종주이십니까?”

“빙종의 청아(靑雅)라고 하네.”

여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보는 이가 정신을 번쩍 차릴 정도로 온몸의 기운이 순수했다. 청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자네, 양씨가 맞는가?”

이내 양준의 얼굴에서 적의가 사라지고 표정이 풀리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몽무애가 말했던 이가 자네겠군?”

“맞습니다.”

“몽무애가 말했던 것보다 더 출중하군. 자네가 이렇게 빨리 이곳까지 찾아올 줄 몰랐네.”

청아가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도 빙종의 종주님께서 이처럼 젊고 예쁘실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몽 주인의 친구라 해서 백발이 성성한 노부인일 줄 알았는데요. 오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양준은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맑은 눈동자에는 오직 감탄뿐 어떤 음험한 빛도 없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청아는 무척이나 기뻤는지 미소가 점점 더 환해졌다.

“입에 꿀을 처발랐나! 역시 나쁜 놈이었어!”

천월이 한쪽에서 연신 입을 삐죽거렸다.

“몽 주인께서 종주님 같은 분을 알고 계신다니. 제가 몽 주인을 얕보았습니다.”

양준이 정색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청아는 깔깔 가볍게 웃었다. 양준이 기분 좋게 추어올리자 그녀는 기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네 장로는 한쪽에서 몰래 지켜보며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종주가 이처럼 유쾌하게 웃는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어느 촌구석에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르는 녀석이 종주를 저리 기쁘게 하다니,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제길. 저 녀석은 매일 여인들의 치마폭에 싸여 사는 호색한일 거야. 아니면 어찌 여인의 속마음을 저리 꿰뚫어 볼 수가 있지?’

장로들은 마음속으로 욕을 퍼부으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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