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729화 (728/853)

제 729장. 구천성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보수는 충분히 드릴 겁니다.”

양준은 얼른 덧붙였다.

갑판 위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더니 우스운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폭소를 터뜨렸다. 그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양준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초범 경지의 고수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무얼 보수로 줄 생각이냐?”

“정석 열 개면 됩니까?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이기도 하고요.”

양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부러 촌놈인 척 연기를 했다. 그도 배의 주인이 부자 혹은 지체가 높은 사람이라고 짐작해 보수에 연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내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초범 경지 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녀석, 돈이 꽤 있네. 하지만 정석 열 개는 너나 쓰거라.”

그러고는 말하면서 옆에 있는 무인에게 손짓하며 분부했다.

“저 녀석에게 작은 배를 하나 내주고 꺼지라고 해.”

초범 경지 무인은 양준의 엉뚱한 대답에 경계심이 들었다. 양준은 실력이 높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배에 남겨 두고 싶지는 않아, 조금이라도 빨리 쫓아내려고 했다.

“그래도 됩니다. 그런데 저한테 방향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어디가 되었든 가장 가까운 육지면 됩니다.”

양준은 매달리지 않았다.

“네게 방향을 알려줘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 경지로는 육지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다. 바다에서 기도나 하거라. 운이 좋아 우리 구천성지(九天聖地)를 만나서 이 정도지, 만약 다른 세력의 배를 만났더라면 진작 바다에 버려졌을 테니까.”

초범 경지 무인이 코웃음을 쳤다.

“구천성지라고요?”

양준의 안색이 차가워졌다.

성지라는 두 글자를 사용하는 것을 보아, 작은 세력은 아닌 듯했다. 양준은 통현대륙에 온 뒤로 독오맹, 수신전, 뇌광신교, 천소종 등등 갖가지 크고 작은 세력을 마주쳤었다. 그중 독오맹과 뇌광신교는 세력이 약한 편이었고 수신전은 중간쯤 갔으며 천소종은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구천성지는 천소종보다 더욱 대단한 듯했다.

말하는 사이, 큰 배에서 이미 몇 사람이 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배가 내려졌다. 한 무인이 배 옆에 서서 불렀다.

“전(錢) 아저씨, 배가 준비되었습니다.”

전 아저씨라 불린 고수는 대답하려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돌려 옆을 바라보더니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었다.

“성녀 전하, 어찌 나오셨습니까?”

갑판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도 급히 그쪽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양준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았다. 순간,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선실에서 하얀색 긴 치마를 입은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여인은 백옥 같은 피부에 버들잎 같은 눈썹을 가지고 있었고, 아름다운 눈에서는 영리함이 내비쳤다. 젊고 예쁜 여인은 온몸에서 대갓집 규수의 기질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여인은 양준의 거리낌 없는 시선을 의식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를 힐끗 보았다. 이에 고수는 고개를 돌리더니 양준에게 경고의 의미가 다분한 냉소를 지었다.

양준은 덤덤한 얼굴로 상대했다.

“안에 있는 게 답답했는데, 마침 밖에서 소리가 들리기에 나와 본 거예요.”

여인이 상큼하고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한번 둘러보고서 물었다.

“지금 무슨 상황인 건가요?”

고수는 방금 전에 벌어진 일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여인은 놀란 눈으로 양준을 바라보더니 알았다는 의미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로 전하를 귀찮게 하다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고수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 말씀하지 마세요.”

여인은 고개를 살래살래 젓더니 양준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저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 같군요.”

양준은 깜짝 놀라 호기심 어린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이 왜 그리 확신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쫓아낼 생각이었습니다.”

고수는 음산한 눈길로 양준을 훑어보며 말했다.

“쫓아낼 필요는 없어요. 신유 경지의 무인일 뿐인데 쫓아낸다면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거짓말을 했다고는 하나, 악의가 없어 보이니 어쩌면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함께 가면 되겠네요.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 다시 떠나라고 하면 되죠.”

“전하의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고수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럼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 조심하세요.”

여인은 곧바로 뒤돌아 다시 선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떠나자, 고수는 양준 앞으로 다가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널 내쫓지 않기로 했다. 얌전하게 구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어떤 게 고통인지 알게 해 줄테니.”

양준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용히 있을 겁니다. 전 그저 육지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는 게 좋을 거야.”

고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신유 경지 정상의 무인에게 손짓했다.

“성비(成飛)야, 이 녀석을 지켜보거라. 나쁜 짓을 할 기회를 주지 마.”

“네, 알겠습니다.”

몸집이 거대한 사내가 곧바로 대답했다. 지시를 마친 고수는 곧 다른 일을 보러 갔다.

성비는 양준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경멸 어린 눈길로 훑어보았다. 겉보기에 양준은 지금 신유 경지 7단계밖에 안 되었다. 입성 경지의 고수가 살펴보지 않는 이상, 누구도 그의 진짜 경지를 알아볼 수 없었다. 이 정도 나이에, 이 정도 경지면 통현대륙에서는 흔한 일이기에 의심을 살 일도 없었다.

성비는 신유 경지 정상의 경지로 당연하게 자신이 양준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얌전히 있어. 난 널 돌볼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만약 날 화나게 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았어. 얌전히 있을게.”

양준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구천성지의 사람들은 뼛속까지 거만함이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들의 세력이 대륙에서 엄청난 지위를 자랑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중도 쪽에서도 8대 세가의 자제들은 밖에서 항상 우월감을 자랑하며 다녔다. 양준은 그런 모습들을 많이 봐왔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따라와. 묵을 곳을 준비해 줄게.”

성비는 냉소를 지으며 양준에게 말했다.

양준은 얼른 그를 따라가며 물었다.

“아까 그 낭자는 누구야? 다들 무척이나 공경하는 것 같던데?”

“호기심이 너무 많군. 알아서 뭐 하려고?”

성비는 하찮다는 듯이 양준을 흘겨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아니, 그냥 예쁜 것 같아서.”

양준은 홀딱 반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성녀(聖女) 전하께서 예쁘긴 하지.”

성비는 열광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도 성녀에게 흠뻑 빠진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몸을 흠칫 떨더니 버럭 화를 냈다.

“나쁜 자식, 또다시 성녀 전하를 넘보면 네 놈의 눈알을 파낼 거야. 주제에 감히 성녀 전하를 넘봐? 성녀 전하는 부드럽고 선한 분이시다. 그분께 어울리는 사람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 너 같은 녀석은 그분을 볼 수 있는 것만 해도 하늘이 내려준 복이야.”

성비는 수다스럽게 양준을 한껏 비웃었다. 양준은 이내 대화할 기분이 사라져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없이 성비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 여인이 구천성지의 성녀라니, 양준은 조금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성녀는 모두 신성하고 고귀한 존재로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구천성지의 성녀는 웬일인지 배를 타고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었다.

곧 성비는 그를 선실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구석진 방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들어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계속 이곳에 있어야 해. 하루 세 끼는 가져오는 사람이 있을 테니 허락 없이는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밖에 나가기만 하면 바로 바다에 처넣을 거야.”

양준은 몸을 뒤척이면 벽이 닿을 듯한, 좁은 공간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없이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성비는 양준이 순순히 말을 듣자 매우 흡족해했다. 양준이 방으로 들어간 뒤, 그는 바로 방문을 닫아 버렸다.

이곳은 방이 아니라 물건을 놓아두는 작은 창고 같았다. 면적이 사방 2장도 되지 않았고, 이상한 냄새가 나기도 했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양준은 어쩔 수 없이 가부좌를 튼 채, 바닥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손이 닿는 대로 등 뒤의 창문을 열자 상쾌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그제야 숨이 좀 트이는 것만 같았다.

큰 배는 계속해 바다 위에서 항행했다. 가는 길에 별다른 일은 없었다. 양준은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어 사람들의 기척을 탐지해 보지도 않았고, 매일 수련에 몰두했다. 그는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 배가 육지에 도착하면 그때 다시 떠날 생각이었다.

그동안 성비도 매일 세 끼씩 끼니를 가져왔다. 모두 바닷고기 같은 것이었는데 양준의 입맛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초범 경지의 실력을 가진 고수도 양준의 상황을 물어보러 몇 번 왔었다. 그는 매번 양준이 얌전히 지내는 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돌아갔다.

가끔씩 소란을 피우는 바다 요수들도 있었지만, 고수들의 포위 공격에 금방 해결되었다. 몇 번의 싸움을 통해, 양준도 구천성지의 저력에 놀라고 말았다. 배에는 적어도 초범 경지 고수 여섯 명이 있었다. 그중 두 명은 초범 경지 3단계였는데 전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나머지 네 명은 모두 초범 경지 2단계였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입성 경지의 고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도리대로라면 성녀의 지위가 중요한 만큼 성녀가 바다에 나와 있는데당연히 입성 경지의 고수가 지키는 게 맞았다. 연유를 알 수 없었지만 양준도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

선실의 커다란 방 안,

구천성지의 성녀는 탁상 옆에 앉아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방은 양준이 묵는 방과 비교했을 때, 하늘과 땅 차이였다. 방 안에는 최고급 향료를 태우고 있어 향기가 방 안에 가득 했고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방의 장식도 정교했는데 곳곳에서 고귀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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