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0장. 여기는 어디지?
“또 무슨 생각을 하세요?”
시녀는 성녀가 꼼짝하지 않고 두 시진 동안 앉아 있자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성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녀의 미간에는 잔잔한 수심이 드리워 있었다.
“전하께서는 이번에 성주(聖主)님을 순조롭게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시는 거죠?”
패아(貝兒)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난 성주를 찾고 싶지 않아.”
성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건 전하의 직책인걸요.”
패아의 안색도 덩달아 어두워졌다.
“알고 있어. 그래서 찾고 있지 않느냐? 나타나지 않는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가장 좋은 건 평생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그럼 전하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잖아요.”
“쉿!”
성녀는 다급히 손가락을 세워 입술에 가져다 대며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런 말은 밖에서 하면 안 돼. 전씨 아저씨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 나.”
“알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구천성지에 성녀가 네 명 있잖아요. 전하를 제외하고도 세 명이나 찾고 있으니 그분들이 찾아낼 수도 있지 않나요?”
“누가 찾아내든 좋지 않아. 앉아만 있으려니 힘들구나. 나가서 좀 걷자.”
성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그녀는 갑판에서 바람을 쐬며 기분이 많이 좋아졌고, 문득 양준이 떠올라 한 제자에게 물었다. 양준이 그동안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성녀는 특별한 연유로 다른 사람의 진실한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전에 양준과 만났을 때, 그에게서 적의와 악의를 느끼지 못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양준은 신비한 장막에 싸인 듯, 성녀인 그녀조차도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성녀는 양준이 조용히 있다는 말에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녀는 잠깐 휴식을 즐기다가 다시 선실로 돌아갔다.
시간은 하루하루 지나갔다. 배가 바다에서 항행한 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났다.
선실 밑에서 수련하고 있던 양준은 드디어 그리운 흙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는 다급히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수평선 위에 들쑥날쑥한 해안선이 보였다.
양준은 정신을 차리고 벌떡 일어섰다. 그동안 선실에만 갇혀 있느라 그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이제 육지가 보이고 드디어 협소한 공간을 벗어날 수 있게 되자,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반나절 뒤, 배는 섬 옆에 정박했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성비가 문을 열고 말했다.
“도착했어. 나와.”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갑판 위, 구천성지의 제자들은 질서정연하게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섬 쪽에는 본지 세도가의 무인들이 공손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모두 웃는 얼굴이었다.
양준은 갑판에 서 있는 구천성지의 성녀를 보고 잠깐 생각하다가 다가갔다. 그가 움직이자마자 순식간에 많은 무인들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전씨는 진원을 모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이 조금이라도 적절하지 못한 행동을 하면 지체없이 죽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양준은 아무것도 못 본 척, 느긋하게 걸어가 성녀와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서서 공수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 꼭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낭자께서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성녀는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뜻밖에도 양준이 하는 말은 다른 이들과 좀 달랐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별말씀을. 앞으로는 바다에서 떠돌지 말고 조심하세요.”
“낭자의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양준은 배에서 뛰어내린 뒤, 빠른 속도로 떠나갔다.
“입만 번지르르하기는!”
전씨는 양준이 마음에 안 드는지 냉소했다.
“전 저 자가 한 말이 진심으로 보이는데요.”
성녀는 사라지는 양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긋 웃었다.
배 아래에서는 많은 무인들이 나이를 불문하고 그녀의 미소에 흠뻑 빠져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넋을 놓고 있던 그들은 전씨가 콧방귀를 크게 뀌고 나서야 정신을 번쩍 차렸다. 다들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
양준은 배에서 내린 뒤, 섬에서 발길이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섬에는 오가는 무인들이 많았지만 섬의 영기가 좀 옅은 것 같았다. 수신전의 섬들처럼 영기가 짙지 않았다. 그리고 섬에는 고수가 별로 없는 듯했다. 방금 전 구천성지의 사람들을 맞이하러 온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가 초범 경지 2단계였는데, 그것도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보아하니 근처의 섬들은 작은 세력들이 있는 곳으로 수신전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듯했다. 사람들이 오가는 것만 봐도 그랬다. 수신전 쪽은 외부인들이 들어갈 수조차 없었으나 이곳에는 외부인들이 많았다.
섬에서 한참 둘러본 양준은 여인숙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창가 자리에 앉은 뒤, 음식을 주문했다.
직원은 대답하고 나서 얼마 안 되어 음식을 한가득 가져왔다. 그가 떠나려는 순간, 양준이 불러 세웠다.
“손님, 또 시키실 게 있습니까?”
직원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양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석 두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직원은 눈을 반짝이더니 더듬거리며 말했다.
“주문하신 음식들은 정석 두 개 값이 안 됩니다.”
“묻는 말에 잘 대답하면 나머지는 네가 가져도 좋아.”
“뭐든 물어보십시오. 아는 것은 다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양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디지?”
직원은 얼빠진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물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십니까? 그럼 어떻게 오셨…….”
그는 양준의 눈길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바로 하던 말을 멈추고 설명했다.
“여기는 해청도(海靑島)입니다…….”
“이곳에서 내로라하는 세력들은 어디가 있지?”
“이곳에는 정(程)씨 가문, 왕(王)씨 가문, 해(海)씨 가문…….”
직원은 하나하나 나열했다. 그의 말을 통해 양준은 근처의 섬들이 7세가 연맹(七家聯盟)이라는 세력에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근처에는 섬들이 대략 2~30개 정도 있는데, 그곳에 있는 세가들은 실력이 비슷하고 다들 그리 강하지 않다고 했다. 세가의 고수라고 해봤자 양준이 본 것처럼 가장 강한 이가 초범 경지 2단계를 넘지 않았다. 그리고 초범 경지의 무인들도 많지 않았는데 세가당 네댓 명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신전과의 거리를 알게 된 양준은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구천성지의 배를 따라 수신전과 반대 방향으로 왔던 것이다. 이곳은 수신전과 족히 몇만 리 떨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수신전으로 가서 수령에게 직접 인사하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이 섬들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대륙도 빠른 배로 한 달 정도 항행해야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긴 연단사 협회가 없어?”
양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시골이군!’
연단사 협회도 이곳에 지부를 만들지 않은 것을 보니 빈곤한 곳이 틀림없었다.
“연단사신가요?”
직원도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양준의 말에서 뭔가를 눈치챘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7세가 연맹에서 연단사를 모집하고 있거든요. 대우도 좋고요. 손님께서 돈을 벌고 싶으면 가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양준은 그에 대해 관심이 없는지라 몰래 입을 삐죽거렸다. 그는 대우가 어떻든 상관없었고, 오로지 연단술을 높이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수준으로 볼 때, 7세가 연맹이라고 해봤자 좋은 약재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옆에 있는 손님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번듯하게 꾸민 것이 풍류 공자의 모습들이군.”
양준이 또 물었다.
섬에 도착한 뒤로 그는 곧바로 한 가지 현상을 알아챘다.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그럴듯하게 꾸미고 있었다. 격식에 맞게 옷을 차려입었을 뿐만 아니라 말도 깊이 있게 했고 행동거지도 우아했다. 다들 교양이 있는 모습이었다. 젊은이뿐만 아니라 일부 중년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시종일관 자신의 몸가짐에 신경을 썼다.
양준은 그런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의 풍속이 원래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했다.
“손님, 모르세요?”
양준이 묻자 직원은 낄낄 웃으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알아야 해?”
양준은 그를 힐끗 보더니 정석 두 개를 더 꺼내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직원이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직원은 약삭빠르게 정석을 덥석 잡고는 연거푸 감사를 표했다. 그는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더니 양준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구천성지의 성녀님이 오늘 행차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다들 자신을 나타내려고 그러는 겁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성녀가 왔는데 그들과 무슨 상관이야?”
“당연히 상관이 있지요.”
직원은 양준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성녀님이 행차하신 건 구천성지의 차기 성주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성녀 전하의 마음에 든 사람은 그냥 출세길이 열린 거나 마찬가지죠.”
“겨우 저들이?”
양준은 주변의 못생긴 얼굴로 그럴듯하게 연기를 하는 이들을 보고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경멸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녀가 장님도 아니고 어떻게 저 자들을 마음에 들어 하겠어?”
“쉿!”
직원은 표정이 바뀌더니 경계 어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의 공분을 살 수 있어요. 게다가 성녀 전하께서 어떤 사람을 고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구천성지의 성녀들이 행차할 때마다 이런 소란이 일어난답니다. 반년 전에 구천성지에서 성녀가 행차할 거라는 소식이 돌자 세상이 들썩였는걸요.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래 준비를 했고요. 저희 해청도도 보름 전부터 다들 성녀님을 기다리느라 난리도 아니었어요. 평소 같으면 이렇게 떠들썩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