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0장. 살아생전 한 사람도 죽여서는 안 돼
두 노인이 자신에게 악의를 품자 성녀의 낯빛이 살짝 바뀌더니 갑자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미묘한 기운이 그녀의 신혼 영체에서 튀어나왔다.
기운은 어떤 살기나 악의를 띠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감로수처럼 양준과 해만고 그리고 정씨 노인의 몸을 적시더니 그들의 신혼 영체 속으로 스며들었다. 세 사람은 모두 성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몰라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양준은 곧이어 많이 차분해진 느낌을 받았다. 속세를 떠나 은둔하고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며, 눈앞의 모든 것에 흥미를 잃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양준은 당황해 얼른 정신을 집중해서 머릿속의 해이함을 쫓아냈다. 그러고 나서 해만고와 정씨 노인을 바라보았더니 놀랍게도 두 사람의 신혼 영체도 초조함과 흥분을 가라앉힌 듯했다. 방금 전처럼 포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얼마간 정신을 차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성녀의 신혼기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기능이 있는 듯했다.
해만고와 정씨 노인은 서로 마주 보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잠깐 망설였다. 이윽고 해만고가 입을 열었다.
“성녀 전하께서는 방금 전의 일을 다 지켜보셨습니까?”
성녀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겁니다. 저도 다른 이들이 제가 이곳에 왔었다는 것을 몰랐으면 좋겠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얼른 출구를 찾아 이곳을 벗어나는 게 아닐까요?”
해만고와 정씨 노인은 침묵을 지켰다. 미간에는 음울한 기운이 서려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했다.
성녀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가 특수한 신혼기로 해만고와 정씨 노인의 이성을 찾아 주었지만, 두 사람의 본성은 본래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나쁜 마음을 먹으면 그녀의 신혼기도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좌우할 수는 없었다.
성녀는 얼른 양준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양준은 못 본 척했다. 그녀는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
한참 뒤에야 해만고가 입을 열었다.
“자넨 무슨 생각인가?”
정씨 노인은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기왕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 봐야지.”
그 말에 해만고가 섬뜩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성녀를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군. 성녀면 어떤가? 이곳에서는 자네 신분이나 위치가 소용없네. 자네가 이곳에서 죽어도 아무도 모를 테니까.”
성녀는 두 노인이 이곳에서의 일을 숨기기 위해 자신을 죽여 입을 막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낯빛이 바뀌었다.
이번 일로 외부의 무인들이 많이 죽었고, 7세가 연맹도 손실이 적지 않았다. 만약 사건의 내막이 알려질 경우, 해씨, 정씨 가문은 막대한 손실을 입을 게 뻔했다. 게다가 이곳은 살인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두 노인의 신혼 파동이 또다시 요동치며 횡포하고 사악한 기운을 뿜어냈다. 곧이어 순수하고 위험한 두 갈래의 신식이 양준을 공격했다. 양준의 실력이 낮아 보였기에, 두 노인은 먼저 양준을 해결하고 다시 성녀를 대처하려 한 것이다.
양준은 차가운 표정을 하고서 공격이 몸에 닿으려는 순간 피해 버렸다.
“어?”
두 노인은 모두 당황한 표정이었다.
“내가 도와서 한 사람을 상대할게. 일 대 일로 하면 너도 이길 수 있잖아?”
양준은 성녀에게 소리치고는 해만고에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경멸의 미소를 던졌다.
“어이, 노친네. 날 따라와 봐!”
“죽음을 자초하는군!”
해만고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쉽사리 화를 내며 급히 양준을 쫓아갔다. 평소라면 해만고가 이처럼 얌전히 남의 말을 따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나 정씨 노인이나 모두 너무 많은 신혼의 기운을 흡수한 탓에 정신이 맑지 못했다. 지금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대부분이 본능이었다. 때문에 양준이 말로 자극하자마자 자연스럽게 그를 뒤쫓아간 것이다.
“여기…….”
성녀는 다급하게 양준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정씨 노인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는 표정이 바뀌더니 얼른 신혼기를 펼쳐 방어했다.
양준은 이미 해만고를 데리고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그는 해만고와 싸우지 않고 신식의 공격을 피하면서 성녀 쪽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는 성녀에게 해만고와 정씨 노인을 죽이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성녀의 앞에서 자신의 실력과 신식의 불꽃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성녀의 출신과 실력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을 듯했다.
성녀의 경지는 해만고나 정씨 노인보다 작은 경지 하나가 낮았지만, 구천성지와 7세가 연맹은 같은 등급의 세력이 아니었다. 그리고 방금 전에 성녀가 펼친 신혼기로 보았을 때, 그녀는 두 사람을 죽일 능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한참이나 지켜보던 양준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챘다.
성녀는 정씨 노인의 공격을 피하거나 방어만 할 뿐, 전혀 반격할 뜻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태도와 행동으로 보아서는 충분히 반격할 조건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정씨 노인과 싸울 의향이 없는지 그런 기회를 이용하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반격해야지, 왜 그냥 도망치기만 해?”
양준은 화가 나서 그쪽을 향해 소리쳤다.
“난…….”
성녀는 그냥 울고만 싶었다. 이제 막 한 글자를 내뱉었을 뿐인데 정씨 노인이 살초를 펼치는 바람에 급히 피하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네 걱정이나 해.”
해만고가 양준의 뒤를 바싹 쫓으며 낄낄낄 비릿하게 웃었다.
양준은 차갑게 해만고를 흘겨보았다. 곧이어 신형이 번쩍하더니 그는 방향을 바꿔 성녀 쪽으로 달려갔다.
얼마 안 되어 성녀가 있는 쪽에 다다른 양준이 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야? 왜 그냥 맞기만 하고 반격을 안 하는 거야?”
성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뻔히 알면서 왜 물어?”
“내가 뭘 안다고?”
양준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난 구천성지의 성녀란 말이야.”
“그건 알아. 그게 왜?”
양준은 성녀가 뜬금없는 말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성녀가 무얼 해서는 안 되는지 몰라?”
달아나는 와중에 성녀는 당황해서 양준을 힐끔 보았다.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어느 촌구석에서 온 거야? 구천성지의 성녀는 살아생전 한 사람도 죽여서는 안 돼.”
성녀는 양준이 거짓말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또 무슨 규칙이야?”
양준의 얼굴이 시커메졌다. 자신의 그럴듯한 속셈이 허사가 되었던 것이다.
“예전부터 그렇게 전해져 왔어. 우린 살생하면 안돼. 만약 규칙을 어기면 수련한 공법에 문제가 생기게 돼.”
“그건 또 무슨 엉터리 공법이야?”
양준은 대노했다. 아직까지 그런 제약이 있는 공법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시 역으로 생각하면, 제약이 이처럼 엄격한 공법인만큼, 분명 엄청나게 강할 듯했다.
“그럼 넌 왜 공격하지 않아? 이렇게 홀가분하게 도망치면서도 왜 내가 공격하길 기다리는 건데?”
성녀는 양준과 함께 도망치며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양준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렸다. 이번에는 남의 손을 빌려 사람을 죽이는 짓거리는 하지 못할 듯했다.
“내가 직접 공격할 수는 없지만 너를 도와줄 수는 있어. 저들의 상대가 안 될까 걱정하지 마.”
성녀가 다급히 말했다.
“어떻게 도울 건데?”
성녀는 아무 말없이 신혼기를 펼쳤고, 그것은 곧 양준의 신혼 영체에 흘러들었다.
이내 양준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성녀의 신혼기가 그의 몸에 스며드는 순간, 그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은연중에 자신과 성녀 사이에 연줄이 생겨나며 그녀가 어떤 기괴한 물건을 자신의 몸에 덮어씌운 것만 같은 기분이 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신혼의 기운이 순식간에 강해진 듯한 느낌이 드는 동시에, 일부 신비한 무언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여러 가지 듣도 보도 못한 비밀과 법결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양준은 자신이 그것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런 느낌은 너무나 미묘했지만,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앞으로 질주하던 양준은 우뚝 멈춰 서서 제자리에서 심호흡을 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빛이 반짝였다.
성녀도 양준과 가까운 곳에 멈춰 서서는 긴장한 눈초리로 그를 지켜보았다.
“이제 어디로 도망갈 테냐?”
해만고와 정씨 노인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양준과 성녀는 실력이 그들보다 낮지만 속도가 빨라 그들이 스스로 멈추지 않는 한,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두 노인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라 살기를 내뿜었다.
양준은 천천히 뒤돌아서서 두 노인을 지켜보았다.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그의 모습을 보아서는 아직도 의혹에 잠겨 있는 듯했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양준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신식의 기운이 튀어나가더니 온통 황금빛으로 된 커다란 검이 허공에 나타났다. 거대한 검은 온전히 신식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가 십여 장이나 되었다. 황금빛 검에는 모든 것을 불태울 것만 같은 뜨거운 기운이 배어 있었다.
이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이 들이닥쳤다. 일그러진 얼굴로 양준을 바라보던 해만고와 정씨 노인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마치 큰 산에 짓눌린 것 같은 압박감은 곧 신혼이 무너질 것 같다는 착각이 들게 했다. 두 노인은 반항할 생각도 못 하고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였다.
성녀도 마찬가지로 온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넋이 나간 듯이 양준을 바라보았는데 마치 대단한 비밀을 발견한 것처럼 흥분으로 인해 눈에서 이채가 반짝였다.
양준은 신혼으로 된 검을 바라보며 의념을 발동했다. 커다란 검은 곧 정씨 노인을 찔렀다. 횡포한 기파가 휘몰아치며 정씨 노인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 옆에 있던 해만고도 기파에 나가떨어져 몸을 휘청거렸다.
“이게 현천검(玄天劍)이야?”
양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성녀에게 물었다. 성녀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