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1장. 구천신기
정씨 노인이 고작 일격에 목숨을 잃었다. 요행으로 목숨을 건진 해만고는 집을 잃은 개처럼 허둥지둥 도망쳤다.
양준은 그를 덤덤하게 보고는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정씨 노인을 죽인 커다란 검은 이내 밧줄로 변하더니 해만고를 끈덕지게 뒤따랐다. 해만고는 결국 피하지 못하고 밧줄에 묶이게 되었다.
양준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밧줄은 마치 영성이라도 있는 듯이 해만고를 그의 앞으로 끌고 왔다.
“이건 유천쇄(幽天鎖)?”
양준이 다시 성녀에게 물었다.
“그래, 맞아!”
“이상하다. 내가 왜 갑자기 이런 신혼기를 알게 됐지? 게다가 신식의 힘도 훨씬 강해진 것 같아. 너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양준은 의심 어린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잠시 뒤에 말하면 안 될까?”
성녀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하기 싫어했다.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는 캐묻지 않았다.
방금 전에 펼친 두 가지 신혼기는 양준이 처음 사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두 가지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의 오묘함도 터득하여 마치 오랫동안 수련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아무 연유 없이 이런 것들을 알게 됐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성녀가 방금 전에 손을 쓴 것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다. 방금 전 그녀가 이 두 가지 신혼기를 양준의 머릿속에 주입시켜, 순식간에 여러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된 것 같았다. 게다가 본래 양준의 신혼의 힘은 기껏해야 해만고, 정씨 노인과 막상막하인 정도였다. 하지만 성녀가 손을 쓰자, 그는 일격에 정씨 노인을 죽일 수 있었다.
양준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투성이였다.
“이 사람을 어쩔 생각이야?”
성녀는 묶여 있는 해만고를 가리키며 물었다.
“뭐 어쩔 게 있어?”
양준은 잔인하게 웃었다. 곧이어 해만고를 묶었던 밧줄이 활활 타올랐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해만고의 신혼 영체는 불에 타서 사라져 버렸다.
신전지정에는 이제 양준과 성녀만 남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다가, 양준이 노려보자 성녀는 어색해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름이 뭐야?”
“안령아(安靈兒). 넌?”
“장삼(張三)!”
안령아의 얼굴이 시퍼레졌다. 그녀는 양준의 무성의한 대답에 화가 났지만 신분 때문에 화를 삭여야 했다.
“이젠 방금 전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말해 줄 수 있어?”
양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꼭 알아야겠어?”
안령아가 붉은 입술을 오므렸다. 양준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나한테 안 좋은 영향이 있을지 어떻게 알아?”
“그건 걱정하지 마. 너한테 아무 위험도 없을 거야. 게다가 난 너를 해칠 마음이 없어.”
“난 그래도 제대로 확실하게 알고 싶어.”
“알겠어. 꼭 알고 싶어 하니까, 말해 줄게.”
안령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며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계속해 말을 이었다.
“구천성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을 거야. 그동안 모든 성주들은 성녀들이 다 밖에 나가서 찾아온 이들이야. 특별한 방식을 통해 적절한 사람을 찾아낸 다음, 성녀들의 시험을 통과하면 차기 성주가 되는 거지. 성주를 찾는 구체적인 방식은 말해 줄 수 없지만 내가 수련한 공법과 연관이 있는 것만은 확실해.”
“그건 또 무슨 뜻이야?”
“우리 성녀들은 태어나서부터 성주의 노정(爐鼎)으로 살아가야 해. 수련한 모든 것, 깨달은 모든 것은 성주를 위해 준비된 것이지. 밖에서 성주를 찾아 성지로 데려가면 자신이 배운 것들을 모두 성주에게 넘겨주는 것이 우리 성녀들의 존재 가치야. 게다가 성지에는 성녀가 한 명만 있는 게 아니야. 때문에 성주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엄청나지. 이것이 역대 성주마다 대단한 재주가 있는 원인이기도 해. 성주는 혼자 수련하지 않아. 성녀는 3~5명 내지 7~8명이 될 수도 있어. 성녀들은 모두 성주의 노정으로, 익히는 모든 것들이 성주의 것이 돼. 이런 방식으로 양성된 성지의 성주는 강할 수밖에 없는 거지.”
“와, 신기한데?”
“이는 성지의 비밀이야. 절대 입 밖에 내면 안 돼. 알겠어?”
“걱정하지 마. 난 입이 무겁거든.”
양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짚이는 바가 있어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신혼기를 터득하게 된 게, 네가 자신이 배운 것을 나한테 주입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지?”
“그래. 네가 깨달은 것은 내가 수련한 것들이야. 성녀는 살아서 한 사람도 죽여서는 안 되지만 이런 특수한 방식으로 성주를 도울 수 있어. 게다가 우리가 성주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점은 이것뿐이 아니야. 방금 전, 너도 느꼈겠지만 내 도움이 있으면 네 신식의 힘도 강해질 수 있어.”
이내 양준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난 성주가 아니야. 왜 나한테 그런 것들을 주입한 거야?”
안령아가 나지막하게 탄식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너에게는 성주의 자질이 있는 거 같아.”
“그건 또 무슨 농담이야?”
“정말이야. 방금 전에 난 네가 두 사람과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그냥 네 신혼의 힘을 향상시키려고만 했어. 너한테 구천신기(九天神技)를 주입할 생각은 없었단 말이야. 그런데 영문을 알 수 없지만 네가 그것들을 각성한 거야. 너 신혼기 몇 개를 각성했어?”
“아까 그 두 가지야.”
“두 가지라도 대단한 거야. 설령 우리 성녀들이 성심껏 돕는다 해도 성주가 성지의 신혼기를 각성하는 건 그리 쉽지 않아. 여러 번 시도해야 겨우 신혼기 하나를 익숙하게 다룰 수 있지. 그런데 넌 한꺼번에 두 가지나 각성했잖아. 그건 너한테 성주의 자질이 있다는 거야.”
안령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양준은 눈알을 굴리다가 다시 물었다.
“넌 수련한 신혼기가 몇 개야?”
“아홉 가지야. 배우고 싶어?”
안령아가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글쎄, 네가 가르쳐주고 싶다면 사양하진 않을게.”
양준은 그다지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수련한 모든 것을 너에게 가르쳐줄 수 있어. 단, 먼저 한 가지 조건을 받아들여야 해.”
마지막 한마디에 양준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누가 자신과 흥정하려 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나와 함께 성지에 돌아가자. 때가 되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세 자매도 모두 널 도울 거야. 그러면 넌 짧은 시간 내에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될 수 있어.”
“지금 나더러 성지에 가서 성주가 되라는 거야?”
“그래! 성주의 적임자를 찾은 것 같아. 물론 넌 좀 밉상이지만 말이야.”
안령아가 사실대로 말했다.
“난 생각 없어.”
양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너……!”
안령아는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양준이 이처럼 깔끔하게 거절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무려 구천성지의 성주 자리였다. 세상에 그 자리를 넘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7세가 연맹이 차지하고 있는 2~30개의 섬들이 북적이고, 외부의 무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오는 것도 모두 성녀들이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바라서였다. 성주로 선택되면 그야말로 벼락출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안령아가 가는 곳마다 이쪽 섬들과 같은 상황이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먼저 성주가 되어 달라고 요구했는데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녀는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믿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는 말문이 막혀 양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힘을 얻고 싶으면 나 스스로 수련하면 돼. 왜 여인들의 도움을 받아? 그럼 기생오라비하고 뭐가 달라?”
양준은 하찮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너 혹시 성주가 되면 얻을 수 있는 좋은 점에 대해 잘 모르는 거 아니야? 성주가 되면 앞으로 한 곳을 지배하는 패자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다수 사람들이 평생 얻지 못할 것들도 손쉽게 얻을 수 있어. 이를 테면 재산, 명예, 지위, 미인. 원하는 것은 뭐든 가질 수 있어.”
안령아가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설명했다.
“거기에 너도 포함되는 거야?”
양준이 사악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안령아의 표정이 순간 어색해졌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 원래 성주의 노정이니까.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세 자매도 마찬가지야. 네가 원하면 우리한테 무슨 짓을 해도 우린 반항하면 안돼. 넌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어.”
“엄청 유혹적인 조건이네!”
양준이 입가를 쓱 핥으며 음험한 표정을 지었다. 무척이나 마음이 동한 듯했다.
“그럼 너…….”
“안 갈 거야!”
양준은 곧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지. 성주가 되면 그렇게 좋은 점들이 많은 만큼, 그에 따라 치러야 하는 대가도 크겠네?”
안령아의 낯빛이 살짝 바뀌더니 양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성지에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한 가지 소문이 전해지고 있어. 아마 그게 성주가 치러야 할 대가일 거야.”
“말해 봐.”
“성주는 모두 장수하지 않아……. 가장 오래 사신 분이 아마 3백 년 정도 될 거야.”
구천성지는 큰 세력이므로 성주가 성녀들의 도움을 받아 수련하면 몇십 년이 안 되어 입성 경지 3단계에 이를 수 있었다. 입성 경지 3단계면 진작 범인(凡人)의 차원을 벗어났기에 수명도 많이 연장되었다. 그런 사람이 3백 년만 산다는 것은 요절에 가까웠다. 기본적으로 초범 경지 3단계 무인이 몇백 년 정도는 너끈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 알게 되자, 양준은 성주가 되고 싶은 생각이 더 없어졌다. 3백 년이 보기에는 긴 것 같지만 무도를 추구하는 고수에게 있어서는 눈 깜짝할 사이와 같았다. 양준은 자신이 성주가 되지 않아도 3백 년 뒤에 여전히 잘 살아 있을 것 같았다. 그때가 되면 소안, 하응상과 함께 자유롭게 세상 구경을 다닐 수도 있을 터였다. 눈앞의 자그마한 이익 때문에 스스로 함정에 빠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너 생각해 봤어? 그 정도 대가를 치르면 많은 사람들이 평생 추구해도 얻을 수 없는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어.”
안령아는 계속해 설득하려 했다.
양준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30년이 지나면 난 너희들 성주와 비견될 수 있을 거야.”
“30년 뒤… 자신감이 차고 넘치는구나!”
안령아는 경악에 빠져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