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49장. 또 다른 소현계
안령아는 신전지정에서 일시적인 충동으로 양준의 몸에 구천신기를 주입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러면 양준도 구천신기를 각성하지 못했을 것이고, 남성고에게 찍히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녀는 꼭 자신 때문에 양준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된 것만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망할. 남성고가 시전한 기술을 다 가르쳐 줘. 안 그러면 손실이 너무 크잖아.”
양준은 창백한 얼굴로 극심한 통증을 참으며 힘겹게 말했다. 그는 주천모가 자신의 몸을 관통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입마를 시전한 그의 육신은 별 세계의 폭풍마저 견뎌낼 정도였지만, 남성고의 공격은 막아내지 못했다. 남성고의 공격이 얼마나 강한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초범 경지의 무인이었다면 남성고의 공격에 온몸이 이미 가루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이 어느 땐데 초식을 배우려고…….”
안령아는 손을 뻗어 양준의 상처를 막았다. 손가락 사이에서 솟구쳐 나오는 피를 느낀 그녀는 당황한 나머지 눈물로 옷섶을 적셨다.
“그만 좀 울면 안돼? 괜히 짜증 나잖아. 여인들은 왜 이렇게 압박감을 견뎌내지 못하는 거야?”
양준은 경멸 어린 말투로 말했다. 그의 말에 안령아는 얼른 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흐느낌과 눈물은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 앞쪽에 지면과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갑자기 시커먼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양준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다 왔어.”
그는 곧바로 속도를 끌어올려 위로 솟구치며 안령아를 데리고 허공 통로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가 허공 통로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남성고의 공격이 뒤쫓아왔다. 양준은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안령아를 허공 통로 안에 던져 넣고 돌아섰다. 곧이어 우렁찬 용의 울부짖음과 함께 양준의 등 뒤에서 거대한 흑룡이 나타났다. 흑룡은 입을 쩍 벌리고 남성고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쿠구궁-
기운이 마구 날뛰며 영기가 혼란스러워졌다. 흑룡은 순식간에 흩어졌고, 남성고의 공격은 여전한 기세로 양준을 따라 허공 통로에 휘몰아쳐 들어왔다.
이내 양준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그 순간, 사악한 기운으로 가득한 마기가 미친 듯이 솟구치며 주변으로 쏘아졌다.
바다 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했는지 알 수 없는 허공 통로는 폭발하는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곧이어 허공의 힘이 폭발하며 남성고의 공격을 막아내는 동시에 양준의 몸을 휘감았다.
양준은 머리가 어질하고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그는 가까스로 정신줄을 잡고 버텼다.
잠시 뒤, 눈앞의 어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더니 머리 위로 구름이 몽실몽실 떠다녔다. 파란 하늘에는 해도, 달도, 별도 없었고, 공기 중에는 뜨거운 기운이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편안한 느낌을 주는 기운이었다.
양준은 아직도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허공 통로를 통해 다른 곳에 도착했는지 더 이상 남성고의 기운은 느낄 수 없었다. 또한 떠나기 전에 그는 일부러 허공 통로를 망가뜨렸다. 남성고가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다 해도 당분간은 이곳까지 찾아오지 못할 터였다.
양준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입성 경지의 고수에게 쫓기는 것은 생사를 좌우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남성고는 최소 입성 경지 2단계 이상의 고수인 듯했다. 그녀는 빙종의 천월보다도 훨씬 강했는데, 양준은 반격할 기회조차 찾을 수 없었다.
곧이어 아래로 추락하던 그의 몸이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미리 도착한 안령아가 그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양준은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와 나뭇가지 위에 섰다. 숨을 거칠게 내쉬며 주변을 둘러본 그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그와 안령아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나무 위에 있었다. 지면과의 거리는 약 삼십 장 정도 되는 듯했다. 주변은 생기가 넘치고 울창한 삼림이었는데, 특이한 현상이 눈에 띄었다. 이곳의 나무는 바깥 세상의 나무와 달랐다. 모양이 다를 뿐만 아니라 나무줄기 안에는 옅은 양성의 원기가 흐르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나무 자체가 양성을 띠고 있는 것이었다.
양준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무들은 그저 일반적인 나무일 뿐, 천재지보나 영초가 아닐 텐데 어떻게 양성의 기운이 생긴 거지?’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기운 없이 한마디 했다.
“소현계?”
오직 소현계에만 해와 달, 별이 없었다. 고마 일족이 사는 소현계도 이러했다.
“뭐? 소현계라고?”
안령아는 깜짝 놀란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짙은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그녀는 소현계에 한 번도 들어가본 적이 없었고, 이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만 전해 들었던 것이다.
“틀림없어. 여기는 아마도 봉인된 소현계일 거야.”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말하다가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했다. 그러자 몸의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흘러나왔다.
“얼른 쉬어!”
안령아는 긴장한 얼굴로 그를 부축했다. 양준은 크게 다친 것 같았다. 남성고의 주천모가 그의 몸을 관통하면서 생긴 상처 말고도 마지막 순간에 허공 통로를 망가뜨리면서 폭발적인 기운과 허공의 힘 때문에 생긴 상처도 온몸에 가득했다. 너덜너덜한 옷 사이로 그의 몸에 난 무시무시한 상처가 보였다. 살도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모습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이였다면 이 정도로 부상을 입은 순간 진작 죽었겠지만, 양준은 약간 지친 기색만 보일 뿐,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안령아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건곤대에서 단약 한 병을 꺼내서 건넸다.
“이건 성지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데 쓰는 성급 단약이야. 어서 복용해.”
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버티기 힘겹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얼른 단약 몇 알을 꺼내 꿀꺽 삼켰다.
양준이 약 기운을 흡수하기도 전에, 문득 사방팔방에서 뜨거운 기운이 날아들었다. 기운은 밧줄처럼 그와 안령아를 꽁꽁 묶었다. 무방비 상태이던 두 사람은 묶인 채로 아래쪽으로 추락했다.
바닥에 떨어진 양준은 꼼짝할 수 없었다. 원래도 힘이 다 빠진 상태였던지라 그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망할. 왜 또 잡힌 거야?’
정신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양준의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었다. 그의 안색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양준이 소현계에 들어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은 관을 멘 사람에게 잡혀 들어간 것이었고, 이번에는 스스로 들어왔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형을 파악하기도 전에 또 누군가에게 잡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망할 마족 같으니라고!”
양준은 기절하기 전에 나지막한 욕설을 얼핏 들은 듯했다. 그리고 흐릿하게 사람 그림자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
양준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온몸에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무리 강한 육신이라고 해도 그 정도의 상처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 얼른 자신의 상황을 살폈다.
잠시 뒤, 양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예상대로 진원과 식해에 모두 금제가 걸려 있었다. 진원의 금제는 좀 손이 많이 가기는 해도 스스로 풀 수 있었다. 실력이 그보다 강한 고수가 건 금제인 것 같았다. 식해의 금제는 쉽사리 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모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떤 고수가 있는지 모르는데 섣불리 움직이면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것은 금제에서 그의 진원 속성과 같은 양성 기운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의 양성 원기는 바깥 세상보다 훨씬 짙었다. 유적지에서 느꼈던 기운은 이곳에서 새어 나온 것인 듯했다.
몸의 상처도 대부분 나은 상태였다. 회복된 정도로 미루어 보아, 그가 기절한지 적어도 사흘 정도의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근처에서 사람의 기운이 느껴졌으나 안령아의 것은 아니었다.
‘안령아는 어디 갔지?’
안령아는 경국지색으로 나쁜 마음을 먹은 사람의 손에 떨어지면 매우 위험했다. 양준은 왠지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현재 양준이 있는 곳은 감방으로, 특수한 목재로 지어져 매우 견고해 보였다. 한참이 지나고, 빛에 적응된 양준은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그가 움직이면서 낸 소리에 밖에서 누군가 걸어오더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녀석, 아직 안 죽었군. 목숨 한 번 질기네.”
“여기는 어디고, 당신들은 누구인가요?”
“쓸데없는 말을 하면 네 혀를 뽑아버릴 테다.”
그 사람은 콧방귀를 뀌더니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감방 문을 열었다.
“나와. 족장님이 널 보자고 하셔.”
“족장?”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잘 듣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널 묻어서 당나무 자양분으로 쓸 거니까. 따라와.”
그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양준을 힐끗 보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양준은 표정이 흔들렸으나 더 말하지 않고 그 사람을 따라가면서 몰래 주변을 살폈다. 어둡고 습한 복도를 지나면서 보니, 주변은 온통 그가 갇혔던 것과 같은 감방으로 칸칸이 막혀 있었다. 감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갇혀 있었는데 소리를 듣고 다들 이상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양준은 의혹을 금치 못했다. 그는 갇힌 사람들을 살펴보고 나서 왠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기운은 일반인과 달리 마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양준은 그들 속에서 안령아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안령아는 어디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