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2장. 죽을 날이 가까워지다
한참 먹고 마시자 음식은 곧 거덜이 났다. 마족은 남의 것을 얻어먹고도 여전히 잘난 척, 경멸 어린 시선으로 양준을 바라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도 양준이 자신에게 호의를 표하는 의도를 눈치챘던 것이다.
“궁금한 게 뭐야?”
양준은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밝힌 뒤 물었다.
“네 이름을 말해 줄 수 있어?”
마족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잠깐 생각해 보더니 결국 덤덤하게 말했다.
“구척(勾尺)이야!”
양준은 코를 훌쩍이고는 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안령아는 순간 당황하다가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질렀다.
“왜 그래?”
양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구척이야?”
안령아는 놀란 얼굴로 구척을 바라보았다.
“맞아.”
“세상에, 네가 구척이었구나. 어쩌다 이곳에 잡혀온 거야?”
“유명인이야?”
양준은 의아한 얼굴로 안령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구척은 콧방귀를 뀌더니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녀석, 꽤 똑똑해 보이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멍청해?”
“미안, 정말 들어 보지 못했어.”
양준은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
안령아는 입술을 오므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구척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기는 했지만 그리 유명한 건 아니야. 유명한 건 쟤 아버지지. 4대 마장 중 한 명인 구경(勾瓊)이야.”
“네 아버지가 마장이었어?”
양준도 깜짝 놀랐다.
그도 마장에 대해서는 진작 들어 알고 있었다. 창운사지의 흉살사동에서 그는 마장의 분신을 죽인 적도 있었다. 또한 통현대륙에 온 뒤, 수령에게서 마장의 무시무시한 실력에 대해 들었었다.
“아버지는 아버지고, 난 나야!”
구척은 아버지의 명성을 빌리는 게 싫다는 듯이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대단한 아버지가 있으면서 여기는 왜 잡혀 온 거야?”
구척은 순간 부끄러운 낯빛을 띠더니 양준을 매섭게 노려보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어. 내가 이곳에서 벗어나면 사람들을 데려와 이곳을 아예 평지로 만들어 버릴 거야.”
“꼭 그러길 바랄게. 이곳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어?”
“잘 몰라.”
구척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전처럼 양준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아마 적의 적은 친구라는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 역시 양준과 손잡고 살길을 찾아보려는 듯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자칭 양족(陽族)이라고 해. 그들은 원래 인간의 한 세력이었는데 수련한 공법과 당나무와의 상관관계 때문인지 인간과 체질이 좀 달라지게 되었어. 때문에 새로운 종족의 이름을 붙이게 된 거야.”
“당나무?”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가 깨어나서 얼마 안 되어, 한 양족이 그를 데리고 대전으로 가는 길에 당나무를 언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날 당나무의 자양분으로 쓰겠다고 한 것 같은데.’
“그래. 당나무는 양족의 뿌리와 같아. 너 이곳에 들어올 때 엄청 큰 나무 못 봤어? 이곳의 양성 기운이 짙은 이유는 바로 그 당나무 때문이야. 그것만 아니라면 우리의 마원(魔元)이 어떻게 억제당할 수 있겠어?”
마족들은 몸속의 원기를 마원이라고 불렀다. 인간 무인이 몸속의 원기를 진원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의 말을 들은 양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당나무 같은 것을 보지 못했었다. 아마도 그와 안령아가 다른 입구로 소현계에 들어왔기 때문인 듯했다.
“이곳의 당나무는 매우 특이해. 스스로 양성 기운을 만들어낼 수 있지. 다만 요 몇 년 사이 당나무에 이상이 생겨 불안정해졌다 하더라고. 그래서 당나무의 건강과 안정을 위해, 양족들은 외부에서 사람을 잡아오기 시작한 거야. 이곳의 유일한 입구는 바로 우리 마강에 있지. 그래서 잡혀온 사람은 모두 마족들이야. 그런데 너희 둘은 이상하네. 어떻게 잡혀 들어온 거야?”
“이곳의 입구는 하나만 있는 게 아니야. 우리도 얼떨결에 들어왔어.”
“그렇게 된 거구나. 너희들도 방금 전의 불안정한 원기 파동을 느꼈을 거야. 그건 당나무에 이상이 나타났다는 징조거든. 그럴 때마다 양족들은 우리 마족들을 끌고 가서 우리의 피와 살로 자양분을 만들어 당나무를 진정시키곤 해.”
“그럼 끌려 나간 사람들은…….”
“죽었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순서가 될 거야. 너도 봤다시피 이곳에는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 말에 양준의 표정이 변했다. 지금 양쪽 감방에는 열두 명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다른 감방에 갇힌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당나무에 이상이 생길 때마다 이들을 끌고 나가 제를 지낸다면 얼마 안 되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을 게 뻔했다.
“네가 며칠 전에 먹은 열매가 바로 그 당나무의 열매야. 그걸 맛있게 먹고 온몸에 짜증나는 기운이 느껴지는 걸 봐서는 너도 양성 공법을 수련하지?”
구척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양준은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한동안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네. 저들은 감방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기 전까지 널 건드리지 않을 거야. 당나무는 너 같은 사람이 자양분이 되는 걸 가장 좋아하지. 그들은 널 결정적인 순간에 쓸 거야.”
구척은 고소한 얼굴로 냉소를 하며 말했다. 안령아는 괜스레 소름이 돋았다.
“귀띔해 줘서 고마워.”
양준이 공수하며 말했다.
구척은 사악하게 웃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안령아를 보며 말했다.
“내가 너라면 지금 실컷 즐길 거야. 미인이 옆에 있는데도 건드리지 않는 걸 보면 너 혹시 그쪽으로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너 그러면 안 돼. 미인이 실망할 거야.”
그 말에 마족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양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순간, 구척이 얄밉게 느껴졌다. 안령아도 옷깃을 꽁꽁 여미고는 구척을 노려보며 양준의 뒤로 몸을 숨겼다.
*
그날 구척과 대화를 나눈 뒤, 양준은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고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술맛을 들인 구척은 뻔뻔스럽게도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술 두 단지를 요구했다. 양준도 흔쾌히 술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열흘 넘게 지나자, 구척도 전처럼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양준과 호형호제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태도가 많이 좋아졌다. 다만 어이없는 것은 구척이 자꾸 양준에게 안령아를 어찌어찌하라고 부추기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안령아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가여운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갇혀 있는 동안 마족들은 시시각각 목이 날아가지 않을까, 마음을 졸여야 했다.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라도 재미를 찾고 싶은 모양이었다.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양준은 양성 기운의 불안정한 파동을 두 번 느꼈다. 아마도 당나무에 또 이상이 생긴 듯했다. 예외 없이 두 번 다 마족들이 끌려 나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갇혀 있는 마족들은 점점 줄어들었고 사람들의 마음도 점점 무거워졌다. 죽을 날짜가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위기는 무거웠으나, 양준과 구척은 멀쩡했다. 한 명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고, 다른 한 명은 이미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양준은 한가할 때마다 수련에 몰두했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킬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끌려 나가게 되는 날에 필사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소현계에서 살길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지금의 노력도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양준은 입성 경지 이하의 무인들은 안중에 두지 않았다. 만약 그들의 태도가 좋지 않으면 그냥 서혼지충을 풀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이 소현계는 바로 멸망할 것이다. 아마 양족의 고위층들도 이러한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 이를 빌미로 그들과 앉아서 협상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그는 초조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서혼지충은 그의 비장의 한 수였다. 그러니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노출시킬 생각이 없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그 사이 거의 닷새 간격으로 마족들이 끌려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나무가 불안정해지는 빈도가 잦아졌다.
이제 감방에 남은 사람들도 몇 없었다. 양준과 안령아를 제외하고 구척, 그리고 그와 같은 감방에 있는 마족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다음 번에는 그들 차례였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구척마저도 침착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어느 날, 양준과 술을 마시다가 구척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너도 참 남자다운데, 정말 죽을 때가 되면 반항할 거야?”
“내게 반항할 기회가 있을 것 같아?”
“넌 진원이 봉인되지 않았으니 나보다 기회가 많겠지.”
“그렇다면 절대 죽기를 기다리지 않을 거야.”
“그럼 나도 도와줄게. 정말 도망치게 되면 날 위해 복수할 수 있게 우리 아버지를 찾아가서 이곳의 상황을 말씀드려 줘. 이놈들이 우리 마족을 우습게 보지 못하게 할 거야.”
구척은 표정이 일그러진 채 말했다.
양준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그를 힐끗 보았다. 왠지 그에게 숨은 수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찌 봐도 끌려 나간 뒤에 아무런 반항도 못 하고 순순히 죽을 사람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수단은 제한적일 터였다. 그의 말을 들어 보니 자신이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 않는 듯했다.
‘이 자의 도움을 받는다면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군.’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공기 중에서 어지러운 파동이 전해졌다.
양준과 구척, 안령아는 모두 놀란 눈빛을 하고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왔다.”
구척은 심호흡을 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나무가 또다시 불안정해졌다. 지금 감방에는 그들을 제외하고 마족 한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들도 무사할 수 없었다.
곧이어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끼익, 문이 열리고 양족 몇 명이 싸늘한 얼굴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