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0장. 출구는 어디에 있습니까?
양족들은 당나무가 상할까 두려워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지만, 양준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다들 적절한 기회에 당나무가 방심한 틈을 타 한순간에 양준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양준의 말을 듣는 순간, 족장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절했다.
‘이건 수치야. 제 집에서 종족의 보물이자 토대인 당나무가 외부에서 온 녀석한테 미혹되다니. 모든 양족의 치욕이군!’
족장은 양준을 죽이지 않으면 마음속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양준은 냉소했다. 그는 나뭇가지들의 보호를 받으며 아래쪽을 굽어보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저한텐 자격이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식해에서 기묘한 의념이 튕겨 나갔다. 의념은 살기도, 공격성도 띠지 않았다. 하지만 의념이 몇몇 양족을 훑는 순간, 그들은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고 땅바닥에서 뒹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모두 온몸이 굳어지더니 피를 흘리며 죽었다.
나머지 양족들은 얼굴빛이 확 바뀌었다. 족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앞의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기가 가득 서렸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양준이 무슨 수를 썼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실력이 낮지 않은 몇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내 차가운 기운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다시 양준을 바라보는 양족들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지금… 도발하는 것이냐?”
족장이 살기를 가득 띠고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양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미소를 띠고서 말했다.
“전 그냥 당신과 협상할 자격이 있다는 걸 보여준 겁니다.”
그러고는 다시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 인내심이 별로 없거든요. 빨리 답해 주세요. 아니면 입성 경지를 제외하고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죽을 겁니다.”
그 말에 8할의 양족들은 겁에 질려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들의 식해에는 진작 서혼지충이 침투해 있었다.
족장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증오에 찬 시선으로 양준을 매섭게 쏘아보더니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야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원하는 게 뭐냐?”
“한 가지뿐입니다. 저희를 놓아주십시오.”
“족장님, 저놈을 놓아주면 절대 안 됩니다. 이렇게 손실이 막대한데 어찌 저놈이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엉덩이를 툭툭 털고 가게 내버려 둔단 말입니까?!”
곧바로 누군가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맞습니다. 저 자를 죽이지 못하면 우리의 분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저 자를 죽여야 합니다. 설령 당나무에 피해가 간다 해도 저 자를 꼭 죽여야 합니다.”
몇몇 입성 경지의 고수들이 의논할 여지도 없이 양준을 당장이라도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양준은 나지막하게 웃으며 아래쪽에 대고 소리쳤다.
“당신들의 손실이 큰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확도 있지 않습니까. 당나무가 자의식이 생겼습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르죠. 제가 떠나기만 하면 당신들은 다시 당나무와 가까이하면서 인정을 받을 수 있고요. 그러면 앞으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이득을 얻게 될 겁니다.”
양준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당나무가 크게 흔들렸다. 곧이어 나무 줄기 안에서 불만을 품은 의념이 전해졌다. 양준이 자신을 버리겠다고 해서 상심한 듯했다. 양준은 가슴이 철렁해서 얼른 의념을 보내 당나무를 위로했다. 그러고는 계속해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제가 계속해서 남아 있으면 상황은 전혀 다를 겁니다. 당나무가 새로운 생명체로 거듭날 수 있게 제가 도움을 주었기에, 당나무는 지금 저에게 호의적인 겁니다. 저를 이곳에 남게 한다면 전 당나무를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며칠 내지 보름 정도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들은 당나무를 되찾기 어려워지겠죠. 만약 저라면 이처럼 양족 전체의 이익에 위험을 초래하는 사람을 한시라도 빨리 내보낼 것입니다.”
양족들은 모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들의 입장에서 들었을 때, 양준의 말은 거짓일 가능성이 있지만,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당나무에 이런 큰 변화가 생긴 것은 기쁜 일이었다. 만약 방금 전의 손실이 없었다면 이러한 변화는 양족에게 있어서 대단한 경사였다. 당나무가 지능과 신혼을 가지게 되다니, 양족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우린 너를 죽여 화근을 없앨 수도 있다. 네가 죽으면 당나무는 여전히 우리 양족의 것이다.”
족장은 마음이 조금 흔들렸으나, 손실을 떠올리면 결코 양준을 살려주고 싶지 않았다.
“네. 당신들은 확실히 저를 죽일 수 있습니다. 저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도망칠 재주가 없고요. 하지만 전 혼자서 죽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황천길에 오를 겁니다. 당신들이 그 대가를 감당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저를 죽이려면 반드시 당나무도 손상을 입을 겁니다. 당나무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당신들을 다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지금 당나무는 단순하거든요. 만약 당신들이 당나무에 상처를 입히면 평생 기억할 겁니다. 괜히 게도 구럭도 다 잃지 마시죠.”
양준의 일장연설에 족장은 얼굴이 시커메졌다. 화가 치밀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양준을 죽이자고 떠들던 몇 사람들도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만약 당나무가 지능과 신혼이 없다면 당나무가 손상을 조금 입더라도 반드시 양준을 죽이는 게 맞았다. 그러나 지금 당나무에게는 자의식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정말 양준이 말한 대로 당나무가 양족을 싫어해 양성 원기를 흡수하지 못하게 한다면 양족 전체가 끝장날 수도 있었다.
다들 족장에게 시선을 보내며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는 누구도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족장은 한참 동안 생각하고 나서야 음산한 눈빛으로 양준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놈이 간 다음, 당나무가 우리를 인정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제가 왜 그걸 장담합니까? 당신들 스스로 노력해야죠. 우선 지금부터라도 저를 친근하게 대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당신들이 저한테 심하게 굴어서 당나무가 못마땅해하고 있거든요.”
그 말에 맞춰 당나무의 나뭇가지들과 무성한 잎들이 마구 흔들렸다.
양족 고수들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속으로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어쩔 수 없이 다들 적의를 거두어들였지만 낯빛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미소까지 더하면 좋겠군요. 옷깃을 스쳐도 인연인데 우리도 이제는 친구라 해도 되지 않습니까.”
“적당히 해라.”
족장이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양준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좋아. 널 내보내 주마. 앞으로 다신 날 만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족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상황 파악을 잘하시는군요.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제 친구와 마족 두 명도 놓아주세요.”
양준이 칭찬하는 눈빛으로 족장을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족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족들은 왜? 그들은 너하고 아무 상관도 없지 않느냐?”
“제가 또 착하거든요. 남이 어려움을 겪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당나무도 이미 진화를 끝내 지능과 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족을 죽여 제를 지낼 필요도 없는데, 인심 좀 쓰시죠.”
줄곧 양준의 뒤에 숨어 있던 안령아는 그 말에 연신 눈을 희번덕거렸다.
족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령했다.
“마족들을 데려오너라.”
곧이어 누군가 궁전 쪽으로 달려갔다.
양준은 나무 줄기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이윽고 구척과 다른 마족이 끌려왔다. 구척은 싸늘한 낯빛으로 끊임없이 반항했다. 그러나 그의 반항은 오히려 매를 벌 뿐이었다. 도착했을 때, 그는 얼굴이 퉁퉁 부은 것이 적잖게 얻어맞은 듯했다.
“구척!”
양준이 나무 줄기에 서서 큰 소리로 불렀다.
구척은 눈썹을 찌푸리고 올려다보았다. 그는 어정쩡한 낯빛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주위를 훑어보았다.
장내 분위기는 팽팽했다. 구척은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런 때일수록 말실수를 할 수 있으므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저 둘을 끌어올려 와.”
양준이 당나무를 다독이며 말했다.
그러자 기다란 원기 채찍 두 가닥이 구척과 다른 마족을 휘감더니 그들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나무 줄기 위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구척은 나무 줄기에 내려서서 얼른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무슨 상황이야?”
“이제 다 같이 나가려고.”
양준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간다고? 어디로?”
구척의 낯빛이 바뀌었다.
“여길 떠나야지.”
구척은 한참 동안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몰래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가볍게 물었다.
“저들이 허락했어?”
“허락하기 싫어도 허락할 수밖에 없어. 걱정하지 마. 이미 얘기는 다 끝냈어.”
“아닌 거 같은데?! 저들은 널 그냥 잡아먹으려는 것 같더만. 정말 네가 떠나게 가만히 둔대?”
구척은 망연하기만 했다.
양준은 정색하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더 길게 설명하지 않고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출구는 어디에 있습니까?”
족장은 음산한 표정을 하고서 그 말에 깊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양준은 그쪽을 보고는 당나무를 다독였다.
곧이어 당나무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지가 전율할 정도의 묵직한 소리와 함께 당나무는 양준 일행 네 사람을 태우고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뒤로 양족의 고수들이 바짝 뒤따랐다.
구척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얼이 나간 채 당나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또 무슨 재주야? 나무가… 어떻게 스스로 걸을 수 있지?”
“허허, 당나무가 자의식과 지능이 생겼어.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거든.”
“세상에 이런 일이…….”
구척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연신 혀를 내두르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과연 당나무는 원기 기둥을 다리로 삼아 스스로 걷고 있었다. 구척과 다른 마족은 듣도 보도 못한 광경에 한동안 말을 잃었다.
당나무는 움직임이 둔해 속도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족히 반나절이나 걷고 나서야 앞쪽에서 허공의 힘의 파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