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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련전봉-764화 (763/853)

제 764장. 마장 설리

다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는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고, 온몸의 진원도 위험한 기운을 뿜고 있어 등골이 서늘해질 지경이었다.

양준은 실눈을 뜨며 속으로 구척을 멍청이라고 욕했다. 아니 왜 쓸데없이 저런 여인을 건드려서 일을 만든단 말인가. 이곳에 온 뒤, 그는 감히 신식을 펼쳐 살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 여인이 공격하는 순간, 구척이 대단한 고수를 건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은 진작 누군가 자신을 훔쳐본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때문에 호수에서 나오는 순간, 바로 공격을 한 것이었다.

구척은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하고 뺨을 감싸 쥔 채 떠들어 댔다.

“망할 여인네, 감히 날 때려?”

“그래서? 또 한 번 건방지게 나오면 그냥 죽여 버릴 거야.”

여인은 구척을 싸늘하게 흘겨보았다.

“그럴 담력은 있고? 어디 털끝 하나라도 더 건드리기만 해 봐.”

구척이 잔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기운이 맞은편에서 날아들었다. 구척은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에 어깨가 꿰뚫렸다. 이내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구척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멍하니 하늘에 서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설마 상대가 진짜로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을 공격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는 망나니에 호색한, 게다가 무모하기까지 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여인이 연이어 펼친 수단으로 미루어 보아, 설령 그가 전성기라 해도 당해 낼 수 없는 실력이었다. 어깨에 구멍이 뚫리자, 구척은 금세 얌전해졌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지만 더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고 독기 어린 눈빛으로 여인을 쏘아볼 뿐이었다.

“인간? 그런데 언제부터 마족과 인간이 이렇게 붙어 다녔지?”

여인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양준과 안령아를 훑어보다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말했다.

양준은 순간 낯빛이 차가워졌다. 그는 몰래 안령아를 등 뒤에 숨기며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게 온몸의 진원을 돌렸다.

“너희들 진원과 신식이 누군가에게 봉인되었구나. 인간 녀석이 금제를 걸어 놓은 건 아니겠지?”

여인은 콧방귀를 뀌고는 허공에서 사뿐사뿐 걸어 내려왔다. 그러고는 젖은 머리카락을 찰랑찰랑 흔들며 구척과 마족 사내를 힐끗 보았다.

구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마족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해명했다.

“인간 녀석이 한 짓이 아닙니다. 우린 어떤 곳에 잡혀 갔다가 그곳 사람들에게 힘을 봉인 당한 겁니다. 인간 녀석 덕분에 그곳에서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무능하군! 마족이 인간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다니? 너희들이 마강에서 얼굴을 들고 살 자격이나 있어?”

여인의 낯빛이 싸늘해졌다. 그러고는 기다란 손가락을 구부려 기운 몇 가닥을 쏘았다. 곧이어 마족 사내의 몸에는 금세 피 구멍 몇 개가 뚫렸다. 사내는 낮게 신음을 흘리며 반쯤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눈동자에는 놀라움과 두려움, 공포가 서려 있었다.

여인은 살초를 날리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양준의 도움을 받은 게 못마땅해 조금 벌을 준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네 녀석이 좀 재주가 있다는 말이지?”

여인은 흥미가 동한다는 듯이 양준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음산하고 부드러운 신식의 힘이 양준의 온몸을 훑으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깐깐하게 살폈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구만.”

여인은 하찮다는 듯이 양준에게서 신식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냉소했다.

“감히 나한테 무례를 저지르다니 간땡이가 부었구나. 원래는 제대로 혼내 줘야 한다만 오늘 내 기분이 좋거든. 잠시 너희들을 죽이지 않을 테니 다들 나와 함께 가자.”

그러고는 손을 흔들자 수레 모양의 비보가 나타났다. 수레의 한가운데는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는 분홍색 장막으로 감싸여 있었는데 그윽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여인은 사뿐사뿐 걸어 수레에 올라가더니 장막을 사이에 두고 구척과 마족 사내의 몸에 기운 두 갈래를 쏘았다.

곧이어 몸속의 금제가 풀리자 두 사람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인간 처녀, 넌 여기 올라와.”

여인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빼어난 몸매를 자랑하며 나른한 모습으로 안령아에게 손짓했다.

안령아는 경계심을 높이며 양준을 힐끗 보고는 주저했다. 양준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나서야, 안령아는 조심스럽게 수레에 올라갔다.

“너희 세 사람, 수레를 메. 이것도 내가 가르쳐야겠어?”

여인이 나긋하게 말했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양준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구척이 분노하며 말했다.

“네가 뭔데 감히 나를 가마꾼으로 삼아? 내가 누구인 줄 알기나 해?”

“네가 누구면 어때서?! 죽기 싫으면 얌전히 말이나 들어. 아니면 그냥 죽여 버릴 테니까.”

여인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음산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진원이 날름거리는 것이 구척이 감히 거절하면 곧바로 살초를 던질 것만 같았다.

구척은 눈을 부릅떴지만 절대적인 힘 앞에서는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앞쪽에 걸어가 수레를 어깨에 메었다. 양준과 마족 사내도 서로 마주 보고는 어쩔 수 없이 수레 쪽으로 다가갔다.

여인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세 사람은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수레의 침대 위, 안령아는 단정하게 앉아 있었지만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주변의 환경을 살펴보는 한편, 여인의 분부대로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 여인도 안령아와 대화하려는 생각은 딱히 없는 듯 그냥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서 눈을 감고 기분 좋게 쉬고 있었다.

양준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원래는 구척의 힘을 빌려 마강을 안전하게 벗어나려 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이 계획은 틀어진 듯했다. 구척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거 같았다.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반나절이 지나자, 커다란 성곽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성곽은 사막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고, 높은 담벼락은 온전히 모래를 녹여서 만든 것이었다. 때문에, 성곽 전체가 황갈색을 띠고 있었다. 성곽에서는 많은 마족들이 오가고 있었다.

수레가 이곳까지 다다랐을 때에야, 구척은 갑자기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엉겁결에 소리쳤다.

“사성(沙城)? 당신은…….”

“입 다물어.”

여인은 눈꺼풀도 들지 않고 가볍게 호통 쳤다.

구척은 곧바로 목을 움츠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두려움에 싸인 그에게서 더는 좀 전의 방자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양준은 구척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낯빛이 바뀌었다.

곧이어 수레는 사성에 도착했다. 여인의 분부에 따라 그들은 곧바로 성곽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궁전으로 향했다. 궁전은 마치 백 길이나 되는 높은 산에 자리 잡은 것처럼 높이가 몇백 장이 더 되었다.

궁전 앞에 이르러 아래쪽을 굽어보면 성곽 전체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묘한 느낌이 들었다. 궁전의 풍격은 성곽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궁전의 바닥에는 모두 하얀 옥석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용봉이 새겨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휘황찬란했다. 또한 곳곳에 귀한 수정이 드리워 있었다.

수레가 문앞에 이르자, 실력이 강한 마족이 다가와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대인, 돌아오셨습니까?”

여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수레에서 걸어 내려왔다.

“이들은…….”

그 마족은 양준 일행을 훑어보았다. 구척을 보는 순간, 그자의 미간에 의혹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구척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을 보니 구척을 알아본 듯했다.

“구경한테 전갈을 보내라. 아들이 무사하기를 바란다면 몸값을 충분히 챙겨서 바꿔 가라고 해. 음, 그리고 다른 세 사람에 대해서도 알려 줘. 데려갈지, 말지는 그의 일이니까.”

여인은 구척을 힐끔 보더니 덤덤하게 지시했다.

양준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제야 여인이 진작 구척의 신분을 눈치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구척의 신분을 알면서도 구척을 함부로 대할 수 있고, 또한 구경에 대한 호칭으로 미루어 보아 여인의 신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구경은 4대 마장 중의 한 명이었다. 구경을 안중에 두지 않을 정도의 신분이라면 필시 같은 마장일 터였다.

그렇다면 여인은 4대 마장 중 유일한 여인인 설리(雪莉)였다. 이름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외모도, 몸매도 빼어났지만 성정이 악랄하고 손속이 잔인했다. 우연히 만난 여인이 마장이라니, 게다가 구척은 하늘이 무서운 줄 모르고 그녀를 건드렸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몸매까지 훔쳐보려고 했다.

양준은 정말이지 구척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마음의 분노를 풀고 싶었다.

“제가 보기에 구경은 아마 다른 세 사람의 생사는 모른 척할 것 같은데요.”

설리의 부하가 음산하게 웃더니 고소해하며 양준 일행을 바라보았다.

“그냥 전하기만 해. 맞다, 구경한테 인간 녀석이 당신 아들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도 말해 줘. 구경이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처리할지 두고 봐야겠어.”

설리는 특별히 분부했다.

“어, 그건 정말 뜻밖인데요. 마장의 자식이 인간에게 구원을 받았다니. 재미있군요. 그럼 전갈을 보내겠습니다.”

“그래.”

“설 대인, 설 대인……!”

구척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설리가 그를 힐끗 보았다.

“어떻게 좀 의논해볼 수 없을까요? 대인께서 요구하는 몸값은 제가 방법을 마련해서 보내 드릴 테니, 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주세요.”

구척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애원했다. 아버지한테 혼날까 봐 두려운 게 분명했다.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니지.”

설리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뒤돌아 궁전으로 들어가 버렸다. 곧이어 다른 마족 두 명이 다가오더니 양준 일행 넷을 데리고 들어갔다. 각각 단독 별실에 배치했으나 안령아만은 설리 옆에 두었다.

그들은 양족에게 잡혔을 때처럼 다른 것들을 제한받지 않았다. 설리는 그들이 도망치지 못할 거라 자신하는 듯했다. 또한, 양준 일행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루 세 끼 모두 제때에 좋은 음식으로 가져다주었다.

지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양준은 도망치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그는 어쩐지 설리에게서는 도망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안령아가 설리 옆에 묶여 있었다. 안령아를 여기에 남겨 두고 혼자 살길을 찾아 도망칠 수는 없었다.

구척은 자신의 잘못을 인지했는지 온종일 어깨를 움츠리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있었다.

설리는 이미 구경에게 전갈을 보냈다. 같은 마장으로서 구경의 체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직접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다. 양준이 짐작하건대 구경은 그와 안령아의 생사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고, 기껏해야 구척과 마족 사내를 데려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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