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765화 (764/853)

제 765장. 거절할게요

양준은 전에 4대 마장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네 사람 모두 마족의 최정상급 고수로 각각 뛰어난 재주와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각각 동서남북에 자리를 잡고 마강을 지키면서 다들 자신의 영토를 다스리고 서로 간에 왕래가 거의 없다고 했다. 다만, 네 사람 가운데 유일한 여인인 설리는 다른 세 사람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전해졌다. 심지어 마존(魔尊)도 그녀를 싫어한다고 했다. 때문에 설리가 자리한 곳은 척박했다. 천지의 내재되어 있는 기운의 양이나 물자의 풍요로움 모두 다른 세 명의 영토와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양준은 어디서 이런 소문을 들었던지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뜬소문은 아닌 듯했다.

설리의 성곽은 사성으로 사막 근처에 있었고 확실히 한산했다. 게다가 그녀와 구경의 사이도 소문으로 들었던 것처럼 좋지 않았다. 하지만 설리가 마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아, 자신만의 재주와 수단이 있는 듯했다. 이런 여인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때문에 양준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온종일 궁전에 얌전히 있으며 어떤 어긋나는 일도 하지 않았다.

반면 구척은 분수를 모르고 도망치려다 궁전도 벗어나지 못하고 딱 걸렸다. 그는 설리 곁에 있는 고수에게 거꾸로 매달려 겨우 숨이 붙어 있을 정도로 한바탕 얻어맞았고, 족히 한 달 넘게 쉬어서야 겨우 몸이 호전되었다.

이런 눈앞의 사례까지 있다 보니 양준은 더욱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방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수련하던 양준은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얼굴빛이 싸늘해졌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고 입구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방문이 열리고 전에 구경에게 전갈을 보내러 갔던 마족 고수가 들어오더니 양준에게 말했다.

“빨리 나와. 대인께서 찾으신다.”

양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밖으로 걸어갔다.

마족 고수는 걸으면서 뒤돌아 양준을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마치 무척 재미있는 일을 본 것처럼 눈빛에는 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처지에 물어봤자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아예 물어보지도 않았다.

얼마 안 되어 마족 고수는 양준을 대전 안으로 데려갔다.

대전의 앞쪽에는 널따란 의자가 있었다. 의자 위에는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었는데 검붉은 빛을 띠고 있어 호화로워 보였다. 설리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고서 유연하고 아름다운 몸매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뺨을 받친 채, 눈을 감고 쉬고 있는 듯했다.

대전 한가운데서 고급 향료를 태우고 있어 대전 전체가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안령아는 시녀 차림으로 설리의 옆에 서 있었는데, 매우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양준이 들어오자 안령아는 눈을 반짝이며 관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무탈하다는 것을 알렸다. 이곳에 잡혀온 뒤로,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양준은 줄곧 자신의 방에만 있었고, 안령아는 설리 곁에 있으면서 하인 노릇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성 궁전 안에서 오직 그녀와 양준만이 인간이었기에 그녀는 당연히 모든 희망을 양준에게 걸고 있었다. 때문에 혹시라도 그에게 변고가 생길까 두려웠다.

양준이 무사한 것을 보자 안령아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몰래 양준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면서도 감히 어떤 기척도 내지 못했다.

양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구척과 마족 사내도 와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는데 마치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대인, 다 데려왔습니다.”

설리의 부하가 나지막하게 보고했다.

설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그제야 눈을 떴다. 그녀는 차분한 눈동자로 아래쪽을 훑어보더니 천천히 윗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그녀가 움직이는 순간, 상의로 입은 짧은 적삼이 위로 올라가며 희고 평평한 아랫배와 귀여운 배꼽이 드러났다.

양준이 줄곧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것 외에, 누구도 감히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곧이어 설리의 날카로운 시선이 양준에게 꽂혔다. 순간 양준은 얼굴이 데인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평온했다. 설리는 이런 작은 일은 따지려는 뜻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이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구경이 답장을 보내왔다.”

구척은 몸을 흠칫 떨더니 메마른 입술을 오므리며 설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을 실룩거리다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요?”

“하하! 자식이 내 손에 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떻게 나올 거 같으냐? 음, 네 아버지가 몸값을 충분히 지불하고 너를 데려간단다.”

그 말에 구척의 표정이 바뀌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두려움에 떠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행인 것은 드디어 이곳에서 떠날 수 있어서였고, 두려운 것은 집에 돌아가서 한바탕 얻어맞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모순된 감정이 모두 얼굴에 드러나자, 그의 표정은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그럼 저는……?”

마족 사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너도 물론 포함되었지.”

설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활짝 웃으면서 의미심장하게 양준을 바라보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인간 처녀도. 모두 구경이 데려가기로 했어.”

안령아는 순간 당황하다가 곧 기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구척과 마족 사내는 그 말을 듣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가 양준을 보고는 둘 다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양준은 기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음울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물었다.

“마족들은 이렇게 다 대범합니까?”

“엥? 구경이 대범할 리가. 단, 이번 한 번뿐이야.”

설리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양준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몸값을 적잖게 요구했을 텐데요?”

양준은 설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설령 마장이라고 해도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했다.

“그렇게 많지 않아. 하지만 적지도 않지. 구경이 한동안 화를 삭여야 할 거야.”

설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양준을 새삼 다시 본 듯이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 앞에서 양준처럼 냉정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설령 구경의 아들이라 해도 그녀의 앞에서는 소심한 모습으로 벌벌 떨고 있지 않은가. 둘을 비교해 보자, 그녀는 문득 양준이 매우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대담한 것만큼은 다른 마족들보다 나은 듯했다.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갑자기 구척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에 너네 아버지께서 많은 돈을 쓰게 됐군. 나한테 따로 해줄 말은 없어?”

“어? 따로 할 말없어…….”

구척은 순간 당황하다가 감히 양준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표정은 어딘가 찔리는 데가 있는 모습이었다.

“정말 할 말이 없어?”

양준은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재차 확인했다.

구척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마족 사내는 고개를 더 깊이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안령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구척에 대한 양준의 태도가 왜 갑자기 차갑게 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리와 그녀의 부하는 미소를 머금고 구경하면서 그들의 대화를 저지하지 않았다.

“좋아. 그럼 우리 여기서 인사하고 헤어져야겠군. 허허, 참 짧은 우정이었어…….”

양준이 씩 웃었다. 그 말에 구척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양준은 더는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설리를 바라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대인, 제가 만약 구경이 제 몸값을 지불하는 걸 거절한다면, 저를 죽일 겁니까?”

“어? 거절한다고? 감히 거절해?”

설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동자에 감탄과 놀라움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맞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깔깔깔……!”

설리는 온몸을 흔들며 한바탕 웃었다. 그녀의 부하는 미소를 머금고서 의미심장하게 양준을 바라보았다. 별종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잠시 뒤, 설리는 웃음을 거두고서 가볍게 말했다.

“네가 구경을 거절하는 건, 내 수입이 적어진다는 것과 같거든. 그렇다면 당연히 널 죽여야 맞지. 그동안 괜히 널 거두면서 내가 밑진 거잖아. 하지만… 이미 나한테 넘긴 몸값을 도로 가져가라고 할 수는 없지. 게다가 네가 날 대신해 구경의 체면을 확실하게 구겨 놓았잖느냐… 네 목숨은 살려 줄게.”

그녀의 말에 양준의 얼굴이 시커메졌다.

설리의 말은 음험하고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를 아예 구경의 대립각에 세운 것이었다. 이번 일은 사소한 일이지만 구경 같은 유명인사에게는 체면이 걸린 문제였다. 구경이 좋은 마음으로 몸값까지 내주었는데 거절하다니, 만약 소문이 퍼지면 세상 사람들은 구경이 인간인 양준에게 얕보였다고 조소할 것이다. 따라서 마장으로서 인간에게 얕보였다는 소문이 퍼진 구경은 분통을 터뜨릴 게 뻔했다. 물론 그게 진실이 아니어도 말이다.

“네 요구를 들어줄게.”

설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다시 구척과 마족 사내에게 손을 저었다.

“너희 둘은 어서 꺼져. 일각 안에 내 신식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척과 마족 사내는 빛으로 변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궁전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 몇백 장 밖으로 튀어나가더니 전력을 다해 밖으로 달아났다.

설리는 농담을 한 게 아니었다. 그녀의 신식은 줄곧 구척과 마족 사내의 몸에 고정되어 있었다. 일각이 되는 순간, 여전히 그들을 감지할 수 있다면 그녀는 기필코 살초를 펼칠 것이 분명했다. 설리는 그만큼 지독한 여인이었다.

“인간들은 역시 영리하구나. 하지만 네가 구경의 몸값을 거절했으니 살아남아야 할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해 봐. 사성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폐인은 먹여 살리지 않거든.”

설리는 야릇한 말투로 말했다.

“결국 저를 놔주지는 않는군요.”

양준이 입을 삐죽거렸다.

“널 놔줘? 사성에 들어온 인간의 말로는 죽음뿐이야. 다만 네가 좀 남다른 것 같아서 지금은 죽이지 않고 살려 두는 거지. 날 실망시키지 마. 안 그러면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게 어떤 건지 맛보게 해줄 테니까.”

설리는 말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인! 양준과 대화 좀 하면 안 될까요?”

안령아가 급히 설리를 부르며 애원했다.

설리는 눈썹을 찌푸렸지만 거절하지 않고 그냥 나갔다. 묵인한다는 뜻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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