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6장. 제 꾀에 넘어간 거지
설리가 떠나간 뒤, 그녀의 부하는 큭큭거리며 두어 번 웃더니 말했다.
“되도록 짧게 해. 날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하란 말이야. 내가 또 한 성격 하거든.”
그러고는 곧 대전에서 나갔다.
그렇게 대전에는 양준과 안령아만 남게 되었다. 안령아는 양준에게 다가가 살갑게 이것저것 물었다. 양준은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면서 그녀의 현재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안령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설리 대인은 날 그저 곁에 두고 시중들게 할 뿐이야. 내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너… 왜 구경이 우릴 위해 몸값을 내준 걸 거절했어?”
“넌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
“모르겠어. 하지만 설리도 좋은 사람이 아니야. 이곳에 계속 있다가 변고가 생길까 두려워.”
“설리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구경은 아예 나쁜 놈이야. 내가 거절한 건, 살길을 찾기 위해서거든.”
“뭐?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안령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양준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만약 구경이 몸값을 내준 걸 받아들이면 그건 그에게 목숨을 하나 빚진 게 되는 거야. 그러면 나중에 그가 어떤 과분한 요구를 하더라도 거절할 수 없어.”
“하지만… 너도 구척의 목숨을 구해 줬잖아. 그렇게 되면 서로 한 번씩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양쪽 다 빚을 갚은 거 아니야?”
“너 바보구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그거야.”
양준은 그녀의 이마를 톡 쳤다.
안령아는 이마를 문지르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말 좀 제대로 해줘 봐. 난 잘 모르겠어.”
“어휴! 너 여태까지 살아 있는 게 참 대단하다. 다행히 구천성지가 널 성지 내에서 키웠으니 망정이지, 너 혼자 돌아다니다가는 진작 죽었을 거야.”
양준은 고개를 젓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연신 탄식했다. 그 모습에 안령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구척을 구해 준 건 사실이야. 원래 우린 이것을 이용해 마강을 안전하게 떠나야 했지. 하지만 지금 이건 치명적인 문젯거리가 되었어. 구척의 신분을 생각해 봐. 그의 아버지는 구경이고, 마장이란 말이야.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설리가 한마디 했었지. ‘마장의 자식이 인간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다니…….’라고. 이 말의 뜻은 구척은 나한테 도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야. 적어도 구해준 사람이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는 거지. 내가 만약 구경의 의도대로 몸값을 거절하지 않고 따라간다면 며칠 안 돼 길에서 죽을 거야.”
“그럴 수가!”
안령아는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다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구경은 자신의 체면과 위엄에 손상 가는 소문이 밖으로 전해지는 걸 원치 않아. 그러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사람을 죽여 입막음하는 거야. 그럼 증인도 없고, 누구도 그의 아들이 인간에게 구조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거잖아.”
양준은 싸늘하게 웃었다. 눈동자에는 예리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너의 짐작일 뿐이잖아.”
안령아는 여전히 이와 같은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짐작이 아니라 사실이야. 구경은 한 지역의 패자야. 그런 그가 호의를 가지고 아들을 찾아가는 동시에 나와 너를 데려간다고? 너 모르나 본데 그가 지불한 몸값은 결코 적지 않아. 그는 분명 남모를 의도를 가지고 있어……. 만약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구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미 고수들이 매복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린 나타나는 순간 무정하게 죽임을 당하겠지.”
안령아는 몸을 흠칫 떨었다. 저도 모르게 죽음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설리도 잘 알고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에게 귀띔해주지 않았지. 참 지독해…….”
양준은 이를 갈았다.
“그래서 네가 거절했을 때, 그렇게 이상하게 웃었구나. 이제 알겠어.”
안령아는 그제야 사실을 깨닫고서 마음속으로 양준에 대해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번 일에 만약 그녀가 결정할 수 있었다면 분명 기쁜 마음으로 구척과 함께 떠났을 테고, 그쪽에서 살기를 품고 기다릴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구경이 아들을 구해준 자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톡톡히 할 거라 상상했을 듯싶었다.
안령아는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어 화를 내며 말했다.
“구척도 배은망덕한 자식이야. 그 자식도 제 아버지의 심성을 알고 있었을 거 아니야.”
“자식이니 누구보다도 더 잘 알겠지.”
양준은 연신 냉소를 지었다.
“그 자식을 소현계에서 구해주지 말았어야 했어.”
안령아는 도무지 화를 삭일 수가 없었다.
“내 실수야. 그때 당시는 그저 그 자식의 신분과 지위를 이용할 생각만 했어. 결국 제 꾀에 넘어간 거지. 하지만 그 자식도 조금은 우릴 도왔어. 적어도 우리를 사막에서 데리고 나왔잖아. 그 자식이 없었으면 우린 평생 사막에서 헤맸을 수도 있어. 또, 설령 사막을 벗어났다고 해도 다른 마족들에게 잡혔다면 사성에 올 수도 없었을 테고, 지금처럼 안전하지 못했을 수도 있잖아.”
모든 일에는 이점과 폐단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각자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구척이 몰인정한 건 사실이나, 양준도 처음부터 그와 진심으로 친구로 사귈 의도가 없었기에 그의 행동에 실망하지도 않았다.
양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해야 할 건, 어떻게 해야 설리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야. 너 그 여인의 옆에 항상 붙어 있으니까 우리가 이용할 게 없나 잘 살펴봐. 혹여 무의식중에 알아낸 걸로 살길을 찾을 수도 있잖아.”
“알았어.”
안령아는 고개를 거듭 끄덕였다. 그녀는 왠지 모르게 양준과 운명을 같이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더 이야기하자, 설리의 부하가 대전 밖에서 재촉했다. 그제야 양준은 안령아와 헤어져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흐르고 한동안 잠잠했다.
그날 양준이 구경의 호의를 거절한 뒤, 설리는 양준의 존재를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그녀는 두 달이 지나도록 그를 다시 찾지 않고 있었다. 양준은 그동안 날마다 수련하는 것 외에 당나무와 소통했다. 두 달 동안 당나무의 지능은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이젠 의념으로 양준과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당나무는 양준에게서 많은 지식을 배우고 쌓으면서 이제는 예닐곱 살 정도 어린애의 지능을 가지게 되었다. 장난이 심한 것 외에, 모든 게 정상이었다.
당나무가 검은 책 공간에 뿌리를 내리는 바람에, 양준은 수시로 당나무에게서 양성 원기와 신식의 힘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커다란 원기 창고를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과 같아 간편하고 편리했다.
두 달 간의 수련을 거쳐 양준의 실력은 크게 향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준은 신혼 영체를 검은 책 공간에 들여보냈다가 심상치 않은 점을 발견했다. 검은 책 공간에 저장해 두었던 희귀한 광물이 한두 개 정도 사라진 것이다. 그 광물들은 지난번 별 세계에 갔을 때 수집한 것으로, 원래는 비보를 만들려고 했었다. 하지만 줄곧 그럴 시간도 없고, 좋은 연기사도 만나지 못해 그대로 두었었다.
광물의 구체적인 숫자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는 확실히 조금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광물들이 원래 놓여 있던 자리에는 자갈이 널려 있었다. 자갈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이물질이었다. 달리 말하면 광물의 정수는 모두 사라지고 찌꺼기만 남았다는 뜻이었다.
양준은 의구심이 들어 신혼 영체를 나무 줄기 속으로 들여보내 당나무에게 물었다. 그는 당나무가 몰래 광물을 흡수한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뜻밖에도 당나무는 고개를 연신 저으며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일이라고 했다.
양준은 실소하고 더는 캐묻지 않았다. 당나무는 지금 어린애와 같았다. 이 연령대 어린애들이 거짓말을 하는 건 정상적인 일이었다. 양준은 당나무를 나무랄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당나무가 광물이 필요하다고 하면 광물들을 다 줄 수도 있었다.
“그 돌덩이들이 필요하면 흡수해도 돼. 다 써서 없어지면 또 찾아다 줄게. 맞다. 저쪽에 영액도 있어. 매일 한 방울씩만 흡수해. 네 성장에 도움이 될 거야.”
당나무는 금세 기뻐하며 나뭇가지 하나를 뻗어 만약영액 한 방울을 조심스럽게 흡수했다. 잠시 뒤, 당나무의 만족스러움이 양준에게 전해졌다.
양준은 미소를 머금고 당나무를 바라보았다. 바로 이때, 누군가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얼른 당나무에게 간다는 말을 하고 빠져나왔다.
양준이 눈을 뜨자마자 방문이 열렸다. 설리의 부하가 그에게 손짓하며 차갑게 말했다.
“나와, 대인께서 찾으신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방에서 나가 그 사람의 뒤를 따랐다.
양준은 설리 부하의 경지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설리의 신임과 자신에게 주는 압박감으로 미루어 보아 입성 경지는 되는 듯했다. 다만 마족은 인간보다 장수했기에, 설리의 부하는 외모로만 보면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았다. 대략 서른 정도로 보이는 준수한 외모에 때때로 냉소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오직 설리 앞에서만 엄숙한 모습을 보였다. 조금도 넘치지 않고, 경솔하지도 않았다.
“이름이 어떻게 돼?”
양준이 갑자기 입을 열고 물었다.
그 사람은 뒤돌아 양준을 힐끗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대인께서 네 녀석이 대담하다고 하더만 진짜구나. 남에게 잡혀 있다는 현실을 자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이곳에 감금돼 있지만 지금까지 날 어떻게 하지는 않았잖아. 그렇다면 내가 이용할 가치가 있다는 말인데, 뭘 자각해야 되지?”
“영리하네. 맘에 들어. 나는 욱말(郁末)이야.”
그 사람은 웃으며 잠깐 침묵하다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었다.
“너희 마족들은 이름이 하나같이 이상해…….”
“난 너희 인간들 이름이 이상해 보여.”
“너희 대인이 왜 날 찾는 거지?”
“몰라. 혹여 네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 죽이려는 건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 조금 있다 죽으면서 눈도 감지 못하지 말고.”
욱말은 고소해하는 표정으로 경박스럽게 휘파람을 불었다.
양준은 입가를 실룩거릴 뿐,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욱말은 그를 조용히 살펴보며 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양준은 뭔가 남달라 보였다. 다른 이 같으면 그 소리를 듣고 놀라서 반쯤 넋을 놓았을 텐데, 그는 전혀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