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8장. 투기장
투기장은 사성의 가장 큰 상징이었다. 마강의 수많은 거물급 인물들은 자신이 양성하거나 사로잡은 무인들을 투기장에 보내 생사를 건 결투를 시킴으로써 이득을 취했다. 따로 제한이 없고, 마족이면 누구든 참여할 자격이 있었다.
투기장은 원래부터 성정이 잔인한 마족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들은 투기장에서 피를 흘리는 결투를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돈을 벌 수도 있었다. 때문에 투기장 장사는 언제나 호황을 누렸고, 사성은 해마다 수많은 재물과 물자를 모을 수 있었다. 4대 마장 가운데서 설리가 가장 부유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욱말은 양준에게 투기장의 상황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 준 다음 곧 떠나갔다.
양준은 밤새 푹 쉬었다.
이튿날 점심, 욱말이 다시 찾아와 양준을 데리고 나갔다.
양준과 욱말은 해발 고도가 백 장이나 되는 궁전을 떠나 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잠시 뒤,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투기장은 면적이 꽤 넓었는데 주변에는 각종 신비한 금제와 결계가 가득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층층의 높은 계단으로 된 관람석이 있었다. 이 순간, 관람석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수많은 마족들이 관람석에 앉아서 장내 두 무인 간의 결투를 구경하고 있었다.
두 무인은 실력이 그리 높지 않았지만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피 칠갑을 한 상태로 사지도 온전치 않았으며, 서로를 쏘아보며 비보와 무공을 펼쳐 장내를 피로 물들였다.
싸움이 치열해지면 관람석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다.
양준은 대수롭지 않게 두어 번 훑어보고는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욱말은 그를 흘끗 보더니 냉소했다.
“조금 뒤에 이곳에서 싸울 거다. 경지가 비슷한 상대지만 너와 달리 전력을 다할 거야. 하지만 넌 반의 힘밖에 쓸 수 없어. 조심해. 네 생사가 나와는 상관없다지만, 대인은 네가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길 바라니까.”
“알았어.”
양준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관람석 어느 한 곳에서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왔다. 양준이 그쪽을 바라보니 설리가 그곳에 앉아 있었고, 안령아는 옆에서 그녀를 시중들고 있었다.
안령아는 양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입을 틀어막으며 놀랐다. 그러고는 양준을 불렀는지 설리가 곧바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안령아가 곧 입을 다물었다.
양준은 안령아에게 흥분하지 말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욱말은 양준을 데리고 투기장을 지나서 어느 한 지하 통로로 들어갔다. 한참이나 걷고 나서야 겨우 빛을 볼 수 있었다. 통로의 앞쪽이 바로 투기장 내부였다. 설리의 부하들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욱말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욱말 대인, 이번에는 인간 녀석이 출전하는 겁니까?”
얼굴에 병색을 띤 사내가 물었다.
“그래. 자료는 이미 올라갔고, 배당률도 정해졌어.”
욱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색을 띤 사내가 잔인하게 웃으며 양준을 훑어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정신 바싹 차려. 네 상대는 만만치 않아. 세 번 출전해서 다 이겼거든. 동급의 무인 가운데서 이각 이상 버텨 낸 사람이 없어. 너무 쉽게 죽지는 마라.”
“그 상대가 이각 이상 버텨 낸 다음, 다시 말하지 그래.”
양준은 냉담한 낯빛으로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어디서 온 인간 녀석이 이렇게 방자하지. 네 놈이 어떻게 이각 내에 상대를 죽이는지 두고 봐야겠군.”
병색을 띤 사내가 순간 놀라며 말했다.
욱말은 양준을 흘겨보고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 역시 양준이 큰소리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직접 점검해 보아서 양준의 실력이 괜찮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 양준은 절반 정도의 실력밖에 발휘할 수 없기에 살아남으면 대단한 것이었다.
‘저리 큰소리를 치다니, 주제 파악이 전혀 안 됐군.’
양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
투기장 안,
방금 전 싸우던 두 무인의 결투는 이미 끝난 뒤였다. 한 사람은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불구가 되었다. 곧바로 누군가 장내에 들어가 경기장을 청소했다.
승리한 이는 목숨을 겨우 부지한 정도였다. 청소하던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관람석에 가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물었다. 곧 대답이 들렸고, 청소하던 사람은 돌아가서 승리자를 죽였다. 또다시 땅바닥이 피로 물들었다. 그러자 관람석 쪽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한참 동안 기다리고 나서야 욱말이 양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차례다. 대인이 어제 했던 말을 기억해.”
양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욱말이 건네는 가면을 쓰고는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맞은편 통로에서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상대는 건장한 체구에 상체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근육이 불끈불끈 튀어나와 있었다. 근육마다 무시무시한 힘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키도 양준의 두 배는 더 되었다.
상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하늘을 찌르는 살기가 느껴졌다. 마치 기세만으로도 양준을 찢어발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양준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이 마치 암초 같았고, 살기도 그에게 다다르자 스스로 양옆으로 비켜 갔다.
관람석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싸움은 뭔가 신선할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설리 곁에 서 있던 안령아는 주먹을 꼭 쥐고 긴장한 모습으로 지켜보았다.
잠시 뒤, 두 사람은 십 장 정도 떨어진 거리에 멈춰 서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맞은편 사내도 인간이었는데 어떻게 마강에 잡혀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욱말의 말에 따르면 투기장에 나서는 무인들은 대다수가 양준처럼 잡혀 온 이들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남과 죽기 살기로 싸워야 했다. 일부는 스스로 마족의 거물급 인물의 휘하에 들어가 이익과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고, 또 일부는 거물급 인물이 스스로 양성하는 무인들이라고 했다. 어떤 연유로 투기장에 들어섰든 간에 마지막 목표는 하나뿐, 상대를 죽이는 것이었다.
“왜 제 얼굴로 나서지 못해? 겁쟁이. 흐흐, 무릎을 꿇고 절 세 번만 하면 목숨은 살려주지. 어때?!”
맞은편 사내가 갑자기 비아냥거리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마치 우레처럼 양준의 귀청을 때렸다. 큰 소리로 상대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은밀하게 신식의 공격도 섞여 있었다. 만약 방심했다가 신식 공격에 당하면 싸울 의지를 잃어버려, 상대가 공격할 때 반항할 힘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꼼수는 양준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사내의 말에 그는 그저 냉담하게 바라볼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몸을 움직이고, 진원도 돌려 보면서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욱말이 손을 쓴 바람에 지금 그의 진원 운행 속도도, 몸의 반응도 매우 느렸다. 금제를 풀지 않으면 전성기 수준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수준으로도 눈앞의 사내를 대적할 수 있을 듯했다.
“너 귀먹었어?”
사내는 양준이 대답하지 않자 다시 호통을 쳤다.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준의 신형이 움찔했다. 곧이어 은밀한 살기가 옆쪽에서 습격해 왔다. 사내의 미간에 음산하고 차가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입꼬리를 천천히 말아 올리더니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쿠웅-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양준의 일격은 상대의 허리 쪽을 향했다. 하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내의 몸은 바위처럼 단단했는데, 그 반동력에 양준의 팔이 오히려 저릴 정도였다.
상대는 실력이 낮지 않았다. 양준은 그제야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투기장에서 3연승을 한 만큼 사내는 싸움 경험이나 능력이 일반인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진작 죽었을 터였다.
양준이 미처 초식을 거두어들이기도 전에 사내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언제 들어 올렸는지 알 수 없는 한쪽 손날에 온몸의 진원을 모아서 매섭게 아래쪽으로 내리쳤다.
진원이 용솟음치며 허공에서 커다란 망치 모양으로 변했다. 공격이 닿지도 않았는데 투기장의 땅바닥이 아래로 꺼져 들어갔다. 이 일격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알 수 있었다.
양준의 표정이 흔들렸다. 반응이 느려 손을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곧이어, 손날이 양준의 팔을 찍었다.
뚜욱-
소리가 울려 퍼지며 양준의 팔이 끊어져 아래로 처졌다. 그제야 그는 겨우 뒤로 물러서며 상대와의 거리를 넓힐 수 있었다.
관람석에서 야유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족들은 양준이 가면을 쓰고 나타난 데다가 침착한 모습을 보여 무슨 특별한 재주라도 있는 줄 알고 기대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단 일격에 팔이 끊기다니, 너무나 실망스러운 광경이었다.
“아악!”
안령아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에 걱정을 드러냈다.
설리는 실눈을 하고서 아래쪽의 양준을 바라보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일격에 팔이 부러진 양준이 몸을 가누기 무섭게, 상대가 그의 앞으로 달려갔다. 사내의 굵직한 팔에는 검은 번개가 번쩍였고, 팔뚝은 무시무시하게 변해 있었다. 건장한 몸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기운이 배어 나왔다. 그는 가슴을 서늘케 하는 한기를 손바닥에 세차게 주입했다. 그의 손바닥에는 곧 검은 원기 덩어리가 나타났다. 원기 덩어리는 세숫대야만 했으며 살기등등했다.
상대는 두 손을 휘두르면서 곧바로 양준을 그 속에 감쌌다. 그와 동시에 번개가 무시무시하게 내리쳤다. 상대는 이 초식으로 양준을 죽이려는 모양이었다.
양준은 전혀 반항할 힘이 없었다. 그는 양옆으로 옮겨 다니며 검은 번개의 공격을 피하려 했으나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이내 양준의 온몸 곳곳에 손바닥 자국이 찍히고 피가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에 관람석에서 야유 소리가 더 거세졌다. 그들은 피가 들끓는 대등한 결투를 선호하지, 이런 일방적인 싸움을 싫어했다. 양준의 보잘것없는 실력은 그야말로 질타받을 만했다. 요행 심리를 안고서 그에게 판돈을 걸었던 마족들은 듣기 거북한 쌍욕을 퍼부었다. 심지어 설리마저도 고운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서 차가운 표정이 되었다.
‘지난번에는 뜻밖의 선전이었나? 아니면 동급의 무인과 싸우는데 어떻게 이처럼 일방적으로 얻어맞을 수 있지?! 이 정도 공격도 받아 내지 못한다면 살아남을 수가 없는데… 역시 폐물이었군!’
설리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며 점차 양준에게 흥미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