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0장. 이미 정해져 있는 결과
투기장,
얼마나 많은 이들의 피로 물들었는지 바닥은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고, 곳곳에는 울퉁불퉁한 싸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일부 내부 정보를 얻어들은 마족들은 일찍부터 관람석에 앉아서 기다렸다. 그다지 치열하지 않은 결투 몇 경기를 보고 나니, 지하 통로에서 가면을 쓴 인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순식간에 환호성이 터졌다.
지난 몇 달 동안, 매번 막판까지 결과를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한 경기를 선사한 양준은 사성에서 이미 유명인이나 다름없었다. 오늘의 경기 중 압권은 양준과 다른 한 고수의 혈전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의 이번 상대는 초범 경지 3단계 고수라고 했다.
투기장이 개설되고 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경지 차이가 많이 나는 결투는 없었다. 족히 작은 경지 두 개나 차이가 났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 이 혈전의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십여 차례나 되는 양준의 결투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다시 한번 기적을 만들기를 기대했다. 그들은 종족 간의 은원과 상관없이 양준의 활약에 짜릿함을 느꼈다.
*
관람석,
“저 자가 열몇 경기를 연승하고, 그것도 매번 구사일생으로 이겼다는 인간 녀석인가?”
한 입성 경지 고수가 실눈을 뜨고서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옆사람에게 나지막하게 물었다.
“네, 풍표(豊彪) 대인. 저놈이 그런 활약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족의 많은 정예들도 저놈의 백분의 일에 미치지 못할 겁니다.”
옆사람이 얼른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오늘이 지나면 놈은 시체일 뿐이다.”
풍표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양준이 계속해 살아 있는 것을 바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대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번 상대는 그전과 다르지 않습니까?”
옆사람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다가 걱정되는지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저놈은 설리 대인이 양성한 거 아닙니까? 정말 죽인다면 설리 대인이 탓하지 않을까요……?”
“그럴 리 없어. 이번 일은 구경 대인이 지시한 거고, 어제 설리의 행궁을 찾아가서 의논했어. 설리가 직접 동의한 일인데 탓할 리가 없지.”
풍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말을 들은 옆사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구경 대인은 왜 인간 녀석을 이처럼 신경 쓰는 거지?!’
양준이 구경의 아들을 구해 주었다는 사실은 극소수의 사람만 알고 있었다. 풍표가 이번에 파견되어 일을 처리하는 것도 비밀리에 진행되었기에 풍표의 옆에 앉아 있는 마족은 그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설리가 구경과 사이가 좋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시하게 이런 사실을 까밝혀 구경을 내리누르려고 하지 않았다. 싸우려면 진정한 실력으로 대항해도 충분히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대인, 욱말이 왔습니다.”
옆사람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풍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욱말이 미소를 지은 채 멀지 않은 곳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그는 착지하고서 풍표의 옆에 털썩 앉았다.
두 사람은 모두 입성 경지 1단계이고 윗사람들이 서로 관계가 좋지 않다 보니, 둘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다. 서로 마주 보는 순간, 불꽃이 튀었다.
“오랜만이야.”
풍표가 차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욱말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서 인사를 했다.
“그래, 오랜만이군. 그런데 이렇게 보기만 해도 화가 나네. 그냥 죽여 버릴까 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풍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독기를 품은 눈빛으로 욱말을 바라보았다. 온몸의 진원이 꿈틀거렸다.
욱말은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오늘은 싸우러 온 거 아니고, 뭘 좀 물어보려고.”
“뭘 물어?”
“보아하니 이번 결투에 매우 자신이 넘치는구만.”
“알면서 왜 물어.”
“우리 사성 투기장에서는 도박도 할 수 있어. 그렇게 자신 있으면 판돈을 걸지 그래? 결투가 끝나면 돈도 벌고 좋잖아.”
“네가 알려주지 않아도 진작 정석 20만 개를 걸었어.”
풍표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욱말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시 큰손이야. 사성에서 한 번 크게 당겨 보려는 거구만.”
“왜 감당 안 돼? 그 정도도 감당이 안 되면 판돈을 뺄 수도 있어. 네가 사람들 앞에서 사과만 하면 말이야.”
풍표가 경멸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웃기는 소리. 사성에서 이 장사를 시작한 이상, 얼마라도 다 감당할 수 있어. 다만 보기 드문 기회인데 판돈을 좀 더 걸지 그래?”
욱말은 말을 마치고 공격성을 띤 눈빛으로 풍표를 바라보았다.
풍표는 낯빛이 차가워지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판돈을 더 늘리라고?”
“그래, 네 몸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어. 비보가 많던 걸로 기억하는데?”
풍표는 미간을 찌푸리고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욱말을 바라보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인간 녀석한테 자신이 있는 모양이야.”
“딱히 장담할 수는 없어. 이기거나 지겠지. 확률은 반반이잖아. 도박이니만큼 그만한 담이 있나, 없나가 문제일 뿐이야.”
풍표는 욱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는 물과 불 사이인 상대가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화를 참을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모든 비보를 다 걸지.”
그러고는 손을 뻗자, 빛무리가 흐르는 갑옷, 놀랄 만한 원기 파동을 내뿜는 기다란 창, 검은 자가 손바닥에 나타났다. 그는 세 가지를 모두 욱말에게 건넸다. 세 가지 물건은 모두 성급 비보로, 어마어마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모두 풍표가 가장 믿고, 애용하는 비보였기에 만약 이번 도박에서 지면 그 자신의 전투력도 크게 떨어질 수 있었다.
성급 비보 세 개를 건네고서 풍표는 심지어 건곤대마저 함께 건네며 냉소했다.
“기왕 도박한 김에 확실하게 해야겠지? 안 그래?”
욱말은 순간 눈가가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미소를 띠고 물건들을 건네받은 다음, 더 말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풍표는 욱말을 저지하지도 않았고, 증명서 같은 걸 적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둘은 서로 못마땅해했지만 구두 약속이라도 지킬 것은 지켰다.
*
잠시 뒤, 욱말은 설리 곁으로 돌아왔다.
“처리했어?”
설리는 아래쪽 경기장 한가운데 서 있는 양준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네. 풍표는 모든 재물을 걸었습니다. 대인, 저 녀석한테 그리 자신이 있습니까? 그동안 뜻밖의 활약을 보여준 건 사실이지만, 이번만은 저 녀석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놈이 죽는 건 괜찮은데, 풍표가 이렇게 많은 재물을 모두 걸어서 우리 사성도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도 몰라.”
설리의 눈동자에는 망연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욱말은 깜짝 놀랐다.
4대 마장 중 한 명이자 세상에서 몇 안 되는 고수로 설리는 안목이 남달랐고 언제나 정확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나도 도박하는 거야. 겉으로 보면 저 녀석은 죽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줄곧 옆에 서 있던 안령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얘가 시종일관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거든.”
욱말은 저도 모르게 안령아를 힐끗 보았다. 사실이었다. 오늘 양준이 강적을 만난다는 것을 아는 데도 안령아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설리는 안령아에게서 일부 정보를 탐지한 것이었다.
“얘한테 몇 번이고 저 녀석의 실제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어. 그럴수록 난 더 궁금하고 말이야.”
설리는 손을 뻗어 안령아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안령아는 깜짝 놀라 사색이 되었다.
“좀 말해 봐. 녀석이 전에 이 정도 상대와 싸운 적 있어?”
설리가 성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호통 쳤다.
안령아는 순간 넋이 나간 듯했지만 곧바로 저항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양준이 남성고에게 추격당하고, 소현계 안에서 양족의 많은 고수들과 싸우던 광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끊임없이 고개를 저었다.
설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얘는 뭔 대단한 공법을 수련했는지 의지력이 장난 아니야.”
“녀석은 이 정도 고수와 싸운 적이 있는 게 확실합니다. 게다가 아무 일 없이 무사했고요. 아니면 이 계집애가 이렇게 태연할 수 없습니다.”
“그래. 이번에 녀석이 죽지 않으면, 머지않은 미래에 반드시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될 거야.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마존 정도가 되어 한 지역을 지배할 테고.”
설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욱말은 몸을 흠칫 떨었다.
“녀석이 그 정도입니까?”
“녀석에게는 잠재력이 있어.”
설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에는 한기와 살의가 스쳐 지나갔다.
“아쉽군요. 이런 인재가 우리 마족이 아니라니. 우리 마족이면 잘 양성할 수 있는데.”
욱말은 설리를 오랫동안 모셨기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자질이 출중하고, 역경을 꿋꿋이 헤쳐 나가며 그 가운데서 점점 더 강해지다니, 이런 인재는 일찍 싹을 잘라야지 아니면 나중에 마족 전체에 타격을 입힐 수 있었다. 오늘 양준은 이기든 패하든, 결과는 이미 결정돼 있었다. 설리는 이미 그에게 살심이 일었던 것이다.
욱말은 경기장에 반듯하게 서서 상대를 기다리는 양준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맞은편 통로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사내는 느긋하게 걷는 듯했지만 속도가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양준과 멀지 않은 곳에 도달했다.
사내는 장대한 체구에, 몸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옷을 걸쳤고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닿아 있었다. 그의 표정은 냉담했지만 눈동자는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또한 하늘을 찌르는 살기가 그의 몸에서 배어 나왔다. 기운이 은은하고 온몸의 진원도 매우 순수한 것이, 일반 초범 경지 3단계보다 훨씬 강한 듯했다.
양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얼핏 보아도 사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목숨을 내걸고 싸워야 할 듯했다.
사실 그에게는 서혼지충이 있어 입성 경지 이하의 상대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렇게 많은 마족들 앞에서 서혼지충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오직 자신의 수단을 사용해 정면으로 상대와 싸워야만 했다. 또한 양준 역시도 그동안 수련한 성과를 점검해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