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1장. 적효
양준이 상대편 사내를 살피는 동안, 사내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사내의 시선이 오르내리며 양준을 세심히 훑었다. 가면 때문에 얼굴은 볼 수 없지만 양준의 몸에서는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다. 또한 기운은 매우 짙고 뚜렷했으며, 자신보다 경지가 높은 적수를 상대하는 데에도 가면 아래 눈동자에서는 뜨거운 전의가 불타고 있었다.
‘절대 평범한 상대가 아니군!’
사내는 잠깐 감지해 보고 곧 알아차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신중함이 스쳐 지나갔다.
경지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상대는 싸우고 싶어 안달했다. 보통 그런 경우, 건방을 떠는 것이거나, 자신이 있거나 두 가지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리고 투기장에서 열몇 경기를 연승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첫 번째 경우는 아닐 것이다.
‘인간 녀석이 정말 초범 경지 1단계 수준으로 나와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사내는 왠지 이 상황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관람석,
사내가 걸어 나오자, 사방팔방에서 수군거렸다. 적지 않은 마족 무인들은 사내를 가리키며 놀라움과 함께 흥분을 표했다. 사내의 신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저 자는 구경 대인의 부하 적효(荻梟) 아닌가?”
“맞네. 전에 청료성에 갔다가 만난 적 있어. 적효가 맞아.”
“어떻게 투기장에 나타났지?”
“구경 대인 휘하에서는 입성 경지 이하 무인 중 제일이라고 전해지고 있어. 한 끗 차이로 아직 입성 경지에 진급하지 못했다고 하던데.”
“인간 녀석이 적효와 상대하다니. 적효의 수단은 일반적인 초범 경지와는 전혀 다르지. 구경 대인 휘하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공로를 많이 세워 입성 경지 고수와도 대련할 수 있다고 전해 들었어.”
“안타깝군. 오늘 이후로는 투기장에서 더는 가면 녀석의 활약을 볼 수 없겠어.”
“그깟 인간 녀석, 죽으면 죽는 거지. 적효가 어떻게 녀석을 죽이는지나 구경합세. 저 녀석이 너무 오랫동안 날뛰었단 말이야. 정말 우리 마족에 저 녀석을 이길 사람이 없겠어?”
“맞네, 맞아. 나도 녀석에게 호감이 있지만 어쨌든 인간이지 않는가.”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양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상대가 마족 가운데서 이 정도로 명성을 떨친 인물일 줄 몰랐던 것이다. 구경이 이런 사람을 보내 자신을 대적하는 것을 보면 이 일을 매우 중히 여기는 듯했다.
적효가 갑자기 씨익 웃었다.
“네가 초범 경지 2단계 상대 열몇 명을 연이어 이겼을 뿐만 아니라 매번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서로 종족이 다르지만 그런 너를 감탄해 마지않아. 정말 기회가 된다면 친분을 쌓고 싶을 정도야. 하지만 구경 대인의 명을 받고 네 목숨을 취하러 온 몸이라 어쩔 수가 없어. 날 너무 탓하지 마라.”
양준은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 그럼 시작하지.”
적효는 가볍게 공수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는 귀신처럼 사라져 버렸다.
양준의 낯빛이 순간 변했다. 그는 급히 제자리에서 물러나 순식간에 몇십 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러고는 진원이 용솟음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아래쪽을 힘껏 내리쳤다. 포악하고 천지를 무너뜨릴 것 같은 힘이 땅속을 향했다.
쿠웅-
투기장 전체가 흔들렸다. 충격 여파가 변두리까지 전해졌지만 금제와 결계에 막혔다. 투기장에는 순식간에 깊이가 십몇 장에 달하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그때, 구덩이에서 차가운 빛이 반짝이더니 공간을 가르며 눈 깜짝할 사이 양준의 가슴팍을 찔렀다. 양준은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렸다. 그는 몇 걸음을 물러서서야 무거운 표정으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 쪽에는 밤알 크기의 상처가 생겼고, 피가 철철 흘러 옷가지를 물들였다.
비명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들려왔다. 많은 이들의 눈에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들 적효의 강한 실력에 놀랐던 것이다.
적효는 무슨 신법을 펼쳤는지 순간 모든 이의 눈앞에서 사라져 땅속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가 느긋하게 날린 일격도 번개같이 날카롭기 그지없어, 양준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부상을 입었다.
양준은 투기장에 발을 들인 뒤 지금까지 열몇 차례나 싸웠다. 매번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으며 마지막에는 너덜너덜한 모습이었지만, 한 번도 오늘처럼 위험한 적은 없었다. 지금 그는 단 일격에 상처를 입게 되었다. 게다가 상처도 가볍지 않은 듯했다. 양준의 안색이 창백해졌고 한참을 숨을 고르고 나서야 겨우 진정되었다.
적효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양준을 바라보았다. 마치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으로 보아 지금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적효는 원래 이 일격으로 양준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그가 전투력을 잃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뜻밖에 상대는 그의 일격을 버텨 내었던 것이다.
‘좀… 묘한 구석이 있군. 육신이 단단해 위력을 해소한 듯한데?!’
“대단하네. 인간 중에도 너 같은 이가 있다니.”
적효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너도 괜찮네.”
“자! 다시!”
적효는 나지막하게 울부짖으며 양준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곧이어 파괴성을 띤 용오름들이 갑자기 그의 주변에 나타났다. 용오름마다 하늘을 찌를 듯했고 그것들이 나타나는 순간 투기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땅바닥의 자갈들이 그 속에 휘말리며 용오름의 위력이 점점 더 커졌다. 더할 나위 없이 살벌한 기운이 적효의 몸속에서 배어 나오며 용오름들도 순식간에 검게 변했다.
투기장의 하늘에는 어느 샌가 먹장구름이 나타나 하늘을 가렸다. 장내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이내 용오름에서 바람이 칼처럼 쏘아졌다. 그것들은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강한 기세로 서로 부딪치며 번쩍번쩍 불꽃이 튀었다.
슈욱- 슈욱- 슈욱-
칼날 같은 바람은 한순간에 조금의 틈도 없이 양준을 꽁꽁 감쌌다.
양준이 낮게 울부짖자 그의 발밑의 땅바닥이 순간 꺼져 내려갔다. 그의 손가락에 양액 한 방울이 배어 나왔고, 손으로 휙 긋자 그의 머리 위로 방패가 나타났다.
그때, 양준을 감싸고 있던 칼날 같은 바람들이 그를 뒤덮으며 공격했다. 양성 원기로 만들어진 방패는 끊임없이 형태가 바뀌며 양준을 끝까지 보호해 주었다.
관람석의 마족들은 다들 놀라서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양준은 초범 경지 1단계밖에 안 되는데, 초범 경지 3단계인 적효의 공격도 버텨 내면서 전혀 패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적효는 일반적인 마족이 아니었다. 그는 구경 휘하의 핵심 고수로 마족 전체에서 입성 경지 이하 무인 중 제일이었다. 그의 손에 죽은 고수는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그는 구경의 중점 양성 대상이었고, 미래의 유력한 그의 오른팔로서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의 신분과 지위, 힘은 보통의 초범 경지 무인이 견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관람석에 있어도 마족 무인들은 적효의 무시무시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힘도 양준의 진원으로 만들어진 방패를 뚫지 못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인, 과연 녀석의 잠재력이 대단하군요. 이전 결투에서 녀석이 실력을 감췄던 게 맞습니다.”
욱말은 눈을 반짝이며 낮게 말했다. 그러자 설리의 눈동자에 음산하고 잔인한 빛이 서리더니 차갑게 말했다.
“진원만으로도 적효의 공격을 막아냈어. 녀석의 진원의 강도와 순수도는 적효 못지않아. 대단해.”
설리 곁의 무인들도 양준을 예의 주시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직 안령아만이 고뇌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양준에 대한 칭찬에서 그녀는 양준을 경계하는 설리의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이번에 양준이 눈부신 활약을 보일수록, 그를 죽이려는 설리의 마음은 더욱 단호해질 것이다. 하지만 적효의 손에 져도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상황이든, 양준의 처지는 매우 위험했다. 안령아는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싸울 재미가 나는군.”
적효는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공격을 막아내는 양준을 바라보며 오히려 기뻐했다. 사실 구경이 자신에게 양준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에는, 왠지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거 같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성에 와서 양준의 경기 성적을 듣고 나서야 한 번 상대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그냥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거지, 여전히 양준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적효는 양준이 자신과 제대로 겨룰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싸움을 즐기는 사람으로, 피비린내를 갈구했다. 그리고 상대가 처절하게 반항하다가 무기력하게 몸부림치며 씁쓸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이 순간, 적효는 양준을 호적수로 보았고, 마음도 미묘하게 변했다. 동시에 그의 몸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힘이 많이 강해졌다. 그의 주변을 맴돌던 용오름은 윙윙 소리를 내며 검은 교룡들처럼 서로 얽혀 들고 융합되어 거대한 태풍을 이루었고, 그대로 투기장 전체를 뒤덮고 휘몰아쳤다.
외곽의 금제와 결계는 기운의 충격에 의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잔물결을 일으켰다. 금제와 결계는 모두 설리가 직접 설치한 것이었기에 적효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것들을 훼손시킬 수는 없었다. 때문에 관람석의 마족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고 여전히 흥미진진하게 결투를 구경했다.
양준은 용오름에 온전히 뒤덮여 있는 상태였다. 그 안에서 바람이 칼날 같이 휘몰아치자, 수없이 많은 날카로운 기운이 그를 찢어발기려고 했다. 그 속에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죽음의 기운도 섞여 있었다. 도망칠 곳도, 피할 곳도 없었고, 양준 또한 피할 생각이 없었다. 곧이어 양액으로 이루어진 방패가 세찬 공격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그와 동시에 양준은 곧바로 칼날 같은 바람에 감싸였다. 이내 옷이 찢기고 피가 튀었다. 한순간에 그의 몸에는 수많은 상처가 생겨났고, 옷가지도 너덜너덜해져 볼품이 없었다.
적효는 미소를 지었다. 양준을 지켜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이 어떤 감정도 띠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죽어야 할 양준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더니 고개를 살짝 떨군 채, 음산하고 독기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목구멍을 찢고 나오는 듯한 웃음소리는 기괴해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