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2장. 혈전
양준은 손을 뻗어 너덜너덜해진 옷가지를 던져 버리고 단단한 몸을 드러냈다. 온몸의 피와 살이 꿈틀거리고 힘이 모이며 기운이 넘쳤다. 그는 칼날 같은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가운데 서 있었지만, 바람의 공격을 받아 내며 전혀 패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힘이 그리 강하지 않은 것 같군.”
관람석이 소란스러워졌다. 마족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이번에 적효가 공격하면 짧은 시간 내에 양준을 이기거나 심지어 죽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양준은 용오름에 완전히 뒤덮여 있었지만, 그의 몸에는 자그마한 상처들이 가득 생긴 것 외에 그리 큰 상처가 없었다. 그의 육신 강도는 적효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 낼 수 있는 수준인 듯했다.
모든 이들이 혀를 내둘렀다.
양준의 도발에 적효의 얼굴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는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언제까지 버티는지 한 번 보자.”
그러고는 두 손을 춤추듯 흔들었다. 그러자 투기장 전체에 휘몰아치던 용오름들은 마치 생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사방팔방에서 일제히 양준에게 몰려들었다.
용오름들은 양준에게 다가가는 동시에, 서로 융합되면서 커지더니 양준의 근처에 왔을 때는 살기로 가득 찬 거대한 흑룡의 형상이 되었다. 그렇게 마치 거대한 흑룡처럼 꿈틀거리며 양준에게로 달려들었다.
“진원으로 용을 만들어? 나도 있거든.”
양준은 씩 웃었다. 이윽고 우렁찬 용 울음소리와 함께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용머리가 떠올랐다. 황금빛이 눈을 찌를 듯이 반짝였고, 기세가 매우 거셌다. 용머리가 꿈틀거리면서 곧 더욱 길고 튼튼한 금빛 교룡의 몸통이 나타나더니 흑룡과 맞부딪치며 서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투기장의 하늘은 한순간에 황금빛과 검은빛으로 뒤덮였다.
양준의 교룡은 등 뒤의 새겨진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으로, 원래는 입마 상태에서만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 빙종에서 소안과 혼교를 진행한 다음부터는 수시로 마음대로 불러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금룡 안에는 양준의 의념이 섞여 있기에 적효의 단순한 무공과 달리 역동성과 살상력을 지니고 있었다.
용 두 마리가 겨루자 결투 장면은 더욱 치열하고 폭발적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 같은 장관에 매료되어 눈도 깜짝하지 않고 투기장 하늘을 지켜보았다. 다들 어느 교룡이 더 강할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쾅- 쾅-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빛이 얽히면서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처럼 위력이 무시무시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용오름은 금룡에 억제된 듯이 계속해 물러가더니 곧 색상이 옅어졌다. 양성 원기는 마기의 천적이었다. 금룡의 몸에서 발산되는 기운에 마족들은 모두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이때, 문득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투기장에서 그림자 두 개가 순간 맞붙었다가 다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피가 땅을 적셨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늘에서 싸우는 두 교룡에 쏠려 있는 동안, 양준과 적효가 서로 맞붙어 전력을 다해 한참 동안 대적했던 것이다.
무지막지한 기운이 폭발하면서 투기장의 곳곳을 덮쳤다.
서로 갈라선 가운데, 양준은 몸을 구부린 채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철철 흐르며 살을 에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찰나의 격돌에도 그는 자신의 몸이 천만 갈래의 공격에 꿰뚫린 것만 같았다. 드러난 상체에는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들이 가득 나 있었다.
적효는 구경 휘하의 핵심 부하로서 손색이 없었다. 더욱이 초범 경지 3단계의 실력에 일반인을 뛰어넘는 전투력과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양준이 힘든 것만큼 적효도 멀쩡할 리 없었다. 적효는 팔과 목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온몸의 기운이 거세고 어지러웠으며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숨을 고르던 두 사람의 눈동자가 동시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순간 두 사람을 사로잡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었다.
줄곧 관람석에 단정하게 앉아 있던 설리는 양준의 배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떨리는 눈동자로 양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인!”
욱말은 설리의 이런 모습을 보고 얼른 불렀다.
설리는 눈썹을 잔뜩 찌푸리더니 심호흡을 하고서 경악에 찬 얼굴로 계속해 한참을 더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 도로 앉았다. 설리가 왜 갑자기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욱말은 의아함을 금할 수 없었다. 양준이 뜻밖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는 하나, 설리가 이처럼 경악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인은 뭘 본 거야?’
욱말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다시금 아래쪽에서 벌어지는 결투를 쫓았다.
장내는 살의로 가득 찼다. 관람석에 서 있어도 살의가 뚜렷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욱말과 같은 고수도 온몸의 땀구멍을 닫아 의식이 살기에 영향받는 것을 피해야 했다.
*
적효와 양준은 막상막하였다. 이번 싸움은 끝나기 전에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짙은 마원이 적효의 몸속에서 배어 나와 그의 주변을 검게 물들였고, 마원에 내재돼 있던 여러 가지 사악한 기운이 조용히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반면 양준은 작열하는 태양처럼 양성 원기로 자신의 주변을 보호하며 상대의 마원이 침투하는 것을 저지했다. 서로 상극인 기운이 부딪치자 ‘촤르륵, 촤르륵’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서로 엇비슷한 수준이었기에 누구도 감히 방심하지 못했고,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이윽고 귀청을 때리는 포효가 울려 퍼지더니 곧이어 하늘을 찌르는 살기가 용솟음쳤다. 오직 살심만 남은 양준이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상대를 죽이려는 생각뿐이었다.
양성 원기가 미친 듯이 퍼져 나가며 순식간에 상대의 마원을 억제했다.
적효는 낯빛이 크게 바뀌더니 몸을 날려 양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죽음의 기운이 내재된 손바닥으로 양준의 머리 위를 덮었다.
땅바닥은 순식간에 가루가 되었다. 양준은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그의 손에는 마찬가지로 진원이 날름거렸다. 곧이어 순수한 진원이 적효에게로 날아들었다.
투기장 안의 두 사람은 어떤 화려한 초식도 없이 자신의 모든 재주를 선보이며 얽혀서 싸웠다. 적효의 경지는 양준보다 작은 경지 두 개가 더 높았다. 하지만 마원이 양준의 양성 원기에 억제되어 십 할의 힘을 써도 팔 할의 위력만 발휘되었다.
두 사람이 치열하게 싸울수록 퍼져 나오는 기운이 어지러워 둘의 신형과 기운을 모두 뒤덮었다. 관람석에서는 어렴풋한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만 볼 수 있었고,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혈전이었다. 피가 끊임없이 흩뿌려졌고, 간혹 폭발음과 나지막한 신음이 섞여서 들려왔다. 양준이고, 적효고 둘 다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다. 이런 치열한 싸움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속으로 걱정하기까지 했다.
적효는 각종 절묘한 마족의 무공을 펼쳤고, 양준은 힘들게 피했다. 양준의 수단도 약하지 않았고, 적효 역시 양액의 변화무쌍한 공격을 다 막아내지는 못했다.
두 그림자가 한데 엉겨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고 상대에게 맹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는 가운데 빛이 번쩍이고 기세가 사나워 보고 있는 사람들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어느샌가 투기장 절반이 모두 훼손되어 있었다. 여태까지 어떤 결투도 이처럼 파괴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구경하고 있던 마족들은 하나같이 피가 들끓었다. 그들은 관람석에서 뛰어내려가 자신도 이처럼 짜릿한 혈전을 치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효는 싸울수록 놀라움이 커졌다. 그는 경지가 자신보다 훨씬 낮은 인간이 이처럼 강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그는 아직까지 초범 경지 가운데서 자신과 필적할 만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적효의 공격은 양준의 몸을 조금 다치게 했을 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다. 양준의 몸은 단단한 정도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양준의 회복력과 지구력이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싸웠고, 초식마다 모두 전력을 다했기에, 적효도 이제는 힘이 부친다는 느낌이 들었다. 온몸의 진원의 소모가 방대해 기세나 힘 모두 전성기보다 많이 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양준은 아니었다. 그는 시종일관 전성기 상태를 유지했고, 오히려 점점 더 강해졌다. 마치 그의 몸속에는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 진원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몸에 더해지는 상처는 그를 더욱더 포악하게 만들 뿐이었다.
또한 싸움 중에 적효는 공포감마저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양준의 몸의 상처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이전에 용오름 속에서 날카로운 바람에 스쳐 생긴 상처들이 지금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싸우는 중에 상처가 아문다고? 이건 또 뭐야?’
적효는 양준이 단약을 복용하는 걸 보지 못했고, 사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는 세상에 이런 이상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난생처음 알게 되었다. 자신과 같은 기린아와 대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이에 적효는 심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기분이 묘해졌다. 그는 마족의 정예 중의 정예였다. 짧은 80년 동안 초범 경지 3단계에 이르렀고, 백 살 이전에 무도의 정상인 입성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백 살에 입성 경지에 오르는 것은 대륙 전체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일부 큰 세력에서 양성한 정예들은 젊었을 때 초범 경지에 진급하기도 했지만, 초범 경지에 진급한 다음부터는 거의 모든 이들이 실력 향상 속도가 매우 느려졌고, 백 살 이전에 입성 경지에 진급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적효는 그럴 잠재력이 있었다. 때문에 구경은 기대를 품고서 좋은 수련 환경과 대량의 물자를 지원하면서 그를 양성했다. 이 때문에 적효는 자부심을 넘어 자만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반드시 마존 이하의 무인 중 제일이 되거나 심지어 마존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적효는 제대로 충격을 받았다. 구척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자신과 싸우는 인간 녀석은 스물대여섯밖에 안 되었다. 그렇다면 그보다 오십여 년을 더 살면서 자신이 해온 수련은 모두 헛된 것이었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