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3장. 각성
고수들의 결투는 무공뿐만 아니라 심적 경지 내지 정신력의 싸움이기도 했다. 적효가 정신을 살짝 놓는 순간, 대치 상태가 끝나고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적효는 기세가 확 꺾이며 양준에게 제압당했다.
관람석의 마족들은 드디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원래 비등비등하게 싸우던 검은빛과 금빛 기운 가운데서, 적효의 검은빛 마기가 별안간 약해졌고, 반면 반감을 일으키는 금빛이 강하게 빛났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마족들은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건 아니지! 인간 녀석이 적효도 이겼다고?”
“그럴 리가? 적효는 초범 경지 3단계잖아. 인간 녀석보다 작은 경지 두 개가 높단 말이야.”
“적효가 졌으니, 우리 마족의 체면은 정말 말이 아니게 되었군.”
“망할! 저놈 저거 사람 맞아? 초범 경지 1단계가 초범 경지 3단계를 이기다니. 정말 입성 경지라도 진급하면 어떤 모습일까?”
심지어 풍표마저도 얼굴빛이 어두워졌고 미간에는 불쾌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의자 등받이를 꽉 잡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설리도 앞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강한 신식을 투기장 안에 침투시켜 결투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장내에서 그녀보다 결투 상황을 더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없었다. 투기장 안 결계와 금제는 모두 그녀가 직접 설치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결투하는 쌍방이 관람석 도박꾼들에게 영향을 받지 말고 온전히 싸움에만 집중하라고 설치한 것이었지만, 최정상 고수의 수단이다 보니 다른 이들은 금제와 결계를 뚫고 투기장 안을 자세히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설리는 달랐다. 그녀는 양준과 적효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하나라도 놓칠 세라 열심히 지켜보았다. 이번 싸움이 이 정도로 치열하고 무시무시할 줄은 그녀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안령아의 감정 변화와 여러 행동에서 기미를 알아채고 양준이 이길 거라고 짐작하지 못했다면, 그녀 또한 전혀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결투가 진행됨에 따라, 그녀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양준에 대한 살기도 점차 사라지더니 대신 짙은 의혹으로 가득 찼다.
연이은 폭발음 가운데 줄곧 엉겨 있던 금빛과 검은빛 기운이 갑자기 갈라섰다. 두 그림자는 각각 뒤쪽으로 물러서더니 몇십 장을 사이에 두고 힘들게 몸을 가누었다.
먼지바람이 일고 경기장이 혼란한 가운데, 관람석에서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서 아래쪽을 지켜보았다. 다들 둘 가운데 누가 더 강한지 궁금했다.
먼지가 가라앉고 드디어 아래쪽에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여기저기서 숨을 한껏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적효는 피 칠갑을 한 채, 온몸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곳곳에 뚜렷한 손바닥, 주먹,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구경 휘하의 정예 고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는데 숨소리를 들어 보면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양준도 마찬가지로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햇빛 아래에서도 옅은 금빛에 감싸여 있는 듯한 모습은 매우 기괴해 보였다. 건장한 몸에는 적효 못지않게 상처 자국이 가득했다.
두 사람에게서 유일하게 다른 점은 눈빛이었다. 적효의 번뜩이던 눈동자는 빛을 잃었지만 양준의 눈에서는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적효가 패했다. 봉사가 아닌 이상 모두가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널 얕보았어……. 과연 강하구나.”
적효는 힘들게 두어 번 기침을 했다. 그의 입에서는 핏덩이와 함께 내장 조각이 흘러나왔다.
“날 얕본 사람들은 모두 대가를 치러야 하지.”
양준은 씩 웃고서 심호흡을 하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온몸의 진원이 세차게 흘렀고, 눈동자에는 살기가 번뜩였다. 그는 눈앞의 적효를 죽여 이번 결투에 마침표를 찍을 생각이었다.
관람석,
줄곧 안색이 굳어져 있던 풍표는 끝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을 쳤다.
“네놈이 감히!”
곧 그의 신형이 제자리에서 번개같이 사라지더니 무지갯빛으로 변해 투기장 안으로 향했다.
적효는 구경의 기대를 저버리고 인간에게 패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구경의 신임을 받는 부하였기에 양준에게 죽임을 당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풍표는 이를 기회 삼아 아예 양준까지도 죽일 생각이었다.
“욱말!”
다른 한쪽에서, 설리가 낮게 불렀다.
욱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잠시 뒤, 그는 풍표의 앞에 나타나 상대의 길을 막아섰다.
“비켜!”
풍표는 대노한 나머지, 이곳이 설리의 세력 범위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욱말에게 다짜고짜 공격을 날렸다. 욱말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는 곧바로 상대의 초식을 파훼했다. 순간적으로 입성 경지 1단계의 마족 고수들이 맞붙었다. 투기장의 상공에서는 빛이 번쩍거리며 무시무시한 기운이 폭발했다.
모든 마족들은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횡재인가? 초범 경지 무인 간의 짜릿한 혈전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입성 경지 무인 간의 싸움도 구경하게 될 줄이야. 다들 흥분해 눈도 깜빡하지 않고 싸움을 구경했다.
“욱말, 지금 뭐 하는 거야? 적효가 누구의 부하인지 몰라? 만약 적효가 여기서 죽으면 네가 구경 대인의 노기를 감당할 수 있어?”
풍표는 욱말을 떨쳐버리지 못하게 되자 화를 내며 소리쳤다.
“바보 아니야?! 구경이 화내든 말든, 나하고 뭔 상관인데? 여긴 사성, 우리 대인의 영토란 말이야. 뭘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욱말이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
“지금 두 대인 사이에 싸움을 붙이려는 거야?”
“아니 그럴 생각 없어. 하지만 투기장에는 투기장만의 규칙이 있지. 살아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야. 규칙을 깨서는 안 돼.”
“너……!”
풍표와 욱말이 엉겨 붙어 싸우고 있을 때, 양준은 이미 적효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그의 손가락에서는 진원이 날름거리고 있었고 움직임이 침착했다. 반면 이미 힘이 다한 적효는 정신력으로 겨우 버티고 서 있었다. 물론 반항할 힘은 전혀 없었다. 이 순간 그는 하늘에서 싸우고 있는 풍표에게 애원의 시선을 보냈다.
풍표는 다급해져 고함을 질렀다.
“인간 녀석, 감히 공격하면 죽여 버릴 거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준의 손가락의 진원이 예리한 검으로 변해 적효의 가슴팍을 찔렀다. 가슴팍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적효는 한참 휘청거리다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쓰러진 그의 주변으로 먼지가 피어올랐다.
“망할, 저 인간 녀석이…….”
“정말 적효를 죽였군.”
“이거 재미있게 됐군. 이젠 설리 대인도 저놈을 지켜 주지 못할 거 같은데.”
“설리 대인이 왜 저놈을 지켜 줘. 이젠 죽는 길밖에 없을걸.”
투기장 상공,
적효가 죽자, 풍표와 욱말도 싸움을 멈췄다. 풍표는 안색이 시커메져 빨갛게 달아오른 눈동자로 양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얼굴의 가면을 찢어 버리고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인지 확인하려는 것만 같았다.
욱말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양준의 대담함에 깜짝 놀라고는 아무 말없이 다시 설리의 곁으로 돌아왔다.
양준은 적효의 시체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그는 허리를 꿋꿋이 편 채 꼼짝하지 않았다. 적효의 신혼은 멸세마안의 흡입력에 의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양준의 머릿속으로 흘러든 뒤 흡수되었다.
점차 장내 분위기도, 기운도 기괴해졌다. 양준의 몸의 기운도 불안정했다.
증오에 찬 눈빛으로 양준을 쏘아보고 있던 풍표는 순간 실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놀라움과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대인……!”
욱말도 놀라서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양준을 바라보았다.
설리는 다시 한번 얼굴빛이 바뀌었다. 그녀는 양준의 몸의 어지러워진 기운과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반복하는 빛을 바라보며 순간 황당해했다.
“대인, 저 녀석이…….”
욱말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나지막하게 외쳤다.
설리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음, 순간 각성이라. 저 녀석이… 아마 몇 달간의 혈전을 통해 적지 않은 깨달음을 얻은 것 같구나. 그러다가 오늘의 결투로 그것들을 확실하게 각성했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요. 지금 이곳에서 경지를 돌파하겠다는 건가요? 이거 너무 안하무인인 거 아닙니까?”
욱말은 감탄을 연발했다.
방금 전, 양준은 적효를 죽였다. 풍표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죽이려 했고, 또한 관람석의 마족들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양준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끊임없이 떠들고 있었다. 지금은 경지를 돌파할 적절한 시기가 아니었다. 까딱하면 큰 소동이 일어나 흥분한 사람들에게 집단 공격을 당할 수도 있었다.
“대인, 저희는 보고만 있습니까?”
욱말이 눈알을 굴리며 물었다.
만약 설리가 침묵하면 양준은 오늘 죽는 길밖에 없었다. 마족이라면 누구라도 인간이 이처럼 강해지는 것을 보고만 있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양준은 그동안 사성의 마족들에게 적지 않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거의 모든 이들이 그의 무시무시한 잠재력을 알게 되었다.
“아니, 통제해야지. 내 명을 전해라. 누구라도 감히 저 녀석이 경지를 돌파하기 전에 투기장에 들어간다면 모조리 죽인다!”
설리의 얼굴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흥분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네?!”
욱말은 설리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어 순간 당황했다.
그전까지 설리는 분명 양준에게 살심이 일었었다. 오늘 싸움이 끝나면, 양준은 지든 이기든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 설리가 보이는 태도에, 욱말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양준을 죽이려는 생각이면 설리는 이 일에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풍표와 다른 마족들이 양준이 경지를 돌파하는 사이에 그를 죽여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에 그녀가 한차례 풍표를 저지한 것은 온전히 구경의 기세를 누르고, 투기장의 규칙을 고수하기 위해서였다.
‘저 녀석의 눈부신 활약에 죽이기 아까워진 건가?’
욱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마음속으로 짐작해 보았으나, 더 묻지 않고 급히 부하들에게 의념을 전달했다. 곧이어 투기장 외곽에 적지 않은 마족 고수들이 나타나 투기장을 물 샐 틈 없이 둘러쌌다.
이 광경을 보고, 모든 이들은 곧 설리가 양준을 보호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더는 경솔하게 나대지 못했다. 대신 욕설이 끊이지 않았다.
투기장에 서 있는 양준은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역시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설리 부하들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설리가 당장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는 이상, 그는 마음을 놓고 경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곧이어 그는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모든 감정을 내려놓은 채 몸의 기운이 용솟음치게 내버려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