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4장. 다시 만날 일이 없을 듯합니다
투기장 밖,
수많은 마족들은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부었으나 과격 행위는 없었다.
투기장 안,
천지간 기운의 파동이 점차 기괴하고 변화무쌍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천지를 뒤흔드는 기운 파동이 양준을 중심으로 폭발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천지 기운은 마치 해일처럼 일렁이다가 곧 소용돌이가 되어 투기장의 금제와 결계에 충돌했다.
“무시무시한 기운이군!”
욱말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설리도 살짝 넋이 나간 채, 가볍게 고개를 젓더니 이상한 낯빛으로 말했다.
“역시 건방질 만했어. 이 정도 기운은 초범 경지 3단계 못지않아. 괜히 적효를 죽일 수 있었던 게 아니었어.”
이 광경을 지켜보는 마족들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만약 지금 투기장 안에 서 있는 사람이 적효라면, 아마 다들 환호성을 터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인 양준이었기에 그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천지의 기운이 투기장 안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다. 양준은 두 눈을 꼭 감고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만족한 모습이었다. 그의 온몸을 감싸고 있는 옅은 금빛도 점점 더 눈부시게 빛났다.
반나절이나 지나서야 세찬 기운은 짧은 시간 안에 양준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혼란스럽던 투기장 안은 순식간에 쾌청해졌다.
양준을 바라보는 마족들의 표정도 이제는 무덤덤했다.
양준은 적효와의 혈전으로 인해 온몸이 성한 곳 없이 상처투성이였었지만, 지금은 상처들이 놀라운 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작은 상처들은 아예 사라졌고, 큰 상처들도 거의 다 나은 상태였다.
설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빨간 입술을 핥았다. 그러고는 흥분한 표정으로 뜨겁게 양준을 바라보았다.
양준은 주먹을 가볍게 움켜쥔 채, 몸속에 흐르는 기운을 감지해 보고는 만족스러워했다.
이번의 경지 돌파는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몇 달간의 힘든 싸움과 그 과정에서 얻은 여러 가지 깨달음은 그의 몸과 신식의 자양분이 되어 돌파의 문턱에 다다르게 했다. 그리고 적효와의 혈전에서 초범 경지 2단계의 심오함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진원의 강도와 순수도가 한 단계 향상되었고, 심지어 신식의 힘도 전보다 강해졌다. 지금 양준이 유일하게 무기력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이 투기장 안에서, 그것도 이렇게 많은 마족들 앞에서 경지를 돌파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것도 설리의 눈앞에서 말이다.
양준은 진작부터 설리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를 항상 경계했지만 실력의 차이 때문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설리가 왜 자신이 경지를 돌파할 때 보호해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위험한 상대이기에 하루라도 빨리 사성을 떠나는 게 상책이었다.
양준은 곧 고개를 돌려 설리가 있는 곳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설리 대인, 전에 했던 약속을 지키는 거죠?”
설리는 실눈을 뜨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무슨 약속?”
“이번 싸움에서 제가 이기면, 저와 제 친구를 놔주겠다고 했습니다. 번복하려는 건 아니겠죠?”
양준은 계속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마족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설리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녀는 괘씸한 표정으로 멀리서 양준을 쏘아보았다.
둘 사이에 약속이 있었던 건 사실이나 그녀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양준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장으로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녀의 명성에 금이 갈 수 있었다.
“괘씸한 자식!”
설리는 이를 갈았다. 그녀는 양준이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대인, 저 자식은 지금 죽음을 자초하는 겁니다. 가게 내버려 두면 우리가 손쓸 필요도 없이 놈은 죽을 겁니다.”
욱말은 고소해하며 웃었다. 그는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살기등등한 풍표를 바라보았다. 풍표는 아마 양준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가장 강렬한 사람일 것이다.
“지금 저 녀석을 죽이고 싶지는 않단 말이다.”
설리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욱말은 순간 깜짝 놀라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설리 대인, 지금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겁니까?”
양준은 또다시 큰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설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한차례 심호흡을 하더니 천천히 일어서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약속은 지켜야지. 지금부터 너와 네 친구는 자유의 몸이다.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떠나. 누구도 막지 않을 테니까.”
양준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공수했다.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투기장 안에서 하늘로 솟구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설리 앞으로 날아가 안령아를 와락 잡아채고는 낮게 소리쳤다.
“가자!”
“우리 곧 다시 만나게 될 거야.”
설리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양준은 가슴이 철렁해 그녀를 힐끗 보았다. 설리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설리는 결코 그가 쉽사리 떠나게 내버려 두지 않을 터였다. 투기장 안의 마족들 앞에서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 놔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암암리에 꼼수를 부릴 게 분명했다. 아마 그들이 떠나는 순간, 사람을 보내 뒤쫓을 것이다.
양준은 뻔히 알면서도 한마디 했다.
“제 생각에는 다시 만날 일이 없을 듯합니다.”
“두고 봐.”
설리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양준은 안령아를 데리고 하늘로 솟구쳐 번개같이 사라졌다.
관람석,
분노에 차 양준을 죽이려던 마족들은 양준이 이렇게 대담하게 떠나자, 삼삼오오 떼를 지어 조용히 양준의 뒤를 따랐다.
설리와 욱말은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전혀 저지하지 않았다. 풍표는 제자리에 서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시 설리를 바라보더니 씩 웃고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사라졌다.
“대인, 다들 뒤쫓아 갔습니다. 저 녀석 아마 위험할 겁니다.”
욱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양준은 입성 경지 1단계인 풍표를 상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뒤따르는 마족들을 대적하기도 힘들 터였다. 양준의 실력이 강하고, 방금 전에 작은 경지 하나를 돌파했다지만 그전에 적효와 오랫동안 싸웠기에 힘이 대부분 소모된 상태였다. 지금은 전투력을 이 할 정도나 발휘하면 다행이었다. 때문에 마족들에게 잡힌다면 그에게는 오직 죽음뿐이었다.
“그래. 죽을 수밖에 없지. 그런데 스스로 선택한 거잖아. 떠나지 않으면 나도 죽일 생각은 없었어. 기어코 저승길을 가려고 하다니.”
설리는 이를 악물고 화가 나서 말했다.
“그럼…….”
“가서, 녀석을 데려와. 남들이 녀석을 죽이지 못하게 해.”
설리가 덤덤하게 분부했다.
“예!”
욱말은 명을 받들고 급히 뛰쳐나갔다.
“뭐, 다시 만날 일이 없어? 날 다시 만났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참 궁금하네.”
설리는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자신의 행궁으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양준이 잡혀 오는 순간을 기다릴 참이었다.
*
사성 밖,
양준은 안령아를 데리고 기다란 그림자를 남기면서 날아갔다.
“괜찮겠어?”
안령아는 걱정되어 물었다. 그녀도 양준과 적효의 혈전을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기에 그가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때에는 지금처럼 미친 듯이 진원을 돌리지 말고, 조용히 쉬어야 했다.
“괜찮아.”
양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마신의 피의 강한 회복력은 그마저도 놀랄 지경이었다. 이전 같으면 이 정도 부상을 당했으면 확실히 한동안 쉬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몸에는 대단한 회복력을 지닌 마신의 피가 흐르고 있어 짧은 시간에 회복할 수 있었다.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지만 움직이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또한 그는 진원이 고갈될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단전 안에 양액 몇백방울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검은 책 공간에는 당나무 열매 몇십 개가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고 있어.”
안령아가 갑자기 사색이 되어 말했다.
“한두 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득해.”
그 말에 양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진작 마족들이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한 신식으로 탐지해 본 결과, 심지어 쫓아온 인원수와 그들의 경지마저도 낱낱이 알 수 있었다. 초범 경지는 많았고, 입성 경지도 두셋 정도 되었다. 또한 그들의 뒤로 풍표가 기운을 그의 몸에 고정하고서 거머리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풍표의 뒤로 욱말이 있었다. 과연 양준이 예상한 대로 설리는 욱말을 보내 그를 뒤쫓았다.
‘지독한 년, 조만간 된통 혼내줘야겠어.’
사성의 반 이상 병력이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양준은 언짢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원래의 속도대로 날아갔다.
마족 고수들은 사성을 벗어나자 곧 너도나도 비보를 꺼내 전력으로 쫓았다. 그러자 양준과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졌다.
한 시진이 지나는 동안 양준은 고작 몇백 리를 날아갔다. 이제 곧 추격하는 사람들에게 따라잡힐 판이었다. 안령아는 다급한 나머지, 양준의 몸속에 신비한 인결을 끊임없이 날렸다. 그의 진원 유동 속도를 높여 비행 속도를 올리려는 것이었다.
“따라오지 못할 거야.”
양준은 안령아를 위로하고는 원래의 속도를 유지했다. 지금 그는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지금 쫓아오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서혼지충을 푸는 순간 죽을 목숨들이었다. 경계해야 할 것은 그들 중에 섞여 있는 입성 경지 몇 명과 풍표, 욱말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양준이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이때, 풍표와 욱말은 그와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딱 그들의 신식이 미칠 수 있는 최대 범위 안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