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련전봉-776화 (775/853)

제 776장. 저쪽을 봐

만성 성주는 겉으로 우락부락하고 어벙해 보였지만 사실 영리하고 간사했다. 그는 욱말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는데, 양준에게 어지간히 당한 게 아니라면 지금처럼 인간 무인을 칭찬할 리 없었다.

‘인간 녀석이 확실하게 남다른 모양이군. 초범 경지 1단계가 초범 경지 3단계인 적효를 죽였다니!’

마족 중에는 이런 쾌거를 이룬 사람이 없었다. 언제나 적효가 경지를 뛰어넘어 사람을 죽였었는데, 이번에는 그가 도리어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양준의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고만(古蠻), 이번에는 네가 나서야겠다. 난 옆에서 지키고 있을게.”

욱말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풍표를 힐끔 보고서 지시했다. 자신은 남아 풍표가 경거망동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다.

“알겠어. 내 가장 큰 취미는 젊은이들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무너뜨리는 거야. 특별히 이 인간 녀석은… 그 재미가 배가 될 거 같군.”

고만은 고개를 거듭 끄덕였다. 그러고는 흥분한 얼굴로 손을 휘저으며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이 먼저 가서 놈의 실력을 확인해 봐. 방심하지 말고. 네놈들의 시체를 거두고 싶지는 않거든.”

만성의 고수들은 하나같이 잔인한 미소를 띠고서 양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들은 흥미진진하게 양준을 훑어보았다.

욱말은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양준 한 명을 상대하기에 별문제가 없을 것 같아 저지하지 않았다.

“성주, 인간 녀석을 잡으면 상을 줍니까?”

만성의 한 무인이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고만에게서 이득을 얻으려는 모양이었다.

“상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난 마강의 변두리까지 쫓긴 사람이야. 여긴 사성보다 더 척박한데 나한테 무슨 상을 요구해. 상을 원하면 욱말한테 말해.”

고만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이 말을 들은 양준은 눈앞이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 고만의 원망이 가득 찬 말에서 양준은 기쁜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마강의 변두리였다. 즉, 이곳을 벗어나면 도망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뭔 군소리가 그리 많아. 그 녀석을 잡으면 물론 이득이 있지. 고만, 너도 참 쩨쩨하긴. 그러니까 설리 대인이 널 이런 곳으로 쫓은 거야. 어째 발전이라고는 없어.”

욱말의 말에 고만은 전혀 성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들었어? 욱말이 상을 준다고 약속했어. 멍때리고 뭐해? 어서 움직이라고 바보들아.”

고만 쪽의 무인들은 이 말을 듣고 순간 기운이 날카로워졌다. 다들 악의에 찬 얼굴로 기척 없이 양준을 포위했다.

양준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신식의 힘을 몰래 모으며 수시로 서혼지충을 풀 준비를 했다. 단번에 입성 경지 이하의 무인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었다.

긴박한 순간, 안령아가 문득 몸을 흠칫 떨더니 얼굴에 두렵고 고통스러운 기색을 떠올리며 양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그래?”

양준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상대방이 안령아에게 암수를 던진 줄 알았던 것이다.

안령아는 눈동자를 파르르 떨며 손가락으로 멀리 가리켰다.

“저쪽을 봐.”

사람들은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간 다들 당황했다.

저쪽 하늘에서 짙은 먹구름이 이쪽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먹구름에는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기운과 은은하게 비단결 같은 의념까지 섞여 있는 듯했다.

“남성고?”

양준이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맞아.”

안령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순식간에 어둠이 깃들더니 생기를 잃었다.

“망할!”

양준은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는 욱말과 풍표에게 쫓기고, 고만이 사람을 거느리고 매복해 막아선 상황에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었다. 입마를 펼치면 안령아를 데리고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남성고가 여기까지 쫓아올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계획이 틀어지자 양준 역시 조바심이 났다. 그는 남성고의 수단을 이미 경험해 보았기에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령 지금 초범 경지 2단계로 진급했다 해도 여전히 자신이 없었다. 지난번에 그녀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바다 밑 허공 통로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허허벌판에서 만나게 되면 거의 도망칠 수 있는 가망이 없었다.

양준이 당황하는 동안, 풍표와 욱말도 마찬가지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모두 입성 경지로 다가오는 이의 강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는 그들마저도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어떤 고수길래 여기까지 찾아왔지?’

두 사람은 무슨 일인가 싶어 양준을 바라보며 그에게서 답을 구하려 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들 도망쳐. 지원병이 왔거든.”

양준은 싸늘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욱말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사람이 왜 너와 네 곁에 있는 여인한테 살기를 품은 거 같지?”

양준은 입을 삐죽거렸다. 욱말을 속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네 녀석은 참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구나. 어떻게 저리 강한 고수를 건드린 거야?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도 참 기적이군.”

“내가 이런 걸 원했겠어?”

양준은 비분에 차서 말했다. 사실 그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남성고가 그를 쫓는 이유는 안령아에게서 구천신기 몇 개를 배우고서 그녀의 기운이 양준에게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욱말, 그런데 저 사람의 기운이 좀 이상한데…….”

고만은 미간을 찌푸리고 자세히 감지해 보았다. 왠지 상대에게서는 죽음의 기운이 다분했고, 산 사람의 기운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저 녀석을 잡아서 얼른 가자.”

욱말은 감히 지체하지 못하고 결단력 있게 말했다. 상대가 얼마나 기괴하든지 실력이 강한 건 확실했다. 그와 고만이 손잡아도 상대를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제 더 지체했다가는 일이 잘못될 수 있었다.

“잡을 필요 없어. 따라갈게.”

양준은 소탈하게 태도를 바꿨다. 욱말을 따라가면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남으면 죽는 길밖에 없었다. 그는 아직 남성고와 맞설 힘이 없었다.

“주제 파악을 하는군.”

욱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감을 표했다. 그러나 곧 그는 낯빛이 다시 바뀌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안 되겠다… 벌써 다 왔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의 먹구름 속에서 손이 튀어나오더니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있는 곳을 뒤덮었다. 손은 앞으로 다가올수록 점점 더 커지며 곧 하늘 전체를 가렸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 갇히고 말았다.

차천수,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초식이었다.

마족 고수들은 욕설을 퍼부었다. 양준도 안령아를 데리고 재빨리 원래 자리에서 벗어났다.

쿠웅-

대지가 전율했다. 고만 일행이 원래 몸을 숨겼던 밀림은 단번에 땅속 깊숙한 곳으로 꺼져 들어갔다. 위쪽에서 내려다보면 사방 십몇 리에 무지막지하게 큰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처럼 광풍이 휘몰아치고 모래, 자갈들이 휘날리는 가운데 운이 나쁜 만성의 무인 몇 명은 피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나머지는 서둘러 피한 덕분에 가까스로 재난을 피할 수 있었다.

욱말과 고만은 한쪽에 모였다. 그들의 안색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상대의 강함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상대가 공격하는 순간 자신들이 상대를 저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적어도 입성 경지 2단계는 되는 듯했다.

하늘에 우뚝 선 욱말과 고만은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서 멀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거대한 손바닥이 내리치는 순간, 의념이 그들의 몸에 고정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움직이는 순간, 상대는 인정사정없이 살육을 벌일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심호흡을 하고서 정신을 가다듬고 한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쪽에서는 빼어난 몸매에 하얀 치마를 입은 여인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상대는 아름다운 외모에 날씬한 몸매, 평범하지 않은 기질을 가진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표정은 무뚝뚝했고, 미간에는 짙은 죽음의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으며 낯빛도 어두웠다.

욱말과 고만은 그녀의 몸에서 어떤 삶의 기운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걸으면서 가는 손가락으로 순수한 기운을 내뿜었다. 기운은 다시 날카로운 공격으로 변해 만성의 무인들을 덮쳤다. 입성 경지 이하의 무인들은 그녀의 공격에 전혀 반항할 힘이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죽었다.

고만은 분노에 차서 울부짖었다.

“망할, 감히 내 부하를 죽여?”

욱말 또한 음울한 낯빛으로 소리쳤다.

“다짜고짜 살수를 뻗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두 사람의 욕설과 질문에 남성고는 아무 반응도 없었고, 눈동자도 깜빡이지 않았다. 계속해 앞으로 걸어올 뿐이었다.

양준은 마음속으로 통쾌해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남성고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에 욱말과 고만이 무슨 말을 하든 반응할 수가 없었다. 양준은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 유일한 난제는 어떻게 전임 성녀의 손에서 벗어나는가였다. 욱말과 고만이 막아선다고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남성고가 계속해 다가오자, 욱말과 고만은 솜털이 모두 곧추서는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눈앞에 무시무시한 여인과 한판 붙어야 할 것 같았다. 심지어 줄곧 한쪽에서 구경하던 풍표도 분노를 금치 못했다. 남성고가 의념을 그의 몸에도 고정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으려면 잠시 욱말, 고만과 손잡고 남성고와 싸워야만 했다.

입성 경지 1단계 세 명이 손을 잡으면 남성고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도망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잠시 뒤, 남성고가 삼십 장 정도로 다가오자, 입성 경지 고수 세 명의 몸에서 짙은 마원이 폭발했다. 세 사람은 전력을 다해 남성고를 공격했다.

그때, 거대한 검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천지를 무너뜨릴 듯한 강한 기운을 띠고서 세 사람을 내리쳤다. 현천검에는 짙은 죽음의 기운이 내재돼 있었다.

풍표, 욱말, 고만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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