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9장. 구천성지
구천성지는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천지간의 기운이 매우 짙었다. 또한 산 주변에는 정묘하고 강한 금제와 결계가 은밀하게 설치돼 있어 성지를 바깥 세계와 차단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큰 세력인만큼 실력이 대단했고, 대륙 전체에서도 내로라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양준이 도착했을 때, 성지는 전체적으로 엄숙하면서도 슬픔에 잠긴 듯한 분위기였다. 아마도 전임 성주가 유명을 달리하고 아직 새 성주가 나타나지 않은 연유인 듯했다.
구천성지는 천소종과 마찬가지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천소종의 백봉영진과 달리 구천성지는 산이 아홉 개밖에 없었다. 양적으로 적지만 산의 배열은 천도에 부합했고, 아홉 개 산을 기초로 배치된 진법은 천소종의 백봉영진에 뒤처지지 않았으며, 어쩌면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방어력이든, 천지의 기운을 모으는 속도든 모두 백봉영진 못지않았다.
산 아홉 개가 둘러싸고 있는 한가운데 아름다운 궁전들이 있었고, 거의 만 명에 달하는 제자들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구천성지는 무릉도원 같았지만 사람들로 북적였다.
장로들은 양준과 안령아를 데리고 성지로 돌아왔다.
서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조용히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떠들썩하게 큰 길을 따라 성지 한가운데 있는 웅장한 궁전으로 걸어갔다. 길 양옆으로는 성지의 제자들이 몰려들며 장로들에게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그들은 안령아를 보자, 모두 높은 목소리로 성녀의 이름을 불렀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들 얼굴에 경모와 열의를 띠고 있었다.
양준은 유일한 외부인으로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나이가 젊은데도 장로들이 공경하는 태도를 보이자, 다들 짚이는 데가 있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양옆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구천성지의 제자들은 양준을 성녀가 찾아온 차기 성주라고 짐작하고서 하나같이 기뻐하면서도 호기심이 가득 어린 표정이었다. 마치 양준이 성주의 자리에 오르면 구천성지에 살길이 열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떤 영리한 이들은 아예 확신하면서 양준에게 큰 예를 올렸다.
양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했다.
장로들은 마음속으로 혀를 차며 양준에 대해 더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양준이 천소종 출신이라 하지만, 나이가 어렸다. 특별히 큰 길로 들어가는 것은 그에게 성지의 부유함과 제자들의 강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처럼 떠들썩한 상황에서도 그는 전혀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여유가 있었다. 때문에 장로들은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성주의 심성이 평범하지 않군!’
장로들은 서로 눈빛 교환을 하고서 양준이 성주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궁전으로 가는 내내 시끌벅적했다.
금과 돌로 지어진 웅장한 궁전 앞 지면은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앞쪽에는 수많은 돌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고, 돌기둥에는 용과 봉황이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었다.
궁전 앞에 이르러서야 서휘는 뒤돌아서서 가볍게 손을 저었다.
모여들었던 성지 제자들은 그제야 흩어졌다. 그러나 다들 머릿속은 의문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양준이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성주의 자리에 올라 성지를 재난에서 구해 줄 수 있을지 궁금해했다.
“자, 들어가게.”
서휘가 고개를 숙이고 공손한 태도로 양준을 궁전 안으로 안내했다.
양준은 탄식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저를 그냥 성지에 놀러 온 손님으로 생각하십시오. 이처럼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서휘는 그 말에 양준이 아직도 성지와 자신들을 꺼려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맞네. 그럼 들어갑세.”
“네.”
궁전에 들어서자, 서휘의 배치 하에 다들 자리에 앉았다. 얼마 안 되어 술상이 차려졌다. 장로들은 양준을 위해 환영회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술자리에서 양준은 초조해하지 않고 평온하게 서휘를 포함한 장로들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서휘는 성지나 성주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어울리기 쉬웠다. 그는 실력이 강하고 신분이 낮지 않았지만 붙임성이 있었다. 이는 아마도 그가 양준에게 바라는 바가 있어서인 듯했다. 만약 양준이 아닌, 다른 젊은이가 이곳에 왔다면 서휘는 이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아름다운 소녀들이 들어와 음악에 맞춰 노래하고 춤을 췄다. 소녀들은 모두 경국지색으로 하늘하늘한 차림새였지만 크게 드러내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하나같이 몸매가 빼어나고 기질이 서로 달라 눈이 즐거웠다.
양준은 맑은 눈빛으로 흥미진진하게 감상했다. 그의 눈빛에서는 어떤 음탕한 빛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래쪽에 앉아 있던 안령아는 그의 이런 모습에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환영회가 끝나고 서휘 일행도 모두 자리에서 물러갔다. 물론 양준이 싫어하는 화제도 다시 꺼내지 않았다. 곧이어 시녀가 양준을 거처로 안내해 줬다.
커다란 별실 안,
장막이 길게 드리웠고, 바닥에는 두꺼운 융단이 깔려 있었다. 벽에 장식된 조명용 돌이 방 안을 어둡지도, 너무 밝지도 않게 비추고 있는 한편, 방 한가운데 놓여 있는 향로에서는 기분이 상쾌해지는 고급 향료를 태우고 있었다.
“공자님, 목욕하시렵니까? 옆쪽 방 욕실에 더운 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시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양준은 시녀를 힐끗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손을 저어 시녀를 내보냈다. 영리한 시녀는 사뿐 예를 올리고는 공손하게 물러갔다.
양준은 방 안에서 잠깐 조용히 있다가 문 쪽으로 걸어가 방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밖에 서 있는 주저하는 표정의 안령아를 보고 말했다.
“들어와. 거기 서서 뭐해?”
“어, 그래.”
안령아는 고개를 숙이고 별실에 들어섰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양준은 다짜고짜 안령아의 손을 잡고서 침대로 끌고 갔다.
안령아는 얼굴을 살짝 붉혔지만 반항하지 않고 양준에게 끌려갔다. 잠시 뒤, 침대 가에 앉은 그녀는 왠지 조심스럽고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양준은 침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서휘는 무슨 심보로 성지의 제자들이 나를 구경하게 하고, 무녀들을 불러 나를 유혹하려는 거지?”
“대장로님은 그냥 네가 성주가 돼 주기를 바랄 뿐이셔. 네가 말하는 것처럼 음험한 분이 아니야. 또한 소녀들은 무녀가 아닌, 우리 성지의 출중한 제자들이고. 오직 존귀한 손님이 올 때만 나서서 공연해.”
안령아는 빨간 입술을 오므리더니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게 성주가 되기 싫어?”
“싫어. 너 사실대로 말해. 전에 서휘가 했던 말 사실이야?”
양준은 정색하고 고개를 젓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잠깐 침묵하다가 물었다.
“무슨 말?”
“네가 나를 선택한 이상, 더는 다른 이를 선택할 수 없다는 말 말이야.”
안령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지는 참 이상하네. 난 어쨌든 외부인이잖아. 성주처럼 중요한 직위는 내부에서 선발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안령아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여태까지 규정이 그런 걸 어쩌겠어. 너도 들어서 알겠지만, 성지의 성주들은 모두 성녀가 밖에서 데려온 사람들이야.”
“그래, 알아.”
“예외는 오직 한 번만 있었어. 기록에 의하면 구백 년 전, 당시 성주는 성지의 제자라고 했어. 성녀 몇 명이 모두 그에게 감응이 생긴 거야. 그래서 그 세대에는 성지의 제자가 성주가 되었지. 하지만 그 뒤로는 더는 그런 상황이 없었어. 휴, 만약 성지의 제자가 성주가 될 수 있다면 우리도 번거롭게 밖에 나가 찾을 필요가 없지. 그러면 다른 세 명의 성녀도…….”
안령아는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너무 슬퍼하지 마…….”
양준은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안령아는 눈가를 훔치더니 심호흡을 해 마음을 진정시킨 뒤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네가 정 성주가 되고 싶지 않다면… 내가 장로님들께 말해 볼게. 혹여 널 놔줄 수 있는지.”
“말하지 마. 소용없을 거야. 장로들이 나를 유일한 성주 적임자로 생각하는 이상, 누가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그럼 어쩌려고?”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양준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장로들이 그에게 어찌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들의 단호한 의지는 그를 골치 아프게 했다. 만약 구천성지의 성주가 수명이 짧다는 폐단이 없다면 사태가 여기까지 발전한 이상, 양준은 성주가 되어도 큰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성주가 되어 서휘를 단단히 혼내 마음속의 울분을 털어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수명이 짧다는 폐단 때문에 그는 절대 성주가 되고 싶지 않았다.
안령아도 난감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선 한동안 여기서 지내. 남성고가 아직 밖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가면 위험해. 좀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상황을 봐서 이야기하자.”
“그래. 그럴 수밖에. 맞다. 나를 대신해 천소종에 전갈을 보내 줘. 난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
“걱정하지 마. 꼭 전할게.”
“고마워.”
“그렇게 예의 차릴 필요 없어… 그럼 너도 쉬어. 난 이만 갈게. 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줘. 내가 장로님들께 부탁해서 잘 처리할게.”
안령아는 기분이 많이 좋아졌는지 미소를 지으며 떠났다.
그녀가 나간 다음에야 양준은 무거운 표정으로 몰래 신식을 펼쳐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궁전 밖에는 많은 고수들이 배치돼 있었다. 그들은 조용히 잠복한 채 아마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듯했다.
양준은 가볍게 냉소하고는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서휘가 배치한 게 틀림없었다.
지금 그는 구천성지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안령아가 말한 것처럼 남성고가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이곳의 결계를 벗어나는 순간, 제 발로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성고를 떨쳐버릴 확실한 방법을 찾기 전까지, 그는 경거망동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구천성지의 사람들은 그에게 악의가 없었다. 그저 그가 성주의 자리를 계승하기 바랄 뿐이었다. 그가 끝까지 승낙하지 않으면 그들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성주 자리에 앉힐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 기회에 이제 막 돌파한 경지를 다지는 것도 좋을 듯했다.
양준은 생각을 바꾸자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