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3장. 그냥 떠나게 놓아줄 수 없나요?
성주 적임자가 성릉에 들어가 시험을 통과하는 건 성지의 대사였기에 모두 기록이 있었고, 장로, 호법들도 그동안 성주들이 그곳에 들어가 소모한 시간을 알고 있었다. 가장 빠른 이는 보름 만에 나왔고, 가장 늦은 이도 두 달 만에 나왔었다. 하지만 양준은 성릉에 들어간 지 넉 달이 되어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다들 양준이 안에서 죽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호법과 장로들은 아쉬워 탄식하며 더는 기다리지 않았다. 다들 중요한 직책이 있었기에 성릉 앞에서 하염없이 양준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일을 주도했던 서휘도 넉 달 뒤에는 떠나갔다. 오직 안령아만 남아 성릉 밖에서 양준을 기다렸다.
안령아는 양준이 성릉에 들어간 지 사흘이 지나서야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녀는 장로, 호법들을 원망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 돌이킬 수도 없었다. 지난 넉 달 동안, 그녀는 줄곧 이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기다렸지만, 양준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옥영과 정월동이 함께 오다가 성릉 밖에 서 있는 안령아를 보고는 서로 마주 보며 탄식했다.
“쟤는 아직도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군.”
옥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너무 성급했던 건 아닐까. 성지의 희망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한 젊은이의 앞날마저 망쳤잖아.”
정월동의 얼굴에는 자책감과 암담함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와서 그런 걸 말해 뭐해. 당시 대장로가 제안했을 때, 우리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어. 다들 책임이 있는 거야. 그래도 다행인 건, 령아가 천소종으로 전갈을 보낸 사람을 대장로가 잡아 두었다는 거지. 만약 천소종에서 이 일을 알게 되면 아마 성지를 가만두지 않으려 할걸.”
“그러게. 그처럼 출중한 젊은이는 어느 문파에서든지 전력으로 양성했을 거야.”
정월동은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구천성지는 안팎으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천소종까지 적으로 두게 되면 정말 산을 봉쇄하고 세상과 담을 쌓아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되면 다음 세대 성녀도 선발할 수 없었다.
“우리가 그 젊은이의 실력을 너무 높이 평가한 걸까, 아니면 그가 그냥 운이 없는 걸까? 예전의 성주 적임자들은 성릉에 들어가기 전에 그래도 전임 성주가 조금이라도 가르쳐 줬었는데. 이번에는 그 젊은이 혼자 탐색하게 했으니…….”
“일단 가서 보자고.”
정월동은 말하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잠시 뒤, 두 사람은 성릉 앞쪽에 이르렀다. 기척을 들은 안령아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확인하고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원래 안령아는 두 여성 장로와 사이가 두터웠다. 지금 이렇게 싸늘하게 대하는 것은 그녀들이 양준을 성릉에 들여보낸 데에 불만이 있기 때문이었다.
옥영과 정월동은 서로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떻게 안령아를 위로해야 할지 난감했다. 두 사람은 제자리에 서서 성릉 입구의 청석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옥영이 입을 열었다.
“령아, 이제 그만 기다려. 아마 나오지 못할 거 같구나.”
안령아는 고개를 저었다.
“착하지. 어서 돌아가 좀 쉬어. 여기서 넉 달이나 기다렸잖아.”
정월동도 설득했다.
“그는 꼭 나올 거예요.”
안령아는 단호한 말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녀의 단호한 모습에 옥영과 정월동은 깜짝 놀라며 서로 마주 보았다. 이윽고 옥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걸 알아? 여태까지 어떤 성주 적임자든지 성릉에서 이처럼 오래 있은 적이 없어.”
안령아는 도도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이 못 한다고, 양준도 못 한다고 말할 수는 없죠. 그의 재주를 보지 못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전 그가 꼭 나올 거라고 믿어요.”
두 사람은 눈빛을 반짝이며 넌지시 물었다.
“그에게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기에, 네가 그리 높이 평가하는 거야?”
두 사람 또한 양준이 자질이 출중하고 실력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준이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에 그의 진정한 실력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안령아는 달랐다. 양준과 같이한 시간이 적지 않은 만큼 그녀는 그의 실제 실력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옥영과 정월동은 문득 호기심이 동해 안령아에게서 뭐라도 알아내려고 했다.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그는 언제나 기적을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그는… 성지에 들어오지 않아도 30년 안에 전임 성주님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말했어요.”
“어깨를 겨룬다고? 그렇다면 입성 경지 3단계 최정상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야?”
옥영과 정월동은 놀라서 나지막하게 외쳤다.
안령아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옥영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지금 초범 경지 2단계인데, 30년 뒤에 입성 경지 3단계에 진급하겠다고? 불가능할 듯한데.”
“그러게. 대륙 전체에서도 입성 경지 3단계는 몇 명 없어.”
정월동도 미소를 지었다. 두 여인은 양준이 큰소리를 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경험자로서 초범 경지 이후에 경지를 돌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자질도 출중한 편이었기에 입성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양준이 아무리 그녀들보다 대단하다고 해도, 그런 쾌거는 거의 불가능했다.
지금 대륙에 존재하는 입성 경지 3단계 고수는 모두 몇백 세에 이르는 고령이었다. 설령 겉모습은 젊어 보인다 해도, 다들 오랜 시간에 걸쳐 경험을 쌓으면서 지금의 성취를 얻은 것이었다. 하지만 양준은 이제 고작 스물대여섯 살 되었다. 그런데 30년 뒤면 입성 경지 3단계에 오를 수 있다니, 그 말은 50세가 되면 세계 무도의 정상에 오르겠다는 말이었다. 백 세의 입성 경지 고수도 매우 보기 드문데, 50세의 입성 경지 3단계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이가 어려서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군.’
옥영과 정월동은 입을 오므리며 미소를 지었다.
“왜 웃으세요? 양준이 할 수 있다고 했으면 반드시 해낼 거예요. 두고 보세요. 50세를 넘기면 분명 입성 경지 3단계에 진급할 거예요.”
“그건 일단 먼저 그가 성릉에서 나온 다음, 말하자. 령아,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하는 거야? 안 그러면 이렇게 그를 위해 말하지 않았을 텐데?”
옥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안령아를 바라보다가 주저하며 물었다.
안령아는 순간 얼굴을 확 붉혔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가볍게 중얼거렸다.
“싫어하지는 않아요… 그냥 저 때문에 양준에게 피해가 간 거 같아 자책감이 들어요. 만약 당시 제가 구천신기를 그에게 주입하지 않았으면 이런 봉변을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성릉에 들어갈 필요도 없고요. 원래는 더 좋은 앞날이 있었는데…….”
“그건 우리의 결정이었다. 너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어.”
옥영이 한숨을 내쉬며 책임을 끌어안으려 했다.
“두 분께 한 가지 부탁을 하면 안 될까요?”
안령아는 고개를 들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 봐.”
옥영과 정월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만약에 양준이 성릉에서 나오게 되면 그냥 떠나게 놓아줄 수 없나요? 그는 여기에 묶여 있는 게 정말 싫은가 봐요. 성주의 자리는 세상 누구에게나 거대한 유혹이지만 그에게는 족쇄예요. 그를 이곳에 묶어 두면 아무런 좋은 점도 없어요. 두 분도 성지를 위하지 않는 성주를 모시고 싶지 않잖아요?”
옥영과 정월동은 눈썹을 찌푸리고서 서로 마주 보았다. 둘 다 섣불리 대답하기 무엇하여 난감하기만 했다.
안령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모두 양준이 나오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잖아요? 그럼 그냥 죽은 걸로 생각해 주세요. 죽은 사람은 성지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약속해 주세요.”
“이… 이 일은 그래도 대장로와 의논해 봐야 해. 우리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단다.”
옥영이 가까스로 웃으며 말했다.
“그건 제가 약속하겠습니다.”
이때, 우렁찬 목소리가 옆쪽에서 들려왔다. 무지갯빛과 함께 대장로 서휘가 성릉 앞에 나타났다.
“대장로!”
옥영과 정월동은 얼른 예를 올렸다.
서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안령아를 바라보았다.
“성녀 전하, 방금 전에 말씀한 일은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진짜예요?”
안령아는 기쁜 내색을 했다.
“네, 옥 장로와 정 장로가 증언해 줄 겁니다. 물론 그가 이곳에서 나와 여전히 성주가 되기 싫다고 하면 말입니다.”
서휘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는 아마 성주가 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그건 모르죠… 혹시라도 저곳에서 나오면 우리가 애원할 필요 없이 스스로 성주의 자리를 원할지도 모릅니다……. 성릉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중 성지를 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서휘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옥영과 정월동도 눈동자를 반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들도 성릉 속에 무슨 비밀이 숨어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서휘가 말한 것처럼 성릉에 들어갔다가 나온 성주들은 모두 이곳을 자신의 집으로 생각하면서 전심전력으로 성지를 위해 이바지했다. 설령 떨쳐버릴 수 없는 문파와 가족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대장로께서는 양준이 나올 수 있을 거 같나요?”
안령아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군요.”
서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두고 보세요. 양준은 꼭 모두를 깜짝 놀라게 만들 거예요.”
안령아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세 사람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녀는 어디서 저런 자신감이 생긴 걸까? 성릉에 들어간 지 넉 달이나 된 사람이 무사히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
성릉 안,
양준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식해에서 정묘한 기운이 폭발하면서 눈앞에 떠 있는 마지막 원기 덩어리를 덮쳤다.
촤르륵-
드디어 마지막 구천신기의 비밀과 의념을 담은 원기 덩어리가 산산조각 났다. 동시에 그 속에 내재돼 있던 각종 비밀이 머릿속으로 흘러들면서 양준은 마지막 구천신기까지 모두 각성하게 되었다.
현천검, 유천쇄, 균천인, 나천망, 차천수, 주천모, 호천순(浩天盾), 일천영(逸天影), 적천전(赤天箭), 아홉 가지 구천신기가 양준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구천신기는 신비하기 그지없었는데, 양준이 알고 있는 어떤 무공과 신혼기보다도 더 뛰어났다.
오랜 시간에 걸친 각성과 배움을 통해 양준은 구천신기 아홉 가지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의식중에 진원도 더욱 짙고 순수해졌다. 또한 이곳의 천지간의 영기는 무척이나 짙어, 몇 달간의 수련을 통해 그의 경지도 많이 향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