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5장. 마신의 금빛 피
성릉 안,
양준은 며칠간 좌선하면서 구천성지 역대 성주들의 신혼의 정수를 흡수해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수확을 얻기도 했다. 경지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모두 입성 경지 3단계 고수들의 깨달음이었기에, 양준은 자신의 앞길에 대해 분명하게 인지하게 되었다.
육신의 힘이 따라 준다면 입성 경지 3단계 전까지 매번 경지를 돌파할 때마다 이제는 어떤 장벽도 없을 터였다. 이는 거의 모든 무인들이 꿈에도 바라 마지않는 것이기도 했다.
경지 돌파가 어려운 것은 다음 경지와의 경계점에 이르렀을 때, 여러 가지 장벽과 속박을 만나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중의 현묘함을 탐지하지 못하면 경지를 돌파할 수 없었다.
수많은 무인들이 평생 장벽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는 심지어 자질이 뛰어난 기린아들도 있었다. 그들은 젊었을 때 남달리 먼저 재주를 꽃피워 사람들의 감탄과 칭찬을 한 몸에 받지만, 일단 자신의 한계치에 닿으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혹여 기연을 만난 이들은 운이 좋게 장벽을 무너뜨리고 실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경우도 있었지만, 매우 적은 확률이었다. 때문에 경지의 장벽은 모든 무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누구든 성장 과정에서 다 겪게 되는 일이었다.
양준도 그동안 계속 장벽에 부딪혔었고, 매번 각종 위험을 겪으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가운데 그중의 현묘함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더는 장벽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양준의 수련의 길은 입성 경지 3단계가 되기 전까지 탄탄대로가 열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양준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득 세상이 달라 보이면서 그 속에서 자신이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다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옆쪽 관에서 은밀한 원기 파동이 느껴졌다. 양준은 세심하게 감지해 본 뒤,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의념을 발동하자, 관 속에서 아름다운 빛이 튀어나오더니 양준에게로 날아왔다. 손을 내밀자 빛은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시선을 고정하고 보니, 그것은 은빛의 나뭇잎이었다. 잎에는 경맥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마치 방금 나무에서 딴 것 같았다. 특이한 점은 평범해 보이는 나뭇잎에서 놀라운 원기 파동이 발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성급 상품 비보였다.
장로, 호법들이 말하기를 전임 성주가 사용하던 비보들은 모두 최상급 비보로, 이 정도 등급은 대륙 전체에도 몇 개 없다고 했었다.
은빛 나뭇잎에는 전임 성주의 신혼 낙인이 있었다. 그러나 양준은 멸세마안으로 역대 성주들의 신혼을 모조리 정화, 흡수했기에 당연히 전임뿐만 아니라 역대 성주들의 신혼 낙인을 모두 제어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양준은 관 속에 남아 있는 모든 비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었고, 비보의 위력이 상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은빛 나뭇잎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모양의 비보였다. 세상에는 수많은 비보들이 있고, 모양도 각자 다르기에 은빛 나뭇잎도 별다른 위력이 있을 듯했다. 양준은 그것을 흡수하지 않고 일단 검은 책 공간에 넣어 두었다.
각종 위험한 금제를 피해 그는 두 번째 관 쪽으로 걸어갔다. 양준은 이곳을 깔끔하게 청소할 셍긱이었다. 관마다 살펴본 결과, 거의 모든 관 속에는 비보가 있었다. 게다가 역대 성주들은 모두 최정상 고수였기에 사용했던 비보도 다 좋은 것들이었다. 모두 성급이었는데 대다수가 중품이었고, 나머지는 하품이었다. 상품은 은빛 나뭇잎 하나뿐으로, 이 정도 등급의 비보가 보기 드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다 좋은 비보들이었지만 양준은 눈에 차지 않았다. 검, 창, 몽둥이 같은 비보는 그가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생사를 건 혈전에서는 오히려 맨 주먹으로 싸우는 것보다 못했다. 그중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것은 짙은 붉은색의 갑옷이었다. 갑옷은 빛무리가 흐르는 것이 아름다웠고, 무게도 가벼웠다. 입성 경지 고수의 맹공격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는 여성용 갑옷으로 관 속 여인의 해골에서 찾아낸 것이었다. 그 관은 다른 것과달리 안에 해골 두 구가 있었다. 하나는 당시 성주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성녀로 보였는데 둘은 꼭 기대어 생사를 함께한 듯했다.
갑옷은 가져다가 소안이나 하응상에게 선물하면 좋은 방어력이 될 터였다. 그는 얼른 갑옷을 갈무리했다.
잠시 뒤, 양준은 마지막 관 앞에 멈춰 섰다. 이상하게 이 관에는 비보의 흔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른 관과는 달리 뚜껑이 꼭 닫힌 채, 그 위에는 겹겹의 금제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다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금제가 많이 약해져 있었다.
관 앞에 서는 순간, 그의 몸속의 피가 빠른 속도로 흐르며 심장 박동도 더욱 빨라졌다. 관 속에서 무엇인가 그의 피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양준은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감지해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금제가 걸려 있어서인지 관 안의 현묘함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이 관은 유일하게 닫혀 있었다. 아마도 이 성주는 다른 이가 관을 열고 안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을 원치 않은 모양이었다. 만약 이상한 느낌이 없었다면 양준도 굳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 관이 매우 신경 쓰였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뚜껑에 올려놓았다. 이내 진원이 용솟음쳐 나왔다.
입성 경지 3단계 고수가 건 금제였기에 이치대로라면 양준은 해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기에 금제는 전성기 때의 위력이 아니었다.
반 시진이 채 안 되어 모든 금제가 풀렸다.
빛이 어두워지고 관 뚜껑에 걸려 있던 금제가 더는 작용하지 못했다. 양준은 심호흡을 하고서 뚜껑을 열었다.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해골이 눈에 들어왔다. 해골을 확인한 그는 깜짝 놀랐다. 해골의 몸 쪽 뼈의 팔 할 정도가 모두 부러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있는 성주들은 모두 입성 경지 3단계의 최정상 고수들이었다. 이 정도 경지라면 육신의 강도나 골격의 단단함으로 보아 어떤 공격에도 뼈가 거의 부러지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이 말해 주고 있었다. 이 성주는 죽기 전에 강한 적수와 목숨을 건 혈전을 벌였고 이겼든, 졌든 간에 흠씬 두들겨 맞은 건 확실했다. 죽음도 혈전에서 부상당한 것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어떤 고수가 입성 경지 3단계 고수를 때려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양준의 시선은 해골의 가슴 쪽에 있는 검은 병에 이끌렸다.
성주는 죽기 전에 검은 병을 감싸 쥔 두 손을 가슴 쪽에 얹고 있었다. 병에도 금제가 걸려 있었는데 그 속의 물건을 보호하려는 듯했다.
무시무시하고 사악한 기운이 병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양준은 순간 몸과 마음이 고통스럽다는 착각이 들었다.
찌지직-
양준이 관의 결계를 파훼하면서 병 속의 물건이 불안정해졌고, 지금은 병에서 튀어나오려는 모양인 듯했다.
검은 병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한순간에 수많은 금이 갔다. 병의 주둥이 쪽 금제의 빛도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며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양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왠지 병 속의 물건이 자신과 연관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은연중 그는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었다.
짤랑-
검은 병이 갑자기 산산조각 나면서 금빛이 나타났다. 그것은 눈부시게 빛나며 성릉 전체를 밝게 비추었다. 성릉에 설치되었던 각종 금제들은 금빛이 비추는 순간 모두 해제되어 기능을 잃었다.
하늘을 찌르는 사악한 기운이 금빛을 중심으로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모든 관들이 휘말려 날아가다가 허공에서 폭발했다. 성주들의 해골도 한순간에 가루가 되었다.
양준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금빛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낯빛이 바뀌더니 엉겁결에 소리쳤다.
“마신의 금빛 피?”
금빛에서는 짙은 피비린내가 풍겼다. 틀림없이 피였다. 게다가 그것은 황금처럼 눈부셨고, 간담을 서늘케 하는 사악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구천성지의 성주가 그것이 봉인된 병을 손에 꼭 잡고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마신의 피 외에 양준은 다른 것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마신의 금빛 피 한 방울이 왜 이곳에 있지? 전설 속 대마신은 성주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이때, 눈앞에 떠 있던 마신의 금빛 피가 갑자기 목표를 찾은 듯, 금빛 그림자를 남기면서 양준의 미간으로 날아들더니 곧 사라졌다. 곧이어 양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온몸의 피가 들끓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몸속에 원래 있던 마신의 피가 활성화된 것처럼 모두 폭발했다. 무시무시한 위력이 경맥과 피, 살 사이를 흐르면서 순식간에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오장육부가 타면서 고통스럽게 그지없었다.
눈부신 금빛이 양준을 뒤덮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었다. 날씨가 급변하고 짙은 핏빛 기운이 들끓으면서 소현계는 금빛과 핏빛으로 어우러진 기괴한 공간으로 변했다.
곧이어 금신이 꿈틀거리며 뿌드득, 소리를 내었다. 그와 동시에 금신 속에 저장되어 있던 사악한 기운이 마구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문으로 바뀌어 양준의 피부를 뒤덮었고, 그의 피와 살 속으로 스며들어 가더니 자취를 감췄다.
금빛과 핏빛으로 물들었던 소현계는 다시 검은색으로 뒤덮이면서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양준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온몸이 전율하고 피부가 쩍쩍 갈라지면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땅바닥을 적셨지만, 그의 눈앞에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이 천천히 펼쳐지는 것 같았다. 그 속에서는 천지를 뒤흔들 듯한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