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7장. 걔는 반드시 후회할 거야
잠시 뒤, 은밀한 곳이 감지되자 양준은 곧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눈 깜짝할 사이에 허공의 힘이 몰려왔고,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더니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대낮의 맑은 하늘 아래에 서 있었다. 눈앞에는 성릉이라고 새겨진 청석이 보였다. 처음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왔던 것이다.
양준은 얼른 온몸의 기운을 거두고 조용히 신식을 내보내 주변을 살펴보았다.
성릉에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지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청석 앞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지금은 그가 몰래 도망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구천성지를 떠나기만 하면 어디든지 마음대로 갈 수 있었다. 서휘가 아무리 대단한 재주가 있다 해도 다시는 그를 잡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신식으로 살펴보고 나서 양준의 낯빛이 이상해졌다.
구천성지 전체가 아수라장이 된 듯했다. 마치 금방 큰 싸움을 겪고 난 것처럼 곳곳이 난장판이었고, 산 사이에 있던 가옥도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공기 속에는 옅은 피비린내가 풍기는 동시에 귓가에는 은은하게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이때, 익숙한 생명의 기운이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졌다. 아마 그의 존재를 발견했는지 그 기운은 순간 불안정해졌다.
양준은 고개를 돌렸고 마침 안령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고귀함과 순결을 상징하는 성녀는 지금 이 순간, 하늘색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또한 흰 옷에도 먼지와 피가 여기저기 묻은 것을 보아 어디서 일하다가 온 것 같았다. 양준을 보는 순간, 안령아는 기쁨과 놀라움을 안고서 멍하니 제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안령아가 입을 실룩이면서 말을 하려는데 양준이 원래 자리에서 사라졌다. 곧이어 다시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양준은 안령아의 입을 꾹 틀어막고서 구석진 정자로 끌고 갔다.
“소리치지 마. 그러면 놔 줄게.”
양준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안령아의 눈동자에는 옅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양준의 말에 그녀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양준은 그제야 그녀를 놓아주고 씩 웃고는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안령아가 혹시라도 자신을 죽여 입막음하려는 줄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나왔어?”
안령아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양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에 나왔어.”
“역시 넌 나올 수 있었어.”
안령아는 붉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얼굴에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동안 그녀는 줄곧 양준의 안위를 걱정했었다. 양준이 강요에 못 이겨 성릉에 들어간 데 대해, 안령아는 줄곧 자신이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녀는 자책감에 시달리며 살마저 빠질 정도였다.
“나왔으면 됐어. 어서 가 봐. 대장로님이랑 다른 장로들이 눈치채기 전에 어서 가.”
안령아는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양준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안령아를 흘끔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보내줄 거야?”
“그래. 네가 여기에 남으려는 생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잡아 두어도 괜히 네 미움만 받을 텐데, 그럴 거면 그냥 보내주는 게 나아.”
양준의 표정이 살짝 흔들리더니 감격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봐?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가지도 못해.”
“네가 예뻐 보여서.”
안령아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흘겨보았다.
“말만 번지르르하지. 네가 나쁜 놈인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그 한마디에 내가 넘어갈 거 같아?”
양준은 억지 웃음을 짓고는 곧 진지하게 공수했다.
“그럼 이만 간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자.”
“그래. 빨리 가. 남쪽으로 가. 대장로님이랑 장로들은 지금 모두 북쪽에 계셔.”
안령아가 당부했다.
양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방향을 확인한 다음 조용히 남쪽으로 사라졌다.
양준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아름다운 그림자가 갑자기 안령아의 옆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옥영 장로님!”
안령아는 깜짝 놀라 입을 막은 채 소리쳤다.
옥영은 양준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탄식하고는 말했다.
“이렇게 놔주다니. 너 괜찮아?”
“보셨어요?”
안령아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옥영이 언제부터 자신을 뒤따라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서 방금 전 광경을 모두 지켜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아무 미련도 없이 급히 떠나는 것만 봤다.”
“이곳에 미련 남을 것도 없잖아요.”
안령아는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넌? 그를 위해 애태우고 그리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는데도 너한테 일말의 감정도 없다는 거야? 너도 그에게 어떤 감정도 없어?”
옥영이 담담한 표정으로 안령아를 바라보았다.
안령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놈이지만 제가 그의 배필로는 한참 모자라죠. 그리고 저도 별다른 감정은 없어요. 그래서 친구로 남는 게 더 좋아요. 걔 옆에 있으면 안정감이 드는 건 부인하지 않을게요. 어떨 때는 내가 걔보다 어리다는 착각마저 드니까요……. 그리고 지금 성지가 이 꼴이 되었는데 걔까지 말려들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대장로님께는 얘기하지 마세요. 부탁이에요. 그냥 그가 성릉 안에서 죽었다고 생각하자고요.”
옥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안령아는 옥영의 팔을 잡고서 애교를 부리며 애원했다. 그녀의 생떼에 옥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알았어. 그만해. 그럼… 말하지 않을게. 난 오늘 아무것도 못 봤다. 령아, 너도 며칠간 힘들었잖아. 어서 가서 쉬어. 밖에 일은 우리가 처리하면 돼. 이젠 네가 성지의 유일한 희망이야. 네가 성녀가 수련해야 할 모든 공법을 알고 있잖니. 이번에 고비를 넘기고 다음 세대의 성녀를 양성하려면 너밖에 없어.”
옥영이 승낙하자 안령아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성지의 현재 참혹한 상황을 떠올리자, 두 여인의 눈빛은 곧 어두워졌다. 이번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얼마 안 되어 다들 이곳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옥영도 이렇게 쉽게 안령아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옥영 장로는 역시 말이 통하는군요.”
정자의 주변에서 문득 덤덤한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스라하게 들리는 것이 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옥영의 낯빛이 바뀌며 온몸의 진원을 급히 모았다.
“누구냐?”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림자 하나가 한쪽에서 나타났다. 그는 웃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천영?”
안령아는 순식간에 구천신기 중의 한 초식임을 알아챘다. 이는 신비하고 묘한 신법으로 적을 상대하거나 도망칠 때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안령아는 순간 당황하다가 놀란 눈빛으로 다시 돌아온 양준을 바라보았다.
“왜 아직 안 갔어?”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옥영을 힐끔 보았다.
방금 전, 그는 이미 누군가 안령아의 뒤를 쫓아왔다는 것을 감지했었다. 때문에 안전을 기하기 위해 그는 한쪽에 숨어 한참 동안 감시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뜻밖에 두 여인의 대화를 듣게 되었고, 이렇게 떠나면 어쩐지 가슴이 찔릴 것 같았다.
“어떻게 내 신식의 탐지를 피했지? 분명 멀리 간 것을 느꼈는데, 언제 돌아온 건가?”
옥영은 황당한 눈빛으로 양준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입성 경지 1단계인데, 양준은 인기척 없이 그녀의 옆에 접근했다. 양준이 그녀에게 적의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그녀는 이미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옥영은 순간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미래의 성주는 전혀 가늠할 수가 없군.’
“왜 그렇게 긴장하세요? 제가 뭘 하려 한 것도 아니고.”
양준은 씩 웃고서 옥영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물었다.
“방금 전부터 무척 신경 쓰였는데, 구천성지에 무슨 일이 생겼어?”
안령아가 대답하려고 입을 벌름거리는데 옥영이 갑자기 싸늘하게 말했다.
“자네와 무슨 상관인가? 성주의 자리에 오를 생각이 없다면서 그걸 물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양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옥영은 지난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공손한 태도였는데 지금은 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싫어하니,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옥영과 따지고 싶은 생각이 없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마세요. 저도 쓸데없는 일에 참견할 생각은 없거든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고는 뒤돌아 가버렸다.
“가지 말게나.”
옥영이 다시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왜 그러세요?”
양준은 짜증난 표정으로 그녀를 뒤돌아보았다.
옥영은 착잡함과 난감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한참을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우선 급히 가지 말고 내 말을 듣게나.”
“미안한데요, 지금은 알고 싶지 않습니다. 아는 게 많을수록 귀찮은 일이 많아지거든요.”
“자네… 자네 어쩌면 이럴 수가 있나?”
옥영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무뢰한같이 성주로서의 위엄과 자세가 하나도 없지? 성릉에 들어갔던 거 아닌가? 왜 아직까지 저런 태도인 거지? 보통 성릉에 들어갔다 나오면 성지를 제 집처럼 생각해야 하는데.’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옥영이 답답한 표정을 하자, 양준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곧바로 정자의 걸상에 앉아 안령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말해 봐.”
안령아는 몰래 옥영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옥영이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양준을 쏘아보는 것을 보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가볍게 웃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알아서 뭐 하려고. 너도 알잖아. 상황을 알게 되면 곧 골칫거리를 떠안게 될걸.”
“방금 전에 상황이 위급한 것처럼 말했잖아. 그러니 당연히 알고 싶지. 네가 우리는 친구 사이라며… 난 친구가 몇 안돼.”
양준이 진지하게 말했다.
안령아는 감동해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웃음꽃을 활짝 피우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구척은 나중에 너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은 걸 후회할 거야.”
“물론이지. 걔는 반드시 후회할 거야.”
양준은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