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8장. 외우내환
만약 안령아가 남아 달라고 애원했다면, 양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안령아는 그를 놔주었다. 온전히 그를 위해서였다. 안령아가 자신을 위해 주는데, 양준은 모른 척하고 차마 그냥 떠날 수가 없었다. 구천성지에 큰 변고가 생긴 게 분명했다.
양준이 스스로 남으려 하자, 안령아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그에게 그동안 일어난 일들을 말해 주었다. 양준은 그제야 자신이 성릉에서 족히 9개월을 머물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준이 성릉에 들어가고 난 뒤, 처음 반년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반년이 지난 어느 날, 성지 외곽의 결계와 진법이 갑자기 기능을 잃게 되었다. 장로와 호법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떻게 해도 원인을 찾을 수가 없어 보수하거나 재가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남성고가 결계와 진법이 사라진 것을 감지하고 다시 성지로 쳐들어왔다. 다 함께 힘을 합쳐 남성고를 물리쳤으나 성지의 많은 재산이 훼손되었고, 사상자도 많이 나왔다. 그런데 이때, 설상가상으로 외부의 적까지 침입해 들어왔던 것이다.
“외부의 적이라고?”
양준이 깜짝 놀랐다.
“성지가 강하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적이 없는 세력이 어디 있겠어? 전임 성주께서 계실 때는 그들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전임 성주께서 세상을 뜬 지 2년이 지났고, 새 성주도 아직 자리를 계승하지 않았잖아. 그들에게는 좋은 기회였던 거지. 성지의 산들은 모두 수련하기 좋은 곳들이거든. 진작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거야.”
“그건 엎어진 놈 꼭뒤 차는 거잖아.”
“맞아. 그런데 다 그들만의 책임이라고는 할 수 없어. 전임 성주께서 계실 때, 강압적인 면도 있었거든. 그래서 아마 속으로 이를 갈고 있었나 봐…….”
안령아는 어두운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옥영이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서 탄식하더니 말을 이었다.
“몇 안 되는 작은 세력들은 큰 문제가 아닐세. 우리 성지는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네……. 문제는 남성고가 그동안 밖에서 천인공노할 험한 짓을 많이 하고 다녔다는 거야. 몇 세력은 이를 기회로 삼아 많은 고수들을 선동해 끌어 모아서는 우리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네. 고수들은 남성고에게 이익을 침해당했거나 아니면 지인들이 남성고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성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거든.”
“엎친 데 덮친 격이군.”
양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만, 구천성지의 결계와 진법이 기능을 잃은 게 반년 전이라면, 때는 마침 그가 성주의 영혼 반지를 얻었을 때였다.
‘그것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니겠지?!’
짐작은 가능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보름 전에 그자들이 또 찾아와서 남성고를 내놓으라고 떠들어 댔다네. 하지만 남성고는 반년 전의 접전에서 부상을 입고 멀리 도망쳐 지금은 종적을 찾을 수가 없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사람을 내놓는단 말인가? 대장로께서 그들에게 사정을 말했지만 전혀 소용없었다네. 성지를 욕심내는 세력들이 옆에서 계속 부채질하니까 결국 싸움이 붙었지. 양쪽 모두 사상자가 나왔네. 쌍방의 골이 점점 더 깊어져서 이젠 도저히 화해할 방법이 없을 거 같네. 휴……!”
“어떤 세력들이 와서 말썽을 피우는 겁니까?”
양준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앞장선 건 근처에 있는 파현부(破玄府), 전혼전(戰魂殿), 유명종(幽冥宗)일세. 세 곳이 주모자들이지. 만약 그중 하나라면 성지의 근본이 좀 상하더라도 대처할 방법이 있겠지만, 그자들이 많은 세력의 고수들을 끌어 모아서 문제라네. 정말 맞붙어 싸우기라도 하면 성지는 거의 세상의 절반 세력을 모두 적으로 돌리는 것이란 말일세.”
말하면서 옥영의 얼굴에는 혐오의 빛이 서렸다.
“그렇게 힘든 상황입니까?”
양준도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남성고가 그동안 밖에서 했을 짓을 생각해 보면 설명 가능했다. 남성고는 가는 곳마다 살육을 벌였을 터였다. 이는 구천성지에 있어 잠재된 큰 위험이었다. 입성 경지 2단계인 그녀는 신통력까지 지니고 있어, 그녀와 상대하려면 입성 경지 3단계는 되어야 했다. 세상을 둘러봐도 그 정도의 고수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심지어 천소종의 초능소도 입성 경지 3단계가 됐는지 알 수 없었다.
“자네가 상상하는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네. 그들이 탐내는 건 성지의 재산뿐이 아닐세. 더 중요한 건 령아라네.”
옥영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하고는 의미심장하게 안령아를 힐끗 보았다.
양준은 눈동자를 굴리더니 곧 알아차렸다.
“그들은 문파의 제자를 성녀와 짝을 맺어주고 성주의 전승을 얻으려 하겠군요?”
성주의 전승을 얻으면 그야말로 벼락출세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몇십 년 동안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거대한 기연이나 마찬가지였다.
“맞네. 보름 전 그들은 물러가면서 한 달 내에 남성고를 내놓지 못하면 성지를 초토화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네. 그리고 바로 그날 저녁, 대장로께 비밀 서신을 보냈지. 전임 성녀를 내놓지 못하겠으면 현임 성녀로 대체해도 된다고.”
옥영은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주판 한번 잘 튕기는군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죽기를 기다리는 겁니까?”
양준은 그들의 뻔뻔스러움에 혀를 내두르다가 되물었다.
옥영은 어두운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
“그럼 무슨 수가 있나? 어디 갈 데도 없는데. 아직 보름이나 남아 있으니, 그동안 대장로께서 동원된 세력들을 설득해, 그들이 스스로 물러나기를 바라야지. 만약 주모자들만 남으면 그들도 더는 나대지 못할 걸세. 그리고 고비를 넘기고 나면 다시 그들과 결판을 내야지.”
“전임 성주가 참 여러모로 사람을 힘들게 하는군요. 생전에 좀 잘 대해 주지, 그들이 찾아와 소란을 피워도 할 말이 없잖습니까.”
양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누구 편인가?”
옥영은 순간 불쾌해져 양준을 흘겨보았다.
“그냥 사실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양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전임 성주의 수단이 강압적이었던 데다 그들도 해마다 수련 물자를 바쳐야 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전임 성주의 보호가 있었기에 그 세 곳의 세력들도 무사할 수 있었어. 이제 와서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그들이 배은망덕한 거야.”
안령아가 해명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전임 성주가 그들을 보호하다니?”
양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한테 말하지 않았었나? 성지는 인령의 변두리야. 앞쪽에 위치한 높은 산을 지나면 수해밀림(獸海密林)이라고, 바로 요족의 세력 범위야. 성지가 이곳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면 저쪽의 요족 대존(大尊)이 진작 이곳을 공격해 차지했을 거야.”
“요족? 그럼 산 너머가 요역이란 말이야?”
양준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놀라서 물었다.
“그래, 맞아.”
“그런데 왜 이 기회에 쳐들어오지 않았지?”
사실 전임 성주가 죽은 뒤, 가장 먼저 움직여야 할 쪽은 요족이었다. 인간, 요족, 마족은 서로 간에 철천지원수로 알력이 심했다. 요족들이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않은가?
양준은 왠지 이 가운데 남모를 내막이 있을 것만 같았다.
안령아는 옥영의 뜻을 묻는지 그녀를 바라보았다. 옥영은 착잡한 표정을 하고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령아는 그제야 나지막하게 말했다.
“전임 성주와 요족 대존 사이에 친분이 있어……. 그들이 쳐들어오지 않은 건 아마 그 때문일 거야.”
“어? 그러니까 요족이 인간미는 더 있다는 거네……. 요족 대존도 실력이 약하지 않을 텐데.”
양준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서 가볍게 냉소했다.
“누구도 본 적 없지만, 아마도 실력이 강할 걸세.”
옥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은 우리가 말한 것처럼 엄청 안 좋아.”
안령아는 말을 마치고 양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옥영도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양준이 큰 골칫덩이를 떠안기 싫어 가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양준이 성릉에서 무사하게 나왔다는 것은 시험을 통과했음을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양준은 지금 성주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인물이 자리를 지킨다면 제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소사를 처리하기도 편리했다.
두 미인이 뚫어지게 바라보자, 양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대장로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 물음에 안령아와 옥영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옥영이 얼른 대답하고서 웃는 얼굴로 앞쪽에서 길을 안내했다.
“날 따라 오게나.”
양준과 안령아는 그 뒤를 따랐다.
“너… 정말 성주가 되려고?”
안령아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아니야. 오해하지 마. 다만 지금은…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우려고. 내가 돕는다고 이번 위기를 반드시 넘길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 힘이 닿는 데까지 해 볼게. 그래야 정말 구천성지가 이번 재난으로 무너진다고 해도 날 원망하지는 않을 거잖아.”
“그래. 그러면 돼. 넌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그리고 우리 정말 친구 사이 맞지?”
안령아는 웃음꽃을 피웠다.
“맞아. 그러니까 절대 날 사랑해서는 안 된다. 만약 날 사랑하면 친구도 하지 않고 그냥 떠날 거야.”
양준이 사악하게 웃었다.
“그건 또 무슨 자신감이야! 세상 여인들이 다 너를 연모하는 거 같아? 너도 괜찮지만, 내가 좋아하는 유형은 아니거든.”
안령아는 얼굴이 상기되어 친근하게 양준을 툭 치면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넌 어떤 유형을 좋아하는데?”
양준이 놀란 척하며 물었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우람하고 위풍당당하면서 사람들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
안령아는 환상에 빠져 달콤한 표정을 지었다.
“안목이 꽝이야.”
양준은 잘난 척하며 고개를 연신 저었다. 그 모습에 안령아는 깔깔 웃었다.
가는 길에 보니 수많은 가옥이 무너져 있었고 땅에는 핏자국과 싸움 흔적이 가득했다. 한창 바삐 움직이던 성지 제자들은 옥영과 안령아를 보자 너도나도 예를 올렸다. 그리고 다시 안령아와 나란히 걸어가는 양준을 알아보고는 하나같이 입을 딱 벌렸다. 다들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했다.
서휘는 앞쪽에서 사람들을 지휘하면서 바쁜 모양이었다. 옥영이 미소를 띠고서 그런 서휘를 불렀다. 서휘는 고개를 돌리고 대답하려다가 하마터면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떡 벌린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